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 부활 국가사업 ‘라피더스’ “낙관 불허”
올해 2나노 시제품, 2027년 양산 야심찬 도전
일본정부 주도로 양산까지 총 5조엔 투입
미국, 중국 견제를 위해 다시 일본 지원
라피더스 투자 꺼리는 민간기업 고작 73억 엔 출자
기술개발과 시장확보도 난관 “아직 1부 능선”
일본 반도체 부활을 내걸고 일본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해 온 첨단반도체 생산공장 ‘라피더스’ 건설에 자동차 대기업 ‘혼다’도 출자하기로 했다고 <일본경제신문>이 11일 보도했다. 이제까지 라피더스에 출자 의사를 밝힌 업체는 혼다까지 포함해 관련업계 9개사, 5개 은행이다.
지난 4월에는 일본정부가 라피더스에 출자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통과돼, 올해 후반에 정부와 민간이 총 2000억 엔(약 1조 9000억 원)을 출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올해 2나노 시제품, 2027년 양산의 야심찬 도전
라피더스는 올해(2025년) 후반에 2나노급의 최첨단 반도체 시제품을 생산하고, 2027년에는 이를 양산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일본의 현재 반도체 제조 기술은 40나노급 범용 칩 수준으로, 2나노와는 20년의 기술격차가 있다. 이를 2나노 칩 설계기술을 갖고 있다는 미국 IBM(아이비엠)의 지원을 받아 기술격차의 벽을 단숨에 뛰어넘겠다는 야심만만한 도전이 라피더스 건설이다.
“아직 1부 능선”, “낙관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천문학적인 투자와 수율 및 양산 기술 확보 여부, 양산이 되더라도 그것을 사 줄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느냐는 등의 난제들이 산적해 있어, “아직도 낙관할 수 없다”고 <닛케이>는 썼다. 라피더스를 이끌고 있는 고이케 아쓰요시 사장도 양산까지 가는 도정에서 “아직 1부 능선(10%선)”이라고 말했다.
미국, 중국 견제를 위해 다시 일본 지원
IBM은 낙후된 반도체 제조 생태계 복원을 국가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본정부에게 첨단기술 제공 조건으로 대규모 투자를 요청할 경우 이를 선뜻 받아들일 것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이는 한국과 대만에 치우친 첨단 반도체 제조의 지정학적 위험성을 우려해 온 미국정부도 환영할 일이었다. 어쩌면 이런 기획의 주체가 미국정부일 수 있다. 일본정부는 미국 쪽 의도에 환호하며 IBM의 제안을 적극 수용했다.
반도체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디지털시대에 반도체 생태계가 무너져 버린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 일본은, 반도체 생태계 복원을 국가 미래를 좌우할 핵심사업으로 설정하고 2022년 8월에 라피더스를 설립했다.
미국은 1980년대에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일본의 반도체산업을 몇 차례의 협정 등을 통해 억눌렀고, 그 틈새에서 삼성전자와 대만 TSMC가 첨단 반도체 제조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이 급격히 부상하면서 미국은 다시 일본을 중국 견제를 위한 동아시아 중심축에 놓는 냉전시대의 동아시아 전략으로 돌아가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올해 2나노 시제품, 2년 뒤 양산까지 5조 엔 투입
라피더스는 올해 후반 2나노 시제품을 낼 때까지 2조 엔(약 19조 5000억 원), 2027년 양산까지는 총 5조 엔(약 47조 5000억 원)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됐다. 지금까지 일본정부 경제산업성은 누계 1조 7225억 엔(약 16조 3000억 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양산까지의 5조 엔을 채우려면 3조 엔 이상이 더 필요하다.
일본정부 라피더스 지원 주도
일본정부는 보조금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라피더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책을 마련했다. 지난 5월에 ‘라피더스 지원법’이라 불리는 개정 정보처리촉진법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일본정부는 경제산업성의 정보처리추진기구(IPA)를 통해 반도체기업에 출자할 수 있게 됐다. 경산성은 올해 당초 예산에서 출자금으로 1000억 엔(약 9500억 원)을 확보했고, 정부 보유 반도체장비와 라피더스 발행주식을 교환하는 ‘현물출자’ 방식도 검토했다.
