'이중감정'으로 새롭게 느끼는 제인 오스틴의 통찰
인간의 보편적 감정과 사회의 본질 꿰뚫어
BBC 선정한 '지난 1천년 최고 문학가' 2위
서거 200주년 10파운드 지폐 주인공 올라
'이중감정자'들에게 깊은 위안과 통찰 제공
제인 오스틴의 삶, 작은 세계 속의 큰 통찰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은 물리적으로는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살았지만, 그녀의 문학적 시선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 감정과 사회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제인 오스틴은 1775년 12월 16일 영국 남부 햄프셔의 스티븐튼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목사인 아버지 조지 오스틴과 어머니 카산드라 사이에서 6남 2녀 중 일곱째로 태어난 그녀는 평생을 비교적 좁은 지역에서 보냈다. 오빠들이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거나 해군 장교, 사업가, 목사가 되었던 것과 달리, 제인과 언니 카산드라는 당시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제한적인 교육만을 받았다.
그녀의 정규교육은 8세 무렵 친지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1년, 이듬해 레딩 수도원 여자기숙학원에서 1년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의 한계는 오히려 그녀의 독창적 사고와 예리한 관찰력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활기차고 애정이 넘치는 집안분위기 속에서 자란 제인은 어려서부터 문학작품을 탐독하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다.
16세에 희곡을 쓰기 시작한 제인은 21세에 첫 장편소설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녀의 문학적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796년 남자 쪽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는 아픔을 겪으며, 훗날 <오만과 편견>이 되는 서간체 소설 <첫인상>을 집필했지만 출판을 거절당했다. 1805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형제, 친척,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1809년 초턴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다.
문학적 성취, 작은 세계에서 피어난 거대한 꽃
제인 오스틴의 문학적 성취는 그녀가 살았던 제한적 공간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1811년부터 1817년까지 단 6년 동안 발표한 <이성과 감성>(1811), <오만과 편견>(1813), <맨스필드 파크>(1814), <에마>(1815), <노생거 사원>(1817), <설득>(1817) 등 여섯 편의 소설로 그녀는 영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프랑스혁명, 미국독립전쟁, 나폴레옹전쟁 등으로 격변하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한적한 시골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연애를 그렸다는 이유로 역사의식과 사회인식이 결핍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 관찰에 불과하다. 오스틴은 개인들의 일상생활이라는 소우주를 통해 누구보다도 세밀한 관찰력과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으로 당대의 물질 지향적 세태와 허위의식을 폭로했다.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 창시한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
제인 오스틴은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창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BBC가 실시한 '지난 1000년간 최고의 문학가'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셰익스피어에 이어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다. 단 여섯 편의 소설만으로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 세계 독자들을 매료시킨 것은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성취다.
오스틴의 작품은 낭만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당시에 현실주의적 관점으로 인간의 일상과 감정을 그려냈다. 그녀의 리얼리즘, 유머, 사회논평과 함께 신랄한 아이러니를 사용한 문체는 현재까지 평론가, 학자, 그리고 대중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이는 후대 영국소설가들에게 새로운 문학적 방향을 제시했다.
젠더와 계급에 대한 선구적 시각
오스틴은 당대 영국 중상류층 젠트리의 생활을 펜에 담으면서도, 여성의 지위와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특히 여성이 경제적 독립 없이 결혼에 의존해야 하는 사회구조의 모순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이는 후대 페미니즘 문학의 토대가 되었다.
오스틴의 작품은 영국적 가치와 정서를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그녀가 그려낸 영국 시골의 목가적 풍경과 상냥한 예절, 그리고 절제된 감정표현은 '영국다움'의 원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2017년 그녀의 서거 200주년을 맞아 영국에서는 10파운드 지폐의 모델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대적 해석의 가능성
오스틴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 현대에도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탄생하며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는 그녀의 작품이 단순한 시대적 산물이 아니라 인간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문학의 힘
35년간 영국에서 살면서 한국과 영국 사이에서 느끼는 '이중감정'을 통해 제인 오스틴의 문학적 성취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녀는 문학을 통해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보편적 감정과 사회의 본질을 탐구했다.
오스틴의 작품이 200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녀가 특정한 시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진리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영국에 있으면서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에 있으면서 영국을 그리워하는 '이중감정'처럼, 인간은 늘 현재가 아닌 다른 곳, 다른 시간을 그리워하는 존재다.
제인 오스틴은 이러한 인간의 복잡 미묘한 감정과 사회모순을 예리한 통찰력으로 포착해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녀의 작품은 영국문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문학이 지닌 경계 없는 소통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작은 세계에서 살았지만 큰 울림을 남긴 제인 오스틴의 삶과 작품은, 물리적 경계를 넘나들며 사는 현대의 '이중감정자'들에게도 여전히 깊은 위안과 통찰을 제공한다. 그녀의 문학이 영국 사회와 역사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계속 이어질 살아있는 전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