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깎아내리기로 다극화 시대 막을 수 있을까?
히틀러 패망에 결정적 역할을 한 러시아(구소련)
5월 9일 전승절은 러시아 국민적 정체성의 핵심요소
그 역사를 깎아내리는 미국과 유럽 정상들
러·중국 주도 다극화 국제질서에 대한 불안감이 원인
폄훼만 말고 세계 변동에 대한 공부부터 해야
미국과 유럽의 5월에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나치 독일의 패망이다. 그것은 러시아에 특히 각별하다. 지금부터 10년 전인 2015년 5월 8일, <워싱턴포스트>는 러시아의 2차대전 전승절 7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칼럼을 실었다. 제목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소련이 히틀러로부터 세계를 구했다는 사실(Don’t forget how the Soviet Union saved the world from Hitler)”(사진 1 참조).
러시아의 전승절 애써 무시하는 유럽의 정상들
<포스트>의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노르망디와 이오지마 전투, 해방된 프랑스 마을들, 뉴욕의 거리에서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는 젊은 병사들. 아이젠하워 장군의 강철같은 지도력, 처칠 수상의 흔들림 없는 신념, 원자폭탄의 거대한 위력. 서양, 특히 미국민들이 품고 있는 2차대전에 대한 이미지는 이런 것들이다.”
미국민뿐 아니라 대부분은 2차대전을 그렇게 미국과 영국 연합국이 일본제국과 나치 독일을 물리친 전쟁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실제 내용과 과정에서 2차대전은 독일과 구소련(이하 러시아) 사이의 전쟁이었다. 히틀러 독일과 파시즘의 패망에 러시아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전쟁이 어떤 결말로 이어졌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점에서 전후 세계질서는 미국이 세웠지만, 그 토대는 러시아가 쌓은 것이다.
러시아의 전승절(Victory day)은 그 같은 뜻을 담은 기념일이다. 지난 9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는 2차대전 승리 8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시진핑 중국 주석, 룰라 브라질 대통령, 유라시아 국가들과 아프리카, 남미 등 29개국 정상들이 행사에 참석했다.
그런 전승절에 시비를 걸듯, 5월 초, 모스크바에 드론공격을 감행했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승절 행사에 참여하는 외국 정상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사실상 테러 위협을 가했다. 9일, 유럽연합 외무장관들은 우크라이나 리비우에 모여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단죄하겠다며 책임자 처벌을 위한 전범재판소 설치를 공표했다. 10일, 영국, 프랑스,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소위 ‘의지의 연대(coalition of willing)’ 정상들은 키이우에 모여 우크라이나 군사지원, 러시아 제재 강화 등을 결의했다.
나라 구하기 위한 러시아의 ‘대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
러시아는 2차대전을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41년부터 45년까지 4년여의 전쟁 동안 러시아는 상상을 초월하는 희생을 겪었다.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 사상자는 모두 2700만여 명에 이른다. 60% 정도의 가정이 전쟁으로 한 명 이상의 가족을 잃었다. “국경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길에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은 단 한 채도 없었다.” 1945년 러시아를 방문했던 아이젠하워 장군의 목격담이다.
독일군 사상자의 4분의 3도 러시아와의 전투, 즉 동부전선에서 발생했다. 나치가 혹한 속 포위작전을 벌이다 궤멸적 패배를 당한 스탈린그라드(오늘날 볼고그라드)와 사상 최대의 탱크전으로 기록된 쿠르스크(얼마 전 우크라이나군이 몰살당한 지역) 전투가 대표적 사례다. 그에 비해 서유럽 쪽 서부전선은 기간도 짧고 피해 규모도 작았다. “영국, 미국, 러시아 등 세 참전국 부상자의 95%가 러시아군에서 나왔다.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온몸으로 막아낸 러시아의 희생은 서방 연합국에 지극한 행운이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M. 헤이스팅스는 그렇게 썼디.
그럼에도 미국의 공과 희생이 가장 컸다는 트럼프
그런데 트럼프는 그 역사를 아예 빼버렸다. 그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나치 독일을 패망시킨 것은 영국과 미국”이라며 “2차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나라는 미국이다. 용기, 힘, 군사력에서 미국을 따를 자는 없었다. 다른 동맹국들보다 미국의 희생이 제일 컸다”라는 식의 발언을 이어갔다.
이 같은 트럼프의 역사왜곡 행태에 영국의 주간지 <스펙테이터>(1828년 창간.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는 ‘역사공부를 더 하라’고 꼬집으며, 2차대전 중 미군 전사자는 총 41만 8500명으로 러시아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치라고 지적했다. <스펙테이터>는 또 트럼프의 역사에 대한 무지, 동맹국의 희생을 경시하고 왜곡하는 행태는 거의 병적 수준이라면서, 자신에겐 그렇게 발언할 도덕적 권위가 없다는 점(신뢰도가 의심스러운 발뼈 이상 진단서를 근거로 트럼프가 병역을 면제받은 사실을 가리킨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신랄하게 꾸짖었다.