라피더스 투자 꺼리는 민간기업 고작 73억 엔 출자
그러나 민간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태세가 아니다. 지금까지 민간의 출자 규모는 미미한 수준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3조 엔 이상을 정부 지원에만 기대야 하는 문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민간기업 출자 등 다양한 자금조달 필요성이 제기됐고, 혼다 등이 출자의향을 밝힌 것도 그런 필요와 정부의 압력이 작용한 결과다.
지금까지 민간 출자는 도요타 자동차와 NTT(일본전신전화), 광고회사 덴쓰, 손정의의 소프트뱅크, 소니 그룹, NEC(일본전기주식회사), 키옥시아 등 7개사가 10억 엔씩, 여기에 미쓰비시UFJ은행의 3억 엔을 합쳐 73억 엔이 고작이다. 이들 기존 주주 8개사에 혼다와 후지쓰, 미쓰이스미토모은행, 미스즈은행, 일본정책투자은행, 호쿠요(북양)은행이 추가로 출자 의향을 밝혔다.
“정부 보조금 받는 처지여서 거절할 순 없으나...”
그런데 추가 출자 의향을 밝힌 기업의 주주들조차 라피더스에 대한 대규모 출자에는 여전히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출자에 응한 기업의 한 관계자는 “우리도 국가(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처지에, (정부의 출자)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 다른 기업의 간부도 “출자액이 돌출해 보이지 않도록 타사들과 보조를 맞추겠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출자를 꺼리고 있다. 정부 압력 때문에 마지못해 출자하는 모양새다. 이는 곧 라피더스의 사업적 성공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
IBM서 기술받은 150명 투입
이런 상황을 바꾸려면 라피더스가 기술개발과 고객확보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낼 필요가 있다.
지금 홋카이도 치토세의 라피더스 건설 현장에서는 4월에 시제품을 위한 라인이 가동을 시작했다. IBM의 거점에서 최첨단 반도체 회로선폭 2나노급 반도체 제조기술을 전수받은 기술자 약 150명이 투입돼 있다. 오는 7월에는 최초의 시제품이 나올 예정이다. 고이케 사장은 이런 상황을 두고 “아직 1부 능선”이라고 했다.
IBM의 지원으로 20년 격차의 40나노 기술장벽을 넘어 일거에 2나노급을 생산하려면, 계획대로 시제품 생산과 양산에 성공하더라도 수율을 높여가는 끝없는 난관 극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양산 성공하더라도 전망 밝지 않은 고객 확보
게다가 생산에 안정성을 가져다 줄 대형 고객 확보도 쉽지 않다. 라피더스가 진입하려 하고 있는 반도체 파운드리 제조(위탁제조)는 대만 TSMC가 세계 수요의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다. 미국 엔비디아를 비롯한 세계의 다수 반도체 업체들이 TSMC에 생산주문을 하고 있고, 삼성전자와 미국 인텔도 파운드리 생산을 본격화하고 있다. TSMC는 올해 후반기에 라피더스보다 2년 먼저 2나노 반도체 양산을 시작한다.
소량다품종 틈새 생산으론 경쟁력 없어
대형 고객(수요자)들은 이미 조달처가 정해져 있는 셈이어서 라피더스가 양산을 시작하더라도 뚫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 때문에 라피더스는 고부가가치의 특별주문 반도체로 특화함으로써 고객들의 ‘제2의 선택지’가 되겠다는 전략을 짜 놓고 있다. 고이케 사장은 “올해 안에 고객 윤곽이 떠오를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으나, “소량다품종 생산에 그칠 경우 (양/덩치가 좌우하는) 볼륨(volume) 비즈니스인 반도체산업에서 코스트(비용)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고 <닛케이>는 지적했다.
일단 시제품부터 완성하고 고객과의 협의를 계속해 가면서 품질을 높여갈 수밖에 없다. 출자를 검토하고 있는 민간 회사들도 납득할 수 있는 성과를 제시해 자금조달을 다양화해야 한다. 이런 숱한 난관들을 하나하나 뚫고 나아가야 비로소 라피더스가 목표로 삼고 있는 2027년 양산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