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의 진짜 적은 부패 스캔들이 아니다

모두가 주인이지만 누구도 주인이 아닌 〈한겨레〉

지배구조와 맞물린 허약한 구심력, 막강한 원심력

'87년 체제'의 자식이라는 지대(地代)는 정당한가

<한겨레> 민낯 있는 그대로 대면하고 재도약해야

2023-01-13     이태경
한겨레신문 창간호(1988년 5월 15일) [촬영 이상학]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연합뉴스

이태경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

87년 체제의 자식 〈한겨레〉가 창간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편집국 주요 간부의 부패 스캔들은 이전에 〈한겨레〉가 겪었던 추문(醜聞)들과는 성격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 〈한겨레〉의 창간 배경과 정신을 생각할 때 〈한겨레〉의 존립 근거를 흔들 만큼 위협적이다. 많은 시민들은 꽤 오래전부터 〈한겨레〉가 보인 이해하기 힘든 일련의 보도들과 논조를 접하면서도 그게 단지 협량한 염결성과 불구의 균형감각과 전략적 사고의 빈곤과 거시적 안목의 부재와 판단능력의 핍진 때문이라고 선해(善解)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부패 스캔들을 통해 〈한겨레〉에 대한 선해는 불가능하게 됐다.

물론 〈한겨레〉도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표이사와 편집인이 사의를 표시했고, 편집국장은 이미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해당 간부는 해고당했으니 말이다. 〈한겨레〉는 외부인사까지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도 구성했다.

여기서 우린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책임자들이 물러나고, 해당 부패 스캔들에 대한 사실 관계가 규명되며, 부패 재발 방지 대책이 마련되면 〈한겨레〉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회복되고 조락(凋落)의 기미가 역력한 〈한겨레〉가 다시 과거의 위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결코 긍정의 답변을 하기 힘들다. 〈한겨레〉가 봉착하고 있는 위기는 구조적인 데서 압도적으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번 부패 스캔들은 〈한겨레〉가 직면하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들에 비하면 차라리 부차적이며 사소할 수 있다. 〈한겨레〉에 20년 가까이 근무했던 사람으로서 차제에 〈한겨레〉가 〈한겨레〉가 터잡고 있으며 〈한겨레〉를 옥죄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을 정면으로 대면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내가 보는 〈한겨레〉의 구조적 문제점은 대략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 이유는 각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모두가 주인이지만 누구도 주인이 아닌 〈한겨레〉

먼저 〈한겨레〉의 지배구조를 들여다봐야 한다. 〈한겨레〉는 전 세계 유일의 국민주 신문이다. 87년 대선의 참혹한 패배 이후 참언론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안고 태어난 〈한겨레〉는 수만 명의 국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내 주주로 참여했고 그 덕분에 출범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한겨레〉가 주주들의 신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법상 주식회사의 최고의결기관은 주주총회이지만, 주식회사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기관이라 할 대표이사와 이사회를 구성할 실질적인 권한이 〈한겨레〉주주들에게 있다고 보기가 힘들다.

〈한겨레〉 정관을 보면 대표이사 후보를 〈한겨레〉주식이 있는 정규직 사원이 투표를 통해 선출하고, 선출된 대표이사 후보를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로 선임하도록 되어 있다. 〈한겨레〉의 압도적 최대주주가 우리사주조합이기 때문에 대표이사 후보로 선출된 사람이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로 선임되지 못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한겨레〉사원들이 선출한 대표이사 후보는 사외이사 일부와 감사를 제외하고 이사회를 구성할 사내외 이사 후보들을 대부분 추천하고, 그렇게 추천된 이사 후보들은 주주총회에서 별일 없이 이사로 선임된다. 쉽게 말해 〈한겨레〉를 출범시켰고 여전히 〈한겨레〉주식의 대부분을 소유한 일반 주주들은 〈한겨레〉대표이사 및 이사회 구성권한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겨레〉의 압도적 1대 주주인 우리사주조합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기왕에도 존재했던 우리사주조합이 〈한겨레〉의 압도적 1대 주주가 된 계기는 2002년 말 〈한겨레〉의 재무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추진된 퇴직급여충당금의 출자전환이었다. 즉 출자전환을 통해 〈한겨레〉임직원들의 퇴직급여충당금을 부채계정에서 자본계정으로 옮긴 것인데, 이를 통해 〈한겨레〉는 부채는 격감하고 자본금은 대폭 늘었다. 그 자체로는 평가받을 일일 텐데, 이면을 들여다보면 달리 생각할 대목이 많다. 퇴직급여충당금을 출자전환하면서 임직원 퇴직시 환매조건부를 붙였기 때문이다.

