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기독’이 싸우는 개신교 분열의 비극
[극우 개신교 집단의 형성 과정을 더듬어본다-중]
해방 후 평안도 개신교인 대거 월남해 교권 장악
미군정 비호 속에 일본이 남긴 종교 재산 독차지
이승만은 성탄절 휴일과 군종 제도 등 특혜 안겨
성경 해석 놓고 2차 분열…용공 시비로 3차 분열
20세기 초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개신교 교세가 강했다. 평안도 지방은 중앙 권력에서 소외되고 중국과는 가까워 외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미국 북장로회도 이곳에 선교 역량을 집중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신의 섭리’라고 여길 만한 두 차례의 ‘기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1866년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목사가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들어왔다가 격분한 평앙 주민들의 칼에 맞아 숨진 일이다. 한국 개신교에서는 그를 최초의 순교자로 본다.
1907년 평양은 대부흥운동의 요람이 됐다. 토머스는 죽기 직전까지 한문 성경을 나눠주며 선교 집념을 불태웠다. 한 포졸이 성경책을 뜯어 집 도배하는 데 썼다가 우연히 본 구절에 감화돼 예수를 영접했다. 이 집이 여관으로 바뀐 뒤 1893년 미국 북장로회의 새뮤얼 오스틴 모펫 선교사가 묵으며 토머스 목사에 얽힌 사연을 듣고 여관을 사들여 평양 최초의 예배당 널다리골교회로 꾸몄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집회 원형 만든 평양대부흥운동
널다리골교회 신도 가운데 길선주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최초의 한글 번역 서양 소설 ‘천로역정’을 읽고 하늘의 소리를 듣는 체험을 한 뒤 전도와 교육에 매달렸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널다리골교회는 신도가 급증했고 1900년 새 건물을 지어 이사하며 장대현교회로 개명했다.
길선주는 1907년 1월 14일 성경 공부 모임인 사경회(査經會)를 이끌던 중 죽은 친구의 아내가 맡긴 돈 100달러를 가로챘다고 털어놓았다. 이를 시작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 릴레이가 펼쳐졌고 성령 강림을 체험했다는 간증이 속출했다.
한국 교회의 ‘오순절(五旬節) 사건’이라고 부르는 평양대부흥운동이다. 오순절은 예수가 죽자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50일째 되는 날 성령을 받아 각 나라 언어로 방언(方言)을 하며 초대교회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일제의 국권 침탈이 노골화하던 시기여서 현실도피적 태도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으나 그 덕에 한반도의 개신교인은 5만 5000여 명에서 갑절 이상 늘어났고 평양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영적 각성 운동의 성지가 됐다. 오늘날 새벽 기도와 통성(通聲) 기도, 신앙 간증과 부흥회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개신교 집회의 원형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을 무찌르자고 외치다가 은혜의 나라로 칭송
자료마다 수치는 다르지만 1945년 해방 당시 한반도의 개신교 신도는 40만 명 가량이었다. 이 가운데 30만 명이 북한에 있었고, 평안도가 가장 많았다. 이들은 38선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토지개혁과 공산화가 급속히 진행되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거 월남했다.
북한 출신 목사들은 미 군정의 적산(敵産) 불하 과정에서 일본 종교 단체의 토지와 건물 등을 넘겨받으며 단번에 남한 개신교계의 주류로 떠올랐다. 천리교(天理敎) 경성분소는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창립 당시 이름은 베다니전도교회)로 바뀌었다. 서울 남산 기슭의 조선신궁 별관 자리에는 장로회신학교가 들어섰다. 서울역 앞 동자동 성남교회와 장충동 경동교회도 모두 천리교 교당이 있던 곳이다.
이 밖에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의 교단과 소속 교회들이 전국의 적산 종교시설들을 불하받았다. 심지어 일본 불교 사찰도 불교 종단을 제치고 개신교단이 차지한 곳이 많았다.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며 “귀축영미(鬼畜英美·귀신과 가축 같은 영국과 미국)를 무찌르자”고 외치다가 돌변해 미국을 은혜의 나라로 떠받들 만도 했다. 당시 남한 개신교인은 인구 비율로 0.52%에 불과했으나 미군정 행정고문 11명 가운데 6명, 한국인 최고위직 50명 가운데 35명이 개신교 신자일 만큼 미군정은 개신교를 우대했다. 미국에 유학했거나 서양 선교사에게 배워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물도 대부분 개신교인이어서 출세나 득세에 유리했다.
