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바람 타고 SK하이닉스 훨훨, 삼성전자 퍼덕퍼덕
SK하이닉스 1분기 영업이익 7.4조…또 역대급
지난해 4분기 이어 두 분기 연속 삼성전자 추월
시장 선점한 HBM이 효자노릇…올해도 2배 성장
삼성전자 뒤늦게 추격…따라잡을지는 불투명
전체 메모리 반도체 선두도 SK하이닉스에 내줘
인공지능(AI)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HBM)가 SK하이닉스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지난해 4분기에 이어 올해 1분기에도 역대급 실적을 기록한 것이다. HBM은 챗GPT 같은 범용 AI 수요가 급증하며 품귀 현상마저 보이는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탑재된다. SK하이닉스는 압도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이 52%가 넘는다. 고공행진 중인 고사양 HBM 매출에 힘입어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반면 30년 이상 부동의 1위였던 삼성전자는 HBM 후발주자로 전락했다. SK하이닉스와의 점유율 격차도 10% 이상이다. HBM 개발은 가장 먼저 시작했으나 이재용 회장 등 최고경영진의 판단 착오로 사업부를 축소하는 잘못을 범했다. AI가 지배할 미래 반도체를 준비하는 대신 D램과 낸드 플래시 등 기존 제품을 고도화하는데 매달렸다. 선두 자리를 지키려면 끊임없이 혁신을 통해 새판을 짜야 하는데도 매너리즘에 빠져 이를 망각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SK하이닉스는 위험을 감수하고 최첨단 제품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고,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기술 수준을 끌어올리며 삼성전자를 압박하고 있다. 그 결과가 실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SK하이닉스, 1분기 기준으로 역대 최대 실적
SK하이닉스는 연결 기준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7조 4405억 원을 기록했다고 24일 공시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7.8% 급증한 것으로 작년 4분기 영업이익 8조 828억 원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역대급 성과다. 시장 전망치 6조 7000억 원대와 비교해도 10% 이상 웃도는 깜짝 실적이다. 1분기 기준으로는 역대 최대치다. 종전 1분기 최대 기록은 반도체 호황기였던 2018년 1분기로 영업이익이 4조 3673억 원이었다. 올해 1분기는 이보다 3조 원 이상 많다. 놀라운 사실은 영업이익률이 42%에 달한다는 점이다. 전 분기보다 1%포인트 상승하며 8개 분기 연속 개선 추세를 이어가고 있다.
매출도 17조 6391억 원으로 작년 동기 대비 41.9% 증가했다. 순이익은 8조 182억 원으로 323% 늘었다. 계절적 비수기인 1분기에 이 정도 실적을 달성한 것은 HBM의 힘이다. SK하이닉스 매출 가운데 HBM 비중은 절반에 육박한다. 주력 제품을 부가가치가 높은 품목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가 52.5%, 삼성전자가 42.4%, 마이크론이 5.1%이다. 점유율만 보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양강 구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발 앞 선 HBM 투자로 AI 반도체 기술 주도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큰 손인 엔비디아에 HBM을 안정적으로 공급 중인 반면 삼성전자는 수율과 품질 평가에서 여전히 불안하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022년 HBM 양산에 성공했고 곧바로 엔비디아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엔비디아의 GPU에 들어가는 HBM의 약 80%는 SK하이닉스 제품이다. SK하이닉스는 지금도 HBM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이날 1분기 실적발표 후 언론과 투자자를 상대로 한 회견에서 2분기 이후에도 높은 수익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폭탄에 반도체가 포함되지 않은 데다 HBM의 경우 1년 전 공급 물량을 합의하는 제품 특성상 매출이 줄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올해 HBM은 전년 대비 약 2배 성장하고, 2분기에는 신제품인 HBM 5세대 매출 비중이 HBM 전체 매출의 절반이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고사양 제품 판매가 늘어난다는 것은 영업이익률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 영업이익 1조 원대 그칠 듯
이에 비해 삼성전자 실적은 초라하기만 하다. 연결 기준 올해 1분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잠정치)은 6조 6000억 원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0.15% 감소했다. 시장 전망치보다는 높았으나 SK하이닉스와 비교하면 실망스러운 실적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 영업이익은 1조 원 안팎에 불과하다. 메모리 반도체는 약 3조 원 영업이익을 냈으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 비메모리 사업에서 2조 원 적자를 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어느 정도 영업이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메모리 반도체 외에 스마트폰과 가전 등 다른 사업이 선방했기 때문이다. 특히 1분기에는 갤럭시 S25 출시 효과가 있었다. SK하이닉스와 달리 삼성전자는 2분기 이후 불확실성이 큰 편이다. HBM 외에는 기대할 만한 사업이 별로 없다. 트럼프 발 무역전쟁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하면 D램 같은 범용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꺾일 수 있다. 스마트폰 부문에서도 신제품 효과가 1분기보다는 떨어질 것이다.
증권사들이 제시한 삼성전자 목표주가는 7만~8만 원대에서 정체돼 있다. 이것도 고평가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만큼 삼성전자의 성장 잠재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다. 실적과 주가가 모두 부진한 것에 대해 이재용 회장 등 최고경영진이 얼마나 위기감을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입으로는 ‘위기’를 말하면서도 이렇다 할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조되는 실적을 보면 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에서 투자 시기를 놓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