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가 윤석열 내란의 전위대로 나선 내력

[극우 개신교 집단의 형성 과정을 더듬어본다-상]

언더우드·아펜젤러 입국으로 시작된 140년 역사

학교·병원 지어 서구 근대 문명 도입 창구 구실

한국 개신교 주요 특징은 분파·반공·성장주의

일제 신사참배 강요가 뿌린 장로교 1차 분열 씨앗

2025-03-22     이희용 줌렌즈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885년 4월 5일, 일본 나가사키를 떠나 제물포항에 들어온 범선에서 두 미국인 청년이 내렸다. 미국 북장로회가 파견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회 소속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였다. 나이는 언더우드가 26세, 아펜젤러가 27세였다. 이날은 부활절이었다.

이들은 차례로 서울에 들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교회를 지어 복음을 전파하고 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가르쳤다. 우리나라 최대 개신교 교파인 장로교와 두 번째 교단인 감리교는 각각 언더우드가 설립한 새문안교회와 아펜젤러의 정동제일교회를 모교회로 삼고 있다.

이들보다 먼저 들어온 선교사가 없었던 건 아니다. 1832년 충남 안면도 남단 고대도에 상륙했다가 20일 만에 떠난 카를 귀츨라프,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들어왔다가 성난 주민의 칼에 맞아 숨진 로버트 토머스, 1884년 6월 방한해 고종에게 선교 허가를 요청한 로버트 매클레이, 석 달 뒤 들어와 이듬해 광혜원(제중원으로 개칭)을 세운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 등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최초의 교회를 세운 이들의 입국을 개신교 선교 역사의 출발로 보고 있다.

한국교회총연합이 올해 부활절 전날인 4월 19일 서울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펼치는 부활절 퍼레이드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후손인 피터 언더우드와 실라·매슈 셰필드 등도 참여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4월 3일과 6일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에서 선교 140주년 기념예배와 기념대회가 각각 열린다.

 

한국 개신교 선교의 선구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왼쪽)와 헨리 아펜젤러

2023년 4월 9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부활절 퍼레이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타고 온 범선 모형을 앞세우고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광조동방(光照東邦)이라고 적힌 십자가는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 학생들이 1897년 성탄절에 세웠던 등(燈)을 재현한 것이다. (서울시 제공)

신분 타파와 남녀평등 외치고 독립운동에도 투신

140년 전 이들이 처음 뿌린 신앙의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한국의 종교 현황’에 따르면 전국의 개신교 교회는 8만 3883개를 헤아린다. 교인은 967만 5761명으로 전체 인구의 19.73%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개신교 신자 수는 전 세계 17위, 아시아에서 4위에 랭크돼 있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끼친 영향은 지금의 교회와 신자 숫자로만 따질 일이 아니다. 근대적 의료기관과 교육기관을 세워 과학기술을 비롯한 서양 근대 지식과 학문을 도입했으며, 신분 타파와 남녀평등이라는 근대적 인권 개념과 서구 민주주의 사상을 일깨웠다.

이들에게 영향받은 개신교 신자들은 당시로서는 합리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였고 억압과 차별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자였다. 개신교 신자 가운데 상당수가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1919년 3·1운동 때만 해도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개신교 소속이었고 나머지가 천도교(15명)와 불교(2명)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한 안창호·이승만·이동휘·김규식·손정도 등도 크리스천이었다.

1920년대 이후 미국 교회의 근본주의 영향을 받아 현실도피적인 분위기가 자리잡긴 했어도 우리나라 초창기 개신교 신자들은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을 뿐 아니라 신앙 이외의 생활에도 모범적이었다.

 

15일 서울 세종대로에서 대한민국바로세우기운동본부 주최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2025.3.15. 연합뉴스

극우 포퓰리즘 전위대로 나서며 비호감 자초

그러나 지금 한국 개신교의 모습은 어떤가. 영성(靈性)을 추구하기보다는 물신(物神)을 숭배하고, 존중과 포용이 아닌 차별과 혐오를 전파하며, 평화를 부르짖는 대신 폭력을 외치고 있다. ‘빨갱이 척결’과 ‘동성애 추방’에서 요즘은 ‘중공 OUT’이란 구호도 추가됐다.

개신교가 주도하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는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이 난무하고 비논리적 주장과 반지성적 행동이 넘쳐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후손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이를 지켜보면 어떤 느낌을 받을지 우려스럽다.