서북청년회, 좌익 척결 앞세워 폭행과 살인 저질러
이런 현상은 감리교 신도인 이승만이 1948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가속화했다. 이승만은 국회 개원식을 비롯한 공개 석상에서 하나님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고 국가의 주요 의례를 개신교식으로 바꿨다. 크리스마스(기독탄신일)가 공휴일이 된 것도 부처님오신날(석가탄신일)보다 26년이나 앞선 1949년이었다.
성직자를 군대 장교로 임관시키는 군종(軍宗) 제도는 개신교(1948년), 천주교(1951년), 불교(1968년), 원불교(2007년) 순서로 도입됐다. 개신교 목사를 형무소(교도소)와 소년원 교무과장으로 임용하는 형목(刑牧) 제도는 1945년 12월 창설돼 1960년 4·19 직후 폐지될 때까지 개신교에만 주어진 특혜였다.
권력을 뒷배로 삼은 개신교인들은 곳곳에서 이권을 챙기고 횡포를 부렸다. 미군이나 정권 실세와의 연줄을 내세워 군납·관급 사업을 벌이거나 남의 재산을 갈취했다.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며 사사로이 폭행과 살인을 자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6년 출범한 서북청년회다. 이들은 미군정의 묵인, 이승만 정권의 비호, 영락교회를 비롯한 개신교계의 지원 속에 제주 4·3 사건과 6·25 전쟁 때 테러와 학살 등을 저질렀다. 이북에서 모든 것을 잃고 맨몸으로 월남하다 보니 공산당을 향한 복수심에 불탔고, 권력이 뒤에서 도와주니 거칠 것이 없었다. 북한군과의 전투나 간첩 색출 등에 공로가 있긴 했지만 폐해가 너무 컸고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6·25 전쟁도 교세를 키우는 계기가 됐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이북의 개신교인들마저 남하한 데다 유엔군 참전국 가운데 상당수가 개신교 국가여서 선교가 활발히 이뤄졌다. 구호물자 배급 등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진 것도 교세 신장에 톡톡히 보탬이 됐다.
남한에 북한군이 진주했을 때는 인민재판을 통해 반동분자를 처형했다가 유엔군이 수복한 뒤 부역자를 색출해 단죄하니 살아남으려고 개신교 신자를 자처한 사례도 많았다. 미군이나 국군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교회 다닌다고 말하면 공산주의자가 아닐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훗날 동쪽(경상도)에는 불교 신자가 많고, 서쪽(전라도)에는 기독교(개신교) 신자가 많다는 뜻의 ‘동불서기(東佛西基)’란 말이 생겨난 배경의 하나로 꼽힌다.
정전 후에도 정권과 결탁한 개신교의 교세 확장은 지속된다. 1954년에는 최초의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CBS)이 첫 전파를 쏘았다. 1990년 개국한 불교방송(BBS)이나 천주교 평화방송(PBC)보다 36년이나 앞선 것이다.
1955년 남한 개신교 신도 수는 100만 명을 돌파했다. 1956년 감리교는 이승만을 명예장로로 추대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때도 개신교계는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감리교 권사 이기붕 부통령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반면 가장 신도가 많았던 불교는 1954년 “대처승(帶妻僧)은 절에서 떠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를 계기로 비구승(比丘僧)과 대처승 간의 분쟁에 돌입했다.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에 과도하게 개입함으로써 불교계는 큰 손실과 상처를 입었다.
기장·예장으로 쪼개진 뒤 통합·합동으로 갈려
개신교 최대 교파인 장로교는 전쟁 직후 두 번째 분열을 맞았다. 분열의 씨앗은 1893년 캐나다장로회와 미국 북장로회가 이북의 선교지를 동서로 나눈 것이었고, 함경도와 평안도가 진보·보수 성향으로 갈린 것이 분열의 싹을 틔웠다.
