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파면 이후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로운 나라

김민웅의 정치철학을 논하다

2025-03-12     남기업 시민기자

<촛불행동> 김민웅 상임대표를 ‘개인적으로’ 안 지가 2년이 채 안 된다. 그전에는 책과 칼럼과 TV 토론 프로에서 김민웅 대표를 보아왔다. 흰머리가 참 잘 어울리는 교수, 목소리가 참 좋은 목사, 발언과 글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내공이 느껴지는 학자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극히 평범한 나와는 거리가 먼 존재로 느껴졌다.  

그를 만난 곳은 집회가 열리는 ‘광장’이었다. 나는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직후부터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촛불행동>의 지역조직인 <수원오산화성촛불행동>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김민웅 대표와의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수많은 그의 연설을 ‘광장’에서 들었고 자연스럽게 대화도 나누게 되었는데, 놀란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따뜻함과 섬세함이었다. 포효하는 연설에서, 엄청난 지식에서 느껴졌던 막연한 거리감은 이내 사라져버렸다.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 안국역 1번 출구 앞에서 열린 촛불행동 주최 윤석열 파면! 국힘당 해산! 125차 전국집중 촛불문화제에서 김민웅 촛불행동 상임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2025.2.1. 사진 이호 작가

김민웅 대표에게 늘 따라다니는 별칭은 전방위적 지식인이다. 그의 칼럼을 하나라도 읽으면 바로 알게 된다. 한 분야에만 몰두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이 읽는 ‘동화’에서부터, 국제정치, 문명사, 정치경제학, 제국주의, 군산복합체, 과학사와 생물학과 물리학, 소설과 시와 음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지식을 그냥 나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꿰고 있다는 점이다. ‘일이관지(一以貫之)’, ‘통섭(統攝)’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파편적 현상에 몰두하는 도구적 이성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문제의 본질로 육박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늘 물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며 종합해 내는 엄청난 지적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짧게 경험한 김민웅 대표는 토론과 대화를 상당히 즐긴다. 아니 그게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작년 가을에 『진실은 고독하지 않다』(2024, 한길사)라는 책을 출간했다. ‘김민웅의 생각’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진실’에로의 간절한 초청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생각하자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은 내가 평소에 던진 질문에 대한 응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토지공개념과 주거권 실현이 내가 집중하는 분야지만, 한편에서 나는 불평등과 생태환경 파괴를 수반하는 자본주의, 분단을 고착화하고 전쟁을 선동하는 군사주의, 보수 우파를 참칭하는 친일매국 기득권, 불의한 기득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해주는 타락한 기독교(종교), 이 전체를 어떻게 혁명적 수준으로 개혁해나갈 수 있을까를 늘 물어왔다. 그래서일까. 읽는 내내 저자 김민웅 대표의 뜨겁고 절절한 마음이 전해져왔다. 이 책을 주로 출퇴근 전철에서 읽었는데, 마치 전철 옆자리에 앉아 저자인 김민웅 대표가 자기의 문제의식과 생각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느낌이 들곤 했었다.

 

'진실은 고독하지 않다' 표지

믿음의 사람 김민웅 ‘목사’

책을 읽으면서 뜻밖에도 성서 전체에서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인 모세가 떠올랐다. 이집트의 노예로 비참하게 살았던 히브리인들―실제로 히브리인만이 아니라 모세의 비전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을 이끌고 나와 자유와 해방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모세 말이다. 아무도 김민웅에게 새로운 사회 형성을 위해 고투하는 이 일을 떠맡으라고 하지 않았듯이 아무도 모세에게 그 위대한 사명을 부여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자기 내면에서 울리는 양심의 명령에, 시대의 부름에 응답한 것이다. 모세는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나라―성서는 이것을 ‘거룩한 나라’라고 부른다.―의 질서를 십계명, 특히 그 핵심을 십계명 전문(출애굽기 20장 2절)에 간명하게 담았고 김민웅은 이 책 끝부분에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사회의 헌법전문(388~392쪽)을 발제한다.

그렇다. 김민웅은 믿음의 사람이다. 놀랍게도 그는 윤석열 탄핵이 될 것을 굳게 믿었다(8쪽). 참된 믿음은 행동으로 나오기 마련인 까닭에 작년 여름에 탄핵 청원에 143만 명의 참여자를 모은 것이고 9월 말엔 국회에서 국회의원이 참석한 ‘탄핵의 밤’ 행사가 열린 것이다. 광장에서 행한 그의 연설엔 늘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촛불행동> 수련회에서 그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부흥사가 떠오를 정도였다. 나에게 김민웅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성서가 말하는 믿음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다. 윤석열 계엄 체포대상 중 시민사회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사람이 바로 김민웅이고, <촛불행동>은 이미 검찰에 부당한 압수수색을 여러 차례 당해야 했다. 윤석열이 2년 반 넘게 매주 열린 <촛불행동>의 경고·퇴진·타도·탄핵을 외치는 촛불집회에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는 계엄 이후 행한 그의 담화문에도 잘 드러난다. 믿음이 현실이 된 작년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된 그 순간 어린아이처럼 펑펑 우는 김민웅을 근처에서 지켜보았는데, 그건 아마도 믿음이 현실이 된 것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으리라.