혼란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전광훈 목사는 “미친 운전사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으니 끌어내려야 한다”는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어록을 내세워 문재인 대통령 퇴진을 촉구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본회퍼의 길을 선택했다”면서 종북 좌파 척결을 주장하고 있다. 독일 나치 정권에 저항한 순교자를 따르겠다면서, 파시스트 행태를 보이는 윤석열 대통령을 옹호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 목사는 대통령 탄핵 심판과 관련해 국민 저항권을 거론하며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을 부추긴 데 이어 헌법재판소를 겁박하고 있다. 정작 민중이 독재 정권에 신음할 때 침묵했거나 권력 편에 섰던 보수 개신교단이 이제 와서 국민 저항권을 내세우는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로 떠받들면서 그를 권좌에서 쫓아낸 4·19혁명을 국민 저항권의 대표적 사례로 드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16일 서울 세종로사거리 인근에서 열린 광화문 주일예배에서 설교하고 있다. 2025.3.16. 연합뉴스

어느 때부터인가 개신교를 의미하는 기독교는 ‘개독교’란 멸칭으로 불리고 있다(기독교는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를 모두 아우르는 단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개신교를 지칭하므로 그리스도교란 용어로 대체해 쓰고 있다). 2024년 한국리서치의 종교 인식 조사에서도 개신교(35.6)는 호감도가 불교(51.3)와 천주교(48.6)에 훨씬 못 미쳤다.

그 원인은 여럿이지만 최근 윤 대통령 내란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이 개신교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개신교 안에서도 전 목사를 비롯한 일부 목사들이 극우 포퓰리즘의 전위대로 나서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 배경을 분석하려면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더듬어보고 이를 통해 형성된 고유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 개신교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분파주의, 신비주의, 반공주의, 물신주의, 성장주의, 개인 숭배, 세습주의 등을 꼽을 수 있다.

과열 경쟁 막으려고 전국을 선교단체별로 분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발을 디딘 이래 조선 복음화의 사명을 수행하겠다는 서양 선교사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너도나도 앞다퉈 조선에 진출하다 보니 특정 지역에 집중돼 과열 경쟁을 빚었다. 반면 공백으로 남은 지역도 생겨났다.

개신교 선교단체들은 선교지 분담 방안을 협의한 끝에 1893년 미국 북장로회는 평안도·황해도·경상북도, 남장로회는 전라도(당시에는 제주도 포함)와 충청도, 캐나다장로회는 함경도를 맡기로 하고 부산·경남은 미국 북장로회와 호주장로회가 공동 구역으로 삼았다.

1909년 감리회와도 추가 협정이 이뤄져 평북 영변 일대, 황해도 남부, 충청, 강원 남부는 미국 북감리회가 맡고 경기 북부와 강원 북부는 미국 남감리회가 담당하기로 했다. 부산·경남은 호주장로회와 미국 북장로회가 나눠 맡다가 1913년 호주가 전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서울은 분담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침례교·성결교·구세군·성공회 등은 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정에 따라 한반도의 선교 분담 지역을 나타낸 지도

선교지 분할 정책은 불필요한 마찰이나 인력·재정 낭비를 줄이고 복음화 효과를 높이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됐으나 지방색에 따른 교권 대립을 낳고 해방 후 교회 분열에도 영향을 미쳤다. 장로교는 교세가 가장 큰 데다가 선교사 파송 본부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고 선교지까지 분할하다 보니 분열도 가장 많았다. 다른 종파에 비해 목사보다 장로들의 권한이 강한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 개신교 분열의 역사는 장로교 분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후 출옥성도들은 고신파 만들어 분리 독립

장로회 교단 분열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일제였다. 1930년대 들어 일제가 천황을 신격화해 숭배하게 하는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자 개신교는 처음에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일제의 집요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감리교는 1936년, 장로교는 1938년에 각각 굴복했다. 일부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투옥됐고 순교자도 나왔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하고 있는 모습.

1945년 광복을 맞아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신도들이 석방됐다. 이른바 출옥성도(出獄聖徒)들은 신사참배를 수용한 목회자는 목회를 중단하고 참회와 자숙 기간을 두자고 제안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가 이를 거부하자 한상동·박윤선 등 출옥파들은 순수한 개혁주의 보수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이듬해 경남 진해에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다.

갈등은 갈수록 격화됐다. 상대방을 공산당이라고 서로 공격하다가 교단 주류는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을 거부하는 강수를 두었고 출옥파들은 결별을 선언했다. 1952년 9월 진주에서 총노회를 따로 개최한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고신파의 출발이다. 고려신학교는 1947년 부산으로 캠퍼스를 옮기고 1980년 고신대로 개명했다.

※ 2주 후에 후속편(중)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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