함경도 출신의 김재준 목사는 1940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세우고 성경의 자유로운 해석을 추구했다. 반면 평안도 출신 박형룡 목사는 성경이 하나님 뜻에 따라 저술됐으므로 한 글자도 오류가 없다는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과 성경무오설(聖經無誤說)을 따랐다. 박형룡은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권위를 파괴한다고 비판하며 1948년 장로회신학교(1901년 평양에 설립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후신이자 현 장신대)를 서울 남산에 개교했다.
양 진영은 날카롭게 대립하다가 조선신학교 측이 1952년 한국신학대(현 한신대)를 세운 데 이어 이듬해 갈라져 나와 한국 장로교의 법통임을 선언했다. 1954년에는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로 명명했다가 1961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바꿨다. 기장과 예장은 신학과 교리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각각 진보·보수로 나뉘어 대조적인 행보를 걸었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 더욱 공고화된 개신교의 반공주의 경향은 장로교의 세 번째 분열을 불러왔다. 1948년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ecumenical movement)을 내걸고 발족한 세계교회협의회(WCC)에는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정교회도 소속돼 있었는데, 여기에 가입할 것인지를 두고 갈라선 것이다.
“일치 운동은 교회의 사명”이라고 주장하며 가입에 찬성한 세력은 통합, “공산주의자와 대화할 수 없다”며 반대한 세력은 합동이란 이름으로 딴 살림을 차렸다. 이번에도 박형룡은 합동 측을 대표하며 분열을 주도했다. 합동은 196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현 총신대)를 설립했다.
용공(容共) 시비에 따른 장로교의 분열은 다른 교단에도 파장을 미쳐 1960년대 초 감리교는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와 예수교대한감리회(예감), 성결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로 나뉘었다.
교단 분열이 사이비 논란과 가짜 목사 소동 부추겨
이념 갈등에 따른 분열상을 놓고 신학계에서는 ‘칼’(Ecumenical·세계교회주의)과 ‘칼’(Evangelical·복음주의)의 대결이라고 일컫는가 하면, 각기 ‘예수교’와 ‘기독교’란 명칭을 달고 다투는 형국을 두고 교단 밖에서는 ‘기독’과 ‘예수’가 싸운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기독(基督)은 메시아를 뜻하는 그리스도의 한자 음역이고 기독교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신앙이란 점을 떠올리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WCC 가맹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도 예장 합동을 비롯한 보수 교단들이 탈퇴했다. 보수 교단의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1989년 출범했다. 예장 합동과 한국 개신교 최대 교파를 다투는 예장 통합은 KNCC와 한기총에 모두 소속돼 있었다.
그러나 한기총은 2012년부터 예장 통합과 합동을 비롯한 주요 교단이 잇따라 탈퇴함으로써 보수 개신교 연합단체의 대표 자격을 잃었다. 2012년 출범한 한국교회연합(한교연)에 이어 2017년 발족한 한교총(한국교회총연합)이 한기총을 대신하고 있다.
장로교의 3차 분열 때까지는 그래도 신학 논쟁과 이념 대결의 성격을 띠었으나 이후로는 교단 권력이나 재산권 다툼과 관련이 깊었다. 이단으로 지목돼 새로운 교단을 차리는 사례도 많았다. 교단의 연쇄 분열에 따라 신학대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가톨릭(Catholic)’이란 말의 뜻대로 보편주의(普遍主義)를 표방하는 천주교와 달리 개신교(Protestant)는 가톨릭을 ‘반대(protest)’해 생겨났고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로 출발했기 때문에 교단 분열은 숙명이나 다름없다. 분열은 신학을 풍부하게 하고 경쟁을 통해 발전을 도모하는 등의 장점도 있어 나쁘게만 볼 일도 아니다.
그러나 교단이 쪼개져 있으면 일탈행위나 극단주의를 제어하기 어렵다. 분열 자체가 돌출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동안 개신교 안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이비 논란과 가짜 목사 소동은 교단 분열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개혁을 내세워 교단을 쪼개놓고 수구나 반동으로 치달은 사례도 수두룩하다. 한국 교회의 비극이자 한국 사회의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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