 

촛불집회 현장에서 만난 김민웅 촛불행동 상임대표(왼쪽)와 도올 김용옥.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아니라 ‘갈리아의 수탉’으로

책을 읽어보고 그가 SNS에 수시로 올린 글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김민웅은 여느 지식인과 다르게 계속 전개되는 긴박한 사태에 대한 용기 있고 단호하고 선명한 진단과 대응 방향과 방안을 끊임없이 제시한다는 것을. 지식인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로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네르바와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인 부엉이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숲속을 날아 자신의 시간을 시작하는 성찰하는 존재”, 다시 말해서 “온갖 복잡한 현실의 쟁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던 것들이 그 치열한 접전이 종료된 이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치”(209쪽)는 존재다. 물론 사태가 종료되고 나서 성찰하는 것 자체는 의미있고 꼭 필요한 일이다.

반면에 김민웅은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아니라 어둠을 뚫고 새로운 시대를 일깨워주는 새벽의 전령사인 ‘갈리아의 수탉’이다. 수탉이 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지식을 총동원한다. 그렇다. 그의 모든 지식은 ‘오늘’을 위해 존재한다. 아니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는 방대한 독서와 사색을 한 듯하다. ‘수탉’인 까닭에 2019년 9월 ‘조국 사태’가 터졌을 때 가장 먼저 사태의 성격을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윤미향 의원과 추미애 의원이 수난당할 때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했으며, 온갖 비판과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박원순 시장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아래의 그의 윤석열에 대한 평가를 보면 어째서 그가 ‘갈리아의 수탉’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지를 알게 된다.

기가 질릴 정도로 보잘것없고 무지하며 난폭한 자가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매일 나라를 도처에서 망가뜨리고 있다. 이자를 옹위하면서 제 욕심들을 차리느라 국민들을 마구 짓밟고 하염없이 능멸하는 온갖 세력의 만행 또한 매일 저질러지고 있다. 파시즘에 굴복한 입법·사법·행정의 주류세력들 역시 이자와 그 세력에 협력하면서 나라를 피멍이 들게 만들고 있다.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 유족들에 대한 윤석열 정권과 여당 국민의힘의 패륜 테러는 물론이고 민노총까지 공안정국의 사냥물로 겨냥해 쑥대밭처럼 들쑤셨다. 게다가 헌재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주무장관 탄핵을 기각했다. 이로써 국가의 책임은 사라졌다. 언론방송을 장악하는 권력의 비열한 욕망은 국민들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다. 한·미·일 핵전쟁 동맹 결성에 이르면 주권 침탈과 평화파괴라는 끔찍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408쪽).

책 서두에서 그는 말한다. “관건은 ‘인식과 실천’”(6쪽)이라고. 여기서 ‘실천’은 새벽의 전령사인 갈리아의 수탉의 역할을 말한다. 돌아보면 김민웅과 함께 지난 2년 반 동안 매주 토요일, 방송과 언론이 한 줄의 보도도 내보내지 않아도 줄기차게 모였던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거대한 갈리아의 수탉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윤석열 탄핵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새로운 사회, 즉 ‘촛불체제’를 형성하자고 독자들을 설득하고 제안한다. 물론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려면 지금의 체제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는 이것을 목표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심지어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현실이라는 휘장을 찢어버리고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파헤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래야 제대로 된 ‘실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촛불행동 1주년 축하행사에 참석한 조성우 전 민화협 의장(가운데) [김민웅 촛불행동 상임대표 페북 캡처] 2025. 01. 18 

