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를 뒷받침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

ESS는 제4의 계통 인프라

2025-04-30     김대경 아시아개발은행 컨설턴트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다. 인공지능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는 연간 수십 퍼센트씩 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전력난을 걱정한다. 발전소가 부족하고, 송전망이 부족하다는 말도 종종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전력 공급 부족’이라는 전통적 사고에 갇힌 진단일 수 있다. 문제는 총량이 아니라, 공급 방식이다.

한국의 발전설비는 2023년 말 현재 재생에너지를 제외하고도 이미 약 110GW에 달한다. 이를 80%만 활용해도 연간 800TWh 가까운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연간 전력소비량은 600TWh에 미치지 못하므로 총량 기준으로는 과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부족’을 말하는가? 바로 시간과 공간의 불균형 때문이다. 전기는 생산 즉시 사용되어야 하고, 먼 곳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초고압 송전망이 필요하다. 여기서 답이 되는 것이 바로 에너지저장시스템(ESS)이다.

 

중국 상하이에 대용량 에너지 저장장치(ESS)인 ‘메가팩’ 생산 공장을 짓기로 한 테슬라. 사진 제공 테슬라

지금까지 ESS는 주로 ‘시간 분산’ 수단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발전이 많은 시간대에 전기를 저장해 두었다가, 수요가 높은 시간대에 방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피크 절감이 아니다. 시간을 넘고, 공간을 넘고, 전력망의 계층 구조마저 유연하게 만드는 새로운 인프라가 필요하다. ESS는 바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열쇠다.

첫째, ESS는 시간 분산을 통해 전력 설비의 활용도를 획기적으로 높인다. 낮 시간에 남는 태양광 전력을 저장하고, 밤에 AI 데이터센터나 산업단지에 방전하면 같은 발전설비로 1.5배 이상의 실효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 ESS 없던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둘째, ESS는 공간 분산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철도 기반의 BESS(Battery Energy Storage System) 수송이다. 재생에너지가 집중된 서해안이나 남부 지역에서 잉여 전력을 저장한 BESS 열차를 수도권 산업단지까지 운송하면, 전통적인 송전망 없이도 에너지 전달이 가능하다. 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전력망을 바라보는 인식의 대전환이다. 전기는 선을 타고 흐르기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한다.

셋째, ESS는 ‘망 분산’을 가능하게 한다. 기존 전력계통은 중앙집중형이며, 대규모 송전망과 배전망이 계층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ESS는 이러한 구조를 느슨하게 만든다. 지역 단위 마이크로그리드, 공단 단위 자가망, ESS 허브 간의 유연한 전력 교환 등 중앙망 없이도 운영 가능한 전력망 구조가 가능해진다. 이는 전력계통의 복원력을 높이고, 사이버 리스크와 기후 리스크에 강한 구조를 만든다.

ESS는 더 이상 단순한 배터리가 아니다. 이제는 ‘제4의 계통 인프라’로 정의할 때다. 발전, 송전, 배전에 이어 ESS는 시간·공간·망을 넘는 새로운 전력망의 축이 될 수 있다. AI 시대의 전력난은 ESS의 전략적 활용으로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 우리가 바꿔야 하는 것은 에너지의 총량이 아니라, 에너지를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재생에너지 원가에 ESS 비용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재생에너지가 늘어날수록 ESS(에너지저장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 전력계통의 기존 구조를 유지하려는 관점에서는 이 ESS 설치 비용을 오롯이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의 원가로 귀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언뜻 보기에 타당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존 전원 체계의 구조적 한계를 가리고 재생에너지에만 추가 부담을 씌우는 방식이다. ESS는 전력계통 전체의 유연성과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핵심 인프라이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은 특정 전원이 아닌 전체 계통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ESS 비용을 특정 전원에만 귀속시키는 방식은 세 가지 측면에서 공정하지 않다.

첫째, ESS는 재생에너지만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ESS는 단지 태양광이나 풍력의 변동성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ESS는 수요반응(DR), 주파수 조정, 피크부하 완화 등 전력계통의 전반적인 안정성과 유연성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기반시설이다. 특히 공급이 부족한 시간이나 갑작스러운 수요 증가 상황에서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력망 전체의 탄력성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설치 목적이 재생에너지 연계이더라도, 실제 운용에서는 ESS가 다양한 방식으로 계통 전체에 기여한다. 따라서 ESS 비용을 재생에너지의 원가에만 포함시키는 것은 실질적 역할을 왜곡한 것이며, 사회적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간과한 것이다.

둘째, 기저발전 체계의 보완 비용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 전력 시스템은 오랜 기간 기저발전 중심, 특히 원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다. 그러나 출력 조절이 어려운 원전은 수요가 낮은 시간에도 계속 전력을 생산하면서 잉여전력이 발생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양수발전소 같은 보완 설비가 반드시 병행되어 왔다. 이는 사실상 원전을 위한 ESS 기능을 수행해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전은 주파수 조정, 전압 유지 같은 계통 보조서비스를 스스로 수행하지 못하며, 이를 위한 보조설비가 추가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 비용들은 통상 LCOE(균등화 발전단가) 산정에서 누락되며, 원전이 ‘값싸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오용된다. ESS 비용을 재생에너지 원가에 포함해야 한다면, 원전의 기저발전 특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보완 비용 또한 공정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셋째, 원전 대형화에 따른 계통 리스크 비용도 포함되어야 한다.

원전은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해 계속 대형화되어 왔다. 하지만 단일 발전기의 규모가 커질수록, 고장이나 정지 시 계통 전체에 가해지는 충격은 더욱 커진다. 1.4GW급 원전이 한 기만 이탈해도 동일한 규모의 예비력을 즉시 투입해야 하며, 이 예비력은 LNG 복합화력, 양수발전, ESS 등을 통해 준비된다. 이러한 대기 비용은 사회 전체가 부담하고 있지만, 역시 발전원가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반면, 재생에너지는 출력의 변동성은 있지만 개별 설비가 작고 분산되어 있어, 하나의 설비가 탈락하더라도 계통 리스크는 작고 복원도 빠르다. 즉, 원전은 ‘출력은 안정적이지만, 사고 시 계통 리스크가 큰 전원’이며, 재생에너지는 ‘출력은 변동성이 있지만, 계통 위험은 작은 전원’이다. 이러한 특성 차이에 따른 시스템 차원의 위험 비용 역시 비교 평가에 반영되어야 한다.

에너지 전환의 시대에 정책의 중심은 특정 전원의 경제성에 대한 왜곡된 정보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ESS는 재생에너지만을 위한 부속 설비가 아니며, 원전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금껏 사회가 부담해온 다양한 보완 비용과 시스템 리스크도 함께 드러나야 한다. 정책 설계는 기술적 중립성과 계통 전체의 안정성 확보라는 원칙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전원 간 공정한 비교는, 각 전원이 계통에 미치는 영향과 그로 인한 추가 비용까지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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