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테로토피아로서의 광화문 광장
악의 세력에 맞서 나라를 정화하려는 집단의지
응원봉, 떼창 그리고 무료먹거리 부스 등
혐오와 배제의 시선이 없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만날 세계'는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세상
1월 15일 윤석열이 체포된 후 탄핵을 찬성하는 민주세력은 3월 현재까지 광화문 광장에 모여 윤석열 파면을 요구하며 날마다 집회를 하고 있다. 민주세력이 주로 활동하는 장소는 경복궁 동십자각을 중심으로 경복궁역과 안국역 사이다. 시민단체들은 광화문에서 경복궁역 사이에 있는 인도에서 30여 개의 부스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반면 전광훈을 중심으로 한 탄핵을 반대하는 극우세력은 주로 세종문화 회관과 시청역 사이에서 활동 중이다. 한 공간 안에서 양립할 수 없는 두 세력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장소가 광화문 광장이다.
평상시 광화문 광장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된다. 이 주변은 차들이 달리는 도로로 쓰인다. 1월 15일 이후 광화문 광장과 주변의 차도는 그 기능이 상이하거나 심지어 정반대로 새롭게 만들어져 활용되는 단독적인 공간으로 변용됐다. 이 글은 윤석열에 대해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는 민주세력과 극우세력이 동시에 활동하고 있는 광화문 광장을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장소성에 관한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의 개념을 차용해 분석한 글이다.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utopie)와 달리 헤테로토피아는 사회 구성원들의 상상이 실현 가능한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헤테로토피아는 지도에 표시될 수 있다. 우리의 몸도 그 안에 존재하며 활동할 수 있다. 헤테로토피아는 상상 또는 환상에 입각해 장소를 새롭게 구성해 창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실재하는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이다.
광화문 광장의 현재적 의미
헌재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지리멸렬하게 내란 수괴 윤석열에 대한 선고를 미루고 있다. 헌재가 선고를 미룰수록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이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다. 평일 저녁에는 주로 수도권에 사는 시민들이 모여 집회를 한다. 주말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수십만이 합세해 대규모로 집회를 하고 있다. 내란이 종결되지 않는 현재 윤석열 탄핵에 대한 에너지가 갈수록 응집되고 있는 광화문 광장이 갖는 장소성을 분석해 의미를 찾는 일이 중요해졌다.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의 나머지 공간들과는 다르게 상이한 기능을 수행하는 상징적 장소가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광화문 광장이 갖는 의미의 층위들이 두터워지고 있다. 우선 민주세력이 주로 활동하는 광화문 광장은 대량학살을 계획했던 파시즘세력에 온몸으로 맞서 대한민국을 정화하려는 집단적 의지가 결집된 신화적인 장소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분할된 영토
광화문 광장은 민주세력과 극우세력이 격렬하게 투쟁하는 양립 불가능한 성격을 갖게 된 상징 공간이다. 이 두 세력이 한 장소 안에서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세력 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공간을 구획 분할해야 한다.
공간을 구획 분할하는 것은 경찰의 몫이다. 주말집회가 열리는 날이 되면 경찰은 세종로 공원과 역사박물관 사이에 있는 차도를 수십 대의 대형 경찰 버스로 견고하게 경계를 세워 각 세력에게 영토를 분할해 준다. 그 결과 광화문 광장은 철저하게 구획된 두 개의 복수의 활동 공간으로 영토화 되고 각 세력이 한 장소를 독점적으로 사용한다. 민주세력과 극우세력은 구획된 영토 안에서 한정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서로의 영토를 배타적으로 인식하며 애써 침범하지는 않는다.
시장경제 시스템의 무력화
민주세력이 운영하는 30여 개의 부스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무엇보다 큰 역할은 집회 참여자를 위해 먹거리를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다. 시민들은 적어도 집회에 참여하는 동안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 이는 집회를 주최하는 복수의 단체와 부스를 운영하는 각 시민 단체 구성원들이 시민들을 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연대의 대상으로 인식한 결과다. 연대의 손길은 민주세력의 영토에서 바가지요금으로 폭리를 취하는 수탈적인 시장경제 시스템이 발붙일 수 없게 만들었다.
반면 전광훈이 이끄는 극우세력은 다르다. 그들은 부스를 설치하고 전광훈의 친인척이 운영하는 알뜰폰 가입을 홍보했다. 자유일보 정기구독자 모집도 했다. 건강식품 등을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까지 홍보했다. 전광훈이 탄핵반대라는 명분으로 주말장을 열어 분할된 영토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면서 광화문 광장을 시장화한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해체된 영토
수십 년 동안 기득권 세력은 민주노총에 대해 귀족노조라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해 노동자 계급을 분리 고립시켜 중산층과 대립시켜 왔다. 윤석열 정권 초기에 보여준 것처럼 때로는 정치권력에 불리한 국면이 조성되면 이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돌파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시민들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혐오하면서 대한민국을 좀먹는 존재로 바라보며 민주노총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경향도 보여줬다.
견고하게만 보였던 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탄핵찬성 영토에서는 해체된다. 민주노총은 광화문 광장에서 누구보다 앞장서 집회를 개최하면서 투쟁했다. 지도부는 윤석열 파면 구호를 내걸고 단식도 마다지 않았다. 한편으로 대규모 집회가 열리면 선두에서 경찰에 저항하면서 길을 텄다. 한남동에서 그랬고 남태령에서도 그랬다.
학생과 여성, 지식인 등 노동계급 바깥에 있는 시민 계층은 민주노총의 투쟁에 박수로 화답했다.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이 광장이라는 공간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무력화해버린 것이다. 민주노총에 대해 귀족노조라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무력화한 광장에서 새로운 관계설정이 이루어졌다. 혐오와 배제의 시선이 아닌 서로가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동지 관계로 연대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상징기호와 개폐체계
상호 개방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환대와 배제의 체계를 갖는 것이 헤테로토피아이다. 광화문 광장도 이러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장소다. 민주세력과 극우세력은 분할된 각자의 영토 입구에서 개폐체계를 가동시켜 시민들을 검열한다.