우리가 마주한 현실에 대한 폭로

제일 먼저 김민웅은 지금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삼권분립’이 사실은 특권 과두제임을, ‘삼권동맹’임을 폭로한다. 세 개의 권력이 각자의 영역에서 요새화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행정부는 폐쇄적인 관료체제의 진지가 되어버렸고 민의의 전당이라고 하는 국회는 직접민주주의를 차단하는 대의제의 철갑 속으로 숨어들었으며 선출된 권력이 아닌 사법부는 대를 물려 영구집권이 가능한 요새 중의 요새가 되었다는 것이다(275쪽). 다르게 말하면 주권자의 위상이 초라한 까닭이 바로 이 삼권동맹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김민웅은 ‘정치적 중립’을 주문처럼 되뇌는 이 땅의 ‘교육’ 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본질에서 보자면 교육이 말하는 정치적 중립은 무엇을 배제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판단 과정에서 공정성을 확보하는 걸 의미하는 건데, 우리 교육 현장에서 중립은 ‘배제’로 적용된다. 교육 현장에서 이렇게 ‘중립’의 이름으로 배제의 원리가 작동하면,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불평등과 기후 위기와 같은 구조적 모순에 대한 심도 있는 논쟁은 불가능하다. 이런 까닭에 이 땅의 교육이 암기 교육을 넘어서 비판의식을 기르겠다고 하지만, 그 비판이 정치적 본질과 직결되면 바로 억압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정치를 비켜나간 비판이라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치적 중립’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우리의 교육은 사유하는 존재를 소멸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고, 최종적으론 자본과 권력의 무기고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김민웅은 일갈한다(108쪽, 402쪽).

세 번째로 김민웅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 책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참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출발부터 폭력성을 수반했지만, 1980년대 이후에 전개된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더 심각하다. 지금 선진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도 파시즘 전조 현상을 보이는 까닭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낳은 사태다. ‘자본’에게는 무한 자유를, ‘노동’에게는 억압을, ‘토지와 자연 자원’에 대해서는 재산권의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특징인데, 이것이 지금 민주주의 퇴행의 뿌리라는 것이다. 왜냐면 노동과 자연을 더 값싸게 착취하기 때문이다. 착취와 민주주의는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후 위기 문제를 다루는데, 그는 그 원인을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찾는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생태환경 파괴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 성장 혹은 자본축적은 자연의 유린과 노동의 약탈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기후 위기를 발생시키고 있고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149쪽).

여기에 더해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중요한 또 다른 구조적 모순이 있는데, 그것은 내재화된 식민지 체제의 폭력성과 미국 군사력의 지배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자체의 폭력성, 식민지 체제의 폭력성, 미국 군사력에 의한 폭력성이 한꺼번에,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16일 오후 서울 숭례문~시청 구간에서 열린 81차 '김건희 특검! 윤석열 퇴진!' 촛불대행진에서 촛불행동 김민웅 상임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등이 앞장서 걷고 있다.2024.3.16. 사진작가 이호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 수 있나?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 참된 민주주의를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김민웅은 먼저 ‘실천’을 강조한다. 왜냐면 인간과 자연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 체제, 복종을 강요하는 이 체제는 그냥 둬도 스스로 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태를 관망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그건 결과론적인 분석이라고, 역사는 감나무가 아니라며 설득한다. 오히려 악은 윤석열이 보여준 것처럼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 끝까지 무고한 이들을 짓밟고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서라면 전쟁까지 도발할 정도로 죽기 살기로 무엇이든 한다는 것이다(208쪽).

그런데 ‘실천’은 희망과 연대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니 여기에서도 믿음이 중요하다고 김민웅은 말한다. 왜냐면 “기득권이 가장 바라는 것은 연대의 능력과 희망을 잃어버린 인간들”(269쪽), 즉 사람들이 믿음을 상실한 채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는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기존 질서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설득하고 또 강조한다(301쪽). 이를 위해 그는 진화생물학과 물리학의 최신 학문적 흐름까지 동원한다. 우리의 의식이 생명체뿐만 일반물질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 진화가 경쟁의 원리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협력적 공생의 방식으로 전개된 것이고 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도 우리의 주관적 의지에 영향을 받는데(173~176쪽), 하물며 우리가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면 새로운 사회는 충분히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노동과 자연을 착취하는 경제체제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권력과 맞서는 지식과 용기, 그리고 실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데, 이 부분에서 나는 김민웅의 소망이 얼마나 강렬한지 느낄 수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한 김민웅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역사의 주도권이란, 기득권 질서가 정당화하는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자신의 삶에서 조금이라도 실천하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가진 엄청난 자원과 권한을 그 자원과 권한의 진짜 주인인 주권자의 권리로 만들어야 함을 뜻한다. 법과 제도의 차원까지 밀고 가야 한다. 그런 미래를 기획하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내일’이 창조된다. 우리 자신이 국가와 자본에 대한 명령의 진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혁명은 이렇게 시작된다(139쪽).

그렇다면 김민웅이 그리고 있는 새로운 나라는 무엇인가? 그것은 온전한 민주주의가 실현된 나라다. 게티스버그에서 링컨이 행한 저 유명한 연설에 나오는 “인민의(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치”가 온전히 구현된 나라다. 그런데 왜 김민웅은 ‘people’을 한국 사회에서 오해하기 딱 좋은 ‘인민’으로 쓰려는 걸까? ‘국민’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민중’도 아니고 왜 ‘인민’일까? 그 이유는 아래 문단에 나온다.