통상 퇴직급여충당금의 출자전환은 임직원들이 회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퇴직급여충당금이라는 채권을 회사가 발행한 주식과 바꾸는 것으로 끝난다. 한데 〈한겨레〉는 여기에 퇴직급여충당금을 출자전환해 주식으로 가지고 있는 임직원이 〈한겨레〉를 퇴사할 때 〈한겨레〉가 그 퇴직자가 소유한 출자전환분만큼의 주식을 현금으로 되사주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물론 이는 철저히 합법이다.

하지만 일반 주주 입장에서는 〈한겨레〉의 구성원들은 재직시에는 한겨레 1대 주주인 우리사주조합의 위세를 누리고, 퇴직할 때에는 노동자로 지위를 변경해 출자전환한 주식을 퇴직금으로 바꿔가며, 대표이사 후보를 선출할 때에는 자기들만 유권자 권한을 행사하는 특권을 누린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일반 주주들에 비해 우월적 지위를 여러 겹으로 누리는 〈한겨레〉구성원들이 〈한겨레〉의 주인 노릇을 똑바로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모두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는 격언이 〈한겨레〉라고 예외는 아닌 듯싶다.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기만 하는 우리사주조합 지분만 보더라도 말이다.

허약한 구심력, 막강한 원심력

모호하고, 혼란스러우며, 명실상부하지도 않은 〈한겨레〉의 지배구조는 대표이사 후보 선거제도와 맞물려 〈한겨레〉가 허약한 구심력과 막강한 원심력에 항상적으로 노출되게 만든다. 전술했듯 〈한겨레〉는 대표이사를 사실상 사내 구성원들의 투표로 선출한다.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두른 대표이사 후보 선거제도는 그러나 필연적으로 파벌의 성립, 선거 후의 반목과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이사가 재선을 도모하기라도 한다면 〈한겨레〉의 체질 개선과 미래를 위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 엄두(능력은 차치하고)를 내기 힘들다. 재선되기 위해선 사내 구성원 다수의 표를 획득해야 하는데, 고통이 수반되게 마련인 개혁을 좋아하는 유권자는 소수에 그치기 때문이다.

선거라는 제도가 도리어 대표이사 리더십의 허약함을 강요(?)하는 데 더해 〈한겨레〉 내에는 사내 권력을 분점하는 조직과 기구들이 너무 많다. 예컨대 편집국, 노동조합, 우리사주조합, 여성회 등등이 있다. 잘 작동하기만 하면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잘 구현할 수도 있는 〈한겨레〉내의 다양한 조직과 기구들은 그러나 견제와 균형을 넘어 가뜩이나 취약한 대표이사 리더십을 더 약화시키는 원심력으로 기능하곤 한다.

87년 체제의 자식이라는 지대(地代)

모두에서 말한 것처럼 〈한겨레〉는 87년 체제의 자식이다. 한국사회는 87년 체제의 자식인 〈한겨레〉에게 해마다 수백억 원의 매출을 선사한다. 〈한겨레〉가 해마다 올리는 매출이 〈한겨레〉의 생산성과 경쟁력에 터잡은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한겨레〉구성원들은 철저히 고민해봐야 한다.

대한민국 미디어산업 전체의 경쟁력이 다른 산업에 비해서 현저히 열세임은 긴말이 필요치 않은 사실이지만, 〈한겨레〉가 경쟁 매체들에 견주어 나은 생산성과 경쟁력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한겨레〉가 다른 산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경쟁 매체들과의 경쟁에서도 별반 내세울 게 없는 처지라고 한다면 〈한겨레〉가 매년 얻는 매출은 상당 부분 지대(地代) 성격이 짙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가 누리는 지대가 정당한지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더라도, 〈한겨레〉가 한국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지대가 언제까지 유지될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옳다. 만약 〈한겨레〉가 실력이나 노력 이상의 지대를 수취하고 있는 것이고, 그 지대가 시나브로 줄고 있다면 〈한겨레〉의 미래는 암담하다.

〈한겨레〉의 재도약을 바라며

내가 〈한겨레〉의 구조적 문제라고 지적한 지점들에 대한 관점과 평가는 상이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겨레〉가 지금껏 고수해왔던 거버넌스, 문화, 상벌체계 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번 부패 스캔들은 이를 방증하는 징후적 사건일지 모른다. 이번 기회에 〈한겨레〉가 〈한겨레〉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대면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올바른 진단과 처방이 내려질 것이고, 〈한겨레〉의 재도약도 가능할 것이다. 만약 〈한겨레〉가 이번 위기조차 미봉으로 모면하려 한다면 〈한겨레〉 앞에는 잔존(殘存)과 연명(延命)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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