각자의 세력은 상징기호를 갖고 있다. 응원봉과 깃발, 손피켓에 적힌 구호 그리고 각 정당의 로고는 민주세력의 상징기호로 작용한다. 민주 시민세력의 영토에서 위의 상징기호들은 환대의 대상이 된다. 이 상징기호 덕분에 입구에서 자동적으로 문이 열리게 되고 참여자들은 자신의 영토 안으로 무사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극우세력의 상징기호는 태극기 깃발과 탄핵반대가 적힌 손피켓이며 국힘당 로고다. 극우세력이 독점한 영토에서 이 상징기호는 환대의 대상이 된다. 이때 민주세력의 영토에서와 마찬가지로 극우세력의 상징기호는 그들의 영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동적으로 문을 열어주는 기능을 한다.
이 상징기호들은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기호를 내포한다. 극우세력의 상징기호가 민주 시민세력의 영토를 침범할 경우 부스에서 먹거리를 제공하지 않는 방식으로 문을 걸어 닫아 배제한다. 반대로 극우세력의 영토에서 민주세력의 상징기호는 입구에서부터 문을 걸어 닫으며 배제된다. 각자의 독자적인 영토에 진입하는 데 이 상징기호들은 문을 열거나 닫을 수 있는 열쇠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각자의 영토 밖에 존재하는 곳은 중화된 장소의 기능을 한다. 집회 진행 중에 시민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이동한다. 각 진영의 시민들은 자신의 상징기호를 노출시킨 채 인도를 배회하거나 상점에서 물건을 산다. 화장실에 가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기도 한다. 이 중화된 장소에서 각 진영의 시민들은 환대의 대상도 배제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이들이 머무는 장소가 개폐체계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점된 영토를 벗어나 개폐체계 밖으로 노출된 상징기호들은 이미 그 약호의 기능이 약화돼버린다.
접합된 문화와 세대의 융합
12·3 계엄령 직후부터 14일까지 여의도에서 열렸던 초기 집회에서 촛불과 민중가요는 기성세대를 응원봉과 대중가요는 청년세대로 짝패를 이루었다. 기성세대에 더해 청년세대가 대거 참여하면서 촛불이라는 집회문화의 공식과 짝패의 균형이 깨졌다. 초기에는 촛불과 응원봉이 함께 사용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는 촛불 대신 응원봉을 들었고 민중가요에 더해 대중가요를 떼창했다. 두 세대의 문화가 접합돼 창조적으로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청년세대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들을 위해 아껴온 응원봉을 들었다. 기성세대는 촛불 대신 윤석열 탄핵과 같은 문구 등을 새긴 응원봉을 들기 시작했다. 대중가수를 위한 획일화한 응원봉이 아닌 생김새와 크기가 다르고 불빛도 조금씩 다른 응원봉들이 밤거리를 형형색색의 빛으로 물들이게 했다. 기성세대가 청년세대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면서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결과였다. 촛불 대신 응원봉을 드는 행위에 대해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빛으로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의미가 만들어졌다.
여의도 집회에서 대중가요와 민중가요가 혼합돼 떼창으로 불리었다. 청년세대는 대표적으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두 곡을 집중해 불렀다. 집회 장소에서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법한 이 노래들은 여의도를 대형콘서트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장소로 만들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아침이슬>과 같은 고전적인 민중가요도 떼창으로 불리었다. 청년세대가 선곡한 대중가요는 여의도를 환상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민중가요는 지금·여기 여의도가 계엄세력에 맞서 투쟁하는 실재적인 장소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1월 15일 윤석열이 체포된 이후 장소를 옮겨 현재까지 집회를 하고 있는 광화문 광장에서도 여의도에서 경험했던 문화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접합력과 세대간 융합의 형태가 더욱 강화된 모습으로 말이다. 특히 <다시 만난 세계>는 내란이 종식된 후 민주주의가 회복돼 살아갈 다시 만날 세계로 재해석됐다. 그동안 집회에 참여해 온 기성세대가 거부하지 않고 이 노래를 적극 수용할 수 있었던 이유다. 청년세대는 민중가요를 떼창하며 기성세대에 화답했다. 대중가요의 떼창이 광화문 광장에 대한 환상성을 극대화했다면 민중가요는 지금·여기 광화문 광장이 저항과 투쟁의 장소라는 실재성을 강화해 주었다.
낙천적인 상상력과 환상속세계의 전복
<삐딱하게>와 달리 광화문 광장에서도 떼창으로 불리는 <다시 만난 세계>는 낙천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민주주의가 회복된 곧 다가올 미래세계에 대한 환상을 갖게 만든다. 떼창과 함께 응원봉이 뿜어내는 거대한 빛의 물결은 환상 속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동시에 '투쟁!'이라는 구호를 외침으로써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로서 내 몸이 광화문 광장에 존재한다는 장소성을 현실적으로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낙천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과 결합된 현실에 대한 자각은 민주주의가 회복될 미래 세계를 앞당기는 역할을 한다. 광화문 광장은 환상 속 세계가 위치를 가지지 않는, 그래서 내 몸도 그 안에 위치를 만들 수 없는 유토피아라는 관념을 전복시킨다.
현실로 만들어 지도 위에 위치가 표기되고 내 몸도 그 안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실재적 존재로서 나를 확인할 수 있는 헤테로토피아가 바로 광화문 광장이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다가올 미래에 우리가 보상으로 받게 될 선물은 민주주의가 회복된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