유럽 정상들도 러시아 깎아내리기에 앞장섰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8일 개선문 광장에서 열린 ’유럽 승리의 날(Victory in Europe day(V-E day)’. 유럽에서는 8일, 러시아에서는 9일을 기념일로 삼는다)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의 유령을 다시 유럽에 불러 들였다”라고 러시아를 성토했다. 독일 대통령 스타인마이어는 의회에서 가진 V-E day 기념식 연설에서, “나치와의 전쟁과 자유민주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전쟁에는 단 하나의 공통점도 없다”며, 러시아의 주장은 ‘역사를 속이는 거짓말’이라고 푸틴 대통령을 비난했다. 폴란드 총리는 세르비아 대통령과 슬로바키아 수상의 모스크바 전승절 행사 참석을 “부끄러운 헹동”이라며 힐난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역사를 따져볼 때, 전쟁의 유령을 유럽에 다시 불러온 것은 미국과 유럽 국가 자신들이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이미 임기가 끝난 대통령이 계엄령으로 통치를 이어가는 우크라이나를 ‘자유민주국가’라 칭하는 것은 자유와 민주라는 단어를 욕보이는 말이다. 러시아가 말하는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denazification)’는 그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집단과 군부세력이 네오나치이고 그들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를 역사를 속이는 거짓말이라고 하는 건 현실을 모르는 무지이거나 외면한 거짓말이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유럽 지도자들의 전승절 행사 참석을 막으려 협박을 아랑곳하지 않았던 유럽연합 집행부와, 어떻게든 전쟁을 계속하려는 유럽 국가들의 몫이다.
다극화 시대를 맞는 집단서방의 불안감
미국과 유럽 정상들이 러시아를 폄훼하는 근저에는 다극화 시대라고 부르는 지정·지경학적 변동에 대한 불안감이 놓여있다. 서에서 동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지정·지경학적 변동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패하고 있다.
흔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는 실전을 담당하는 보병 역할이고, 무기/탄약/병참/정보수집/공격목표설정/통신/지휘 등은 미국과 나토 유럽국가들이 하나로 뭉쳐 뛴, 즉 집단서방 연합군 대 러시아 사이의 전쟁이다(러-우 전쟁 전문가 A. 머커리스). 다른 말로 하면, 전쟁에 패한 건 우크라이나는 물론, 미국을 포함한 집단서방 전체라는 뜻이다. 한편, 중국의 경제적 파워는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국제질서의 변동요인이다. 이번에 트럼프발 관세전쟁에서 중국이 거둔 판정승은 경제의 균형추가 어디로 기우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사실 미국이 벌여온 대중국 무역전쟁의 뿌리는 2000년대 부시 정권까지로 올라가지만, 그것이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진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쇄국정책 스타일의 견제는 중국 기술과 경제의 자체 경쟁력을 키웠다.
주지하다시피 최근 15년 사이 러시아와 중국은 브릭스 국가들과 함께 강력한 국제 파워로 올라서면서 다극화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고 있다. 이는 자기중심적 우월주의를 품고 있는 집단서방에게는 충격이다. 설상가상 전쟁에서 지고 있다니… ‘서방의 패배’라고 프랑스 인류학자 E. 토드가 지적했듯, 집단서방은 자신들이 밀려나는—유럽은 심지어 미국으로부터도 소외되는 듯한—현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러시아 폄훼는 그 불안감이 두려움과 질시로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무턱대고 깎아내리지만 말고 세계 변동에 대한 학습부터 하라
러시아는 집단서방의 잇따르는 역사 왜곡에 분노하고 있다. 파시즘에 승리를 거둔 역사를 폄훼하는 것은 파쇼적 행태라는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다. 푸틴 대통령은, 전승절은 “히틀러를 물리친 신성한 승리의 날로 러시아 역사는 물론 러시아 국민적 정체성의 핵심 요소”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치와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해 희생한 “소련 군인과 인민들을 기리고 추모할 인간적 용기도 의지도 없는” 서방 지도자들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ational Security Council)는 2012년 발간한 2030년 미래보고서에서 ‘1. 2030년은 패권 국가(hegemon) 없는 다극화 세계(multipolar world)로 진입하게 될 것. 2. 다극화 질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는 미국이 다른 나라와 협력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가 될 것’이라고 썼다.
우리가 목격하듯, 지금 협력적 국제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나라는 유럽이나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이다. 유럽은 다극화 시대의 미래전망은커녕, 우크라이나 전쟁을 어떻게든 지속하려는 온갖 술책에 몰두하고 있고, 미국은 그 중간 어디쯤에서 멈칫거리고 있다. 이런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면 유럽은 물론, 미국 역시 어려운 함정에 빠질 것이다. 이럴 때, 다극화 질서에 대한 진지한 학습과 정책 논의는 집단서방, 또 미국에 경도돼 있는 한국, 나아가 세계 각국에 주어진 최우선적 과제의 하나다.
사족: 올 5월, <워싱턴포스트>에서는 전승절을 되새기는 칼럼 같은 건 찾을 수 없다. 대신, 거창한 기념식 행사를 푸틴의 “선전 공세(propaganda blitz)”라고 부르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미국, 유럽, 우크라이나, 그리고 러시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조명하는 기사를 내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