봉건의 질서를 타파한 국민국가의 주체이나 국가에 포섭되어야 할 자격이 생기는 ‘국민’, 부르주아 근대혁명의 주체이지만 그 지향성이 그에 제한되고 민족 단위의 고민이 배제된 ‘시민’, 억압받아온 현실에 저항한 역사를 지니는 동시에 특정한 계층에 국한될 수 있는 ‘민중’, 이들 모두의 한계를 극복하고 역사적 투쟁 과정을 통해 이루어온 각기의 진보적 역사성을 통합적으로 포괄하는 동시에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최우선에 놓는 존재’라는 인류적 차원의 존엄한 집단성이 ‘인민’에 담겨 있다(409쪽).

나는 여기서 지식인 김민웅이 가진 학자적 엄밀성뿐만 아니라 용감함과 웅장함을 발견한다. 그가 꿈꾸는 세상이 단지 한국 사회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 차원임을 생각하게 된다. 역시 그는 ‘목사(pastor)’다. 성서의 대(大)주제인 하나님 나라는 일국적 차원이 아니라 세계 전체 차원에, 아니 자연 전체에도 임해야 하는 나라이니 말이다.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에게 예수는 당부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물(all creation)에게 복음을 전하라”(마가복음 16장 15절) 라고. 여기서 자유와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할 대상이 ‘만민’이 아니라 사람을 포함한 ‘만물’임에 주목해야 한다. 책에서 김민웅은 사람과 자연의 협력적 존재 양식을 발명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고 했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만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성서 구절이 떠올랐다. 김민웅의 궁극적 목표가 이런 까닭에 그런 사명을 지닌 존재를 “인류적 차원의 존엄한 집단성”의 의미가 담긴 ‘인민’을 사용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또 한편으론 해방 직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던 용어인 ‘인민’의 역사성 복원과 분단체제 극복의 의지도 읽혔다.

물론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는 기후 위기와 불평등과 군산복합체와 같은 군사주의도 반드시 극복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삼권분립에 따른 입법·사법·행정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 기능이 인민주권의 목표를 위해 강력하게 통합되도록 해야 한다(404쪽).

 

촛불행동 김민웅 상임대표가 20일 오후 3시 서울 시청역과 숭례문 사이 대로에서 '윤석열 퇴진! 김건희 특검! 86차 촛불대행진(4월 전국집중촛불)'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2024.4.20. 이호 작가

어서 이 책을 읽자!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사회를 열어젖혀야 하는 존재, 즉 인류적 차원에서 존엄한 존재, 배우고 받들고 믿을 수 있는 존재인 ‘인민’은(410쪽) 어떻게 탄생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김민웅은 책에서 “공포에 짓눌리지 않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만이 지옥을 이긴다.”(125쪽)고 썼는데, 그런 깊은 사랑을 마음에 품은 사람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을까에 관한 이야기는 부족하다.

김민웅은 “우리의 현대사에 등장한 시민 항쟁사에 유례없는 장기적 집결과 조직화”의 결정체인 <촛불행동>이 “역사적 실천 공동체, 학습공동체 그리고 환대 공동체”(361쪽)로 성장·발전하고 있다는 것에서 가능성을 찾은 듯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부족하지 않을까? 나는 여기서 참된 종교의 역할을 생각하고 기대하고 모색한다. 인간이 존엄한 존재임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종교, 역사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할 수 있는 마음의 힘과 능력을 공급할 수 있는 종교 말이다.

이 책에서 아쉽게 느끼는 또 하나는 참된 민주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 제시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내용 안에 대안의 맹아가 보이긴 하나, ‘대항 담론’ 수준에 머문 느낌이 강하다. 또 여기서 상론할 건 아니지만 ‘시장’ 자체에 대한 강한 불신도 동의하기 어려운데,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한, 다시 말해서 노동뿐만 아니라 토지를 포함한 자연 전체를 착취하지 않는 시장경제체제를 모색해야 하고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나와 차이가 있어 보였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촛불체제’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비판을 넘어서 경제체제에 대한 명확한 대안 제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김민웅은 왜 책 제목을 『진실은 고독하지 않다』라고 했을까? 그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참된 민주주의가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 진실과 함께하자고 독자들에게 제안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보편 양심이 이것을 지지하고 있다고. 해서 나는 이 책을 진지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는 독자라면 김민웅의 이 제안에 기꺼이 응답할 거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파면 이후 우린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 하나?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창출해 내는 동력은 어디에서 나오고 어떻게 만들 수 있나? 바로 이 책에 답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어서 이 책을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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