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열린 인혁당 추모 '4950' 행사 가보니…
1975년 4월 9일 여덟 열사 희생된 지 어언 50년
판결 18시간만에 사형집행한 박정희 동상 버젓이
하마터면 그 악령을 50년 만에 다시 만날 뻔했다
대구 시민들 '박준표 동상'이라며 당장 철거 요구
경기 중부 시민 40여명 함께 민주회복 결의 다져
4월 첫 주말인 4월 5일 아침 7시 경기중부(안양, 군포, 의왕, 과천) 시민 41명을 태운 버스가 멀리 대구를 향해 내달렸다. 동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4.9통일열사 정신계승 시민대회'와 경북대 캠퍼스에서 열린 '여정남 열사 추모제 및 대동한마당'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1975년 4월 9일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에 연루된 8명은 대법원 사형 판결 후 불과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50주기를 맞는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기라도 하듯 내려가는 내내 봄비가 버스 유리창을 때렸다.
버스 안에서 나는 대구의 근현대 민중사를 소개했다. ➀1919년 3월 8일 청라언덕에서의 3.1만세운동 ➁1946년 미군정 식량정책에 항거한 대구 10.1 민중봉기 사건 ➂1960년 3.15선거를 앞두고 자행되는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일으킨 2.28 학생의거 사건 ➃1964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 ➄1974~75년 인혁당 재건위(2차 인혁당) 조작 사건 ➅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약칭 남민전) 사건 ➆1996년 32살로 생을 마감한 김광석의 민중가요에 이르기까지 대구의 뿌리는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질경이 같은 야도(野都)였다.
특히 1960년 대구 지역 고교생 1000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인 2.28 학생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라 평가받는다. 1974~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합(약칭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혐의를 뒤집어씌운 유신정권의 대표적인 파렴치 조작사건이었다. 인혁당 사건은 사형집행 32년만인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됐다.
이어 해방 공간 이후의 민중사를 소상하게 소개한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장은 "1960년대 초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일면 반골의 피를 타고나기도 했으나, 권력욕에 눈이 멀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며 괴물로 변해 갔다"고 진단하고 "괴물이 된 박정희는 끝내 자신의 본향인 대구경북의 야성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고 성토했다.
오전 11시 대구 시내에 도착한 일행은 '4950'(4.9인혁열사의 50주기) 행사에 참석하기 전까지 방천시장 상인들이 조성한 '김광석 다시그리기길'과 1919년 3.1만세운동을 벌였던 90계단 위의 청라언덕, 제중원, 대구제일교회, 계산성당 일대를 둘러보았다.
동대구역 광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10분 전, 여우비처럼 내리던 빗줄기가 제법 굵어지기 시작했다. 행사 주최 측에서 4950 기념버튼과 자료집 외에 1회용 비닐 우의까지 제공해 주었다. 1시간 반가량의 행사 내내 비를 맞으면서도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초혼(招魂) 퍼포먼스를 필두로 행사위원장인 김찬수 4.9인혁재단 이사장의 대회사, 임을 위한 행진곡 합창, 여러 차례의 공연과 판토마임 등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졌다. 행사는 빗줄기를 잠재울 만큼 그 열기가 더해갔다. 이날 행사장에서 참가단체로 내가 속한 '리영희기념사업회'도 소개됐다. 오직 진실만을 갈구한 고 리영희 선생의 영혼도 이 자리에 함께 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광장 행진 때는 참가자 모두 지난해 12월 조성한 박정희 동상 앞에서 "독재자 박정희의 동상을 철거하라"고 외쳤다. 이때 대구 시민으로 보이는 한 노인이 우리 곁에 다가와 "저거 박정희 대통령 동상이 아녀, 저건 대구시장 홍준표 동상이여!"라고 말했다. 일행은 박장대소했다. 지난해 말 동상을 세우고 광장 이름조차 박정희광장으로 바꾸었으나, 여론은 안경만 씌우면 생김새가 영락없는 홍 시장 본인 얼굴이라고 비웃었다. 철도공단의 허락 없이 동상을 세운 대구시는 결국 동상 철거 소송에 휘말렸고, 대구의 시민단체도 '박정희 우상화사업반대 범시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동상을 철거하고 기념사업을 중단하라"고 강력히 규탄했다. 잠시 박정희 동상 철거 농성으로 바뀐 '4950' 정신계승 시민대회는 모두 끝났다.
우리는 다음 행사장인 경북대 캠퍼스로 이동했다. 재학생들의 풍물패를 뒤따라가 경북대 사회과학대 앞에 조성된 '여정남공원'에 도착했다. 오후 5시부터 열린 여정남 열사 50주기 추모제도 끝까지 지켜보았다. 경북대 정외과 출신의 여정남 열사는 1974~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 억울하게 사형당한 8명의 중의 한 사람이다. 2007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경북대 민주동문들은 여정남기념사업회를 결성해 학내에 추모비를 세웠고, 학교 측도 그의 이름을 내세운 공원을 건립했다. 경북대 후배들이 나서 매년 추모제 행사를 열어왔는데 50주기인, 올해에는 추모제와 함께 대동한마당을 크게 개최했다.
사형집행 당시 31세였던 여정남 외에 나머지 일곱 열사도 모두 영남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도예종, 송상진, 서도원 열사 세 명은 영남대 출신들이다. 안타깝게도 지난 3월 29일 열린 50주기 영남대 추모문화제 때 영남대 동문들은 추모비를 세우려 했으나, 대학 당국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포크레인까지 동원해 행사장 진입을 막는 바람에 추모비 건립을 유보하는 대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오후 6시부터 경북대 일청담 특설무대에서 열린 여정남 열사 50주기 대동한마당 행사장 주변에는 밥차와 먹거리 장터, 기념품과 책 판매 부스 등이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엄숙한 추모제라기보다는 대동제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갈 길이 멀어 귀경길에 오르기 전 도입부만 슬쩍 보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리를 떠야만 했다.
상경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대구 방문의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여정남공원에서 보았던 '뫼비우스의 띠를 손에 거머쥔 큰손 동상'의 의미를 되새기고 갑니다. 안팎이 연결된 띠는 삶과 죽음, 선과 악, 진실과 거짓 등을 상징합니다. 그 경계에서 우리는 항상 옳음의 편에 서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대구로 내려갈 때 이곳 출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를 읊조리며 그의 이름으로 초·중·장의 운을 띄워 단시조 한 수를 남겼다. 그 내용처럼 내려올 때 기분 그대로를 안고 돌아왔다.
이 봄의 한가운데 다 함께 서 있어도
상처받은 민초들의 심장은 서늘하여라
화병을 달랠 길 없는 오랜만의 대구행
방문기를 마무리하다 보니 4월 4일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선고 육성이 귓가에 쟁쟁하다.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역사는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2분을 영구히 기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50년 전 1975년 4월 8일 오전 11시 22분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그날 대법원(재판장 민복기) 최종 판결은 군검찰부의 구형 그대로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하재원 우홍선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 이들 8인에게 사형을 언도한다'였다. 그리고 속전속결로 다음 날 새벽에 사형을 집행했다. 이를 두고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비난했다. 하마터면 우리는 50년 전의 악령과 마주칠 뻔했다. 우리가 인혁당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 군포시민신문에도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