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으로 멕시코만 이름 빼앗으려는 ‘황제’ 트럼프
취임 직후 행정명령으로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바꿔
역사적인 근거 없고 국제 관행과 절차도 무시한 폭거
국제 관행 따르겠다는 AP 기자에게 백악관 출입 금지
동해, 페르시아만 등 지명 다툼 벌이는 지역 수두룩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0일 취임식에서 “멕시코만(Gulf of Mexico)은 미국만(Gulf of America)이 될 것이며 이 계획은 조금 후 시행될 것”이라고 밝힌 뒤 ‘미국의 위대함을 기리는 이름 복원(Restoring Names That Honor American Greatness)’이라는 명칭의 행정명령 14172호에 서명했다.
이어 2월 9일을 ‘미국만의 날’로 지정하며 “과거 멕시코만으로 알려졌던 지역은 미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이는 미국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일부로 남아 있다. 우리 행정부는 미국의 자부심을 회복하는 과정에 있다. 미국만이라는 명칭은 미국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적절한 이름이다”라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좌충우돌식 행보는 늘 예상을 뛰어넘고 있지만 국제 해역의 명칭을 일방적으로 바꾸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더욱 놀라운 일은 미국을 대표하는 뉴스통신사 AP(Associated Press)가 멕시코만이란 이름을 그대로 쓰겠다고 하자 소속 기자의 백악관 출입을 막고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 탑승을 금지한 것이다.
AP “전 세계 독자가 쉽게 알 수 있어야”
동해 명칭을 두고 일본과 오랫동안 분쟁을 벌이고 있는 데다 윤석열 대통령의 ‘바이든(날리면)’ 발언을 먼저 보도했다는 이유로 MBC 출입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불허해 언론자유 침해 파동을 겪은 우리로서는 트럼프의 행위를 무심히 보아 넘기기 어렵다.
AP는 “멕시코만은 미국과 멕시코의 공동 해역이며 이미 400년 넘게 공식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미국 내에서만 효력을 지니므로 멕시코를 비롯한 다른 나라와 국제기구가 트럼프의 개명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새 명칭을 쓸 이유가 없다. 언어와 지명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전 세계에 뉴스를 배포하는 뉴스통신사로서 독자들이 쉽게 지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트럼프는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바꾸면서 알래스카에 있는 북미 최고봉 디날리산(Mount Denali)도 매킨리산(Mount McKinley)으로 다시 바꿨다. 이 역시 식민주의 지명이나 용어를 원주민이 쓰던 말로 바꾸자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만행이지만 AP는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매킨리산은 미국 영토여서 대통령이 지명을 변경할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발 6190m의 매킨리산은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산악인 고상돈이 1979년 하산 도중 추락사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름이다. 미국의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명명 당시에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이름을 딴 것이다. 2015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알래스카 원주민의 전통과 가치를 존중한다는 취지로 그들이 부르던 명칭으로 바꾼 것을 원위치 시킨 것이다.
나라 안의 지명을 바꾸는 것도 간단한 사안은 아니다. 지도, 백과사전, 교과서, 인터넷 홈페이지, 표지판, 통행권, 열차표, 입장권 등을 몽땅 바꿔야 할 뿐 아니라 바뀐 지명이 익숙해질 때까지 혼란을 피할 수 없다.
10년 전 미국 앨라배마주의 항구도시 모빌에 문을 연 멕시코만 국립해양박물관(National Maritime Museum of The Gulf of Mexico)의 캐런 포스 관장은 “이름을 바꾸는 데만 10만 달러(약 1억 4430만 원)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한다“면서 당혹감을 내비쳤다.
여러 나라가 공유하는 해역, 산맥, 국제하천 등의 이름은 특정 국가가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특히 국가 간 통행을 자주 해야 하는 선박들은 해역 명칭이 나라마다 다르고 수시로 바뀐다면 대형 사고의 위험마저 따른다.
「국제수로기구」 따위 무시해 버리는 ‘세계의 황제’ 트럼프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18개국 해양 당국 대표들은 1919년 6월 영국 런던에 모여 해양 지명의 국제적 표준화와 항해 안전 국제규범을 마련하기 위한 「국제수로국(IHB)」 창설을 결의했다. 1921년 모나코에 본부를 둔 IHB가 창설됐고 우리나라는 1957년 가입했다. 지금의 「국제수로기구(IHO)」는 1967년 제9차 국제수로회의에서 협약이 채택된 뒤 1970년 탄생했다.
IHO는 5년마다 회의를 개최해 표준지도인 ‘해양의 명칭 및 경계’를 작성하고 지도책 ‘해양과 바다의 경계’도 발간한다. 1929년판 이 지도책에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된 이래 국제적으로 통용돼왔다. 1962년 제8차 회의 때부터 대표단을 파견한 우리나라는 고지도 등을 근거로 줄곧 일본해 표기 변경을 요구해왔다. 2002년부터는 실현 가능성을 감안해 동해와 일본해 병기를 주장하고 있으나 일본의 완강한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다.
유엔도 경제사회이사회 산하 유엔통계위원회가 5년마다 지명표준화회의를 열어 지명의 국제표준을 정한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런 기구나 절차 따위는 모두 무시하고 ‘짐이 곧 국가다’를 넘어서서 ‘내가 곧 세계의 황제’라는 착각에 빠져 나라 안팎의 반발과 갈등을 부르는 무리수를 두고 있다.
미국이 탄생하기도 전에 존재했던 멕시코만
멕시코만은 미국, 멕시코, 쿠바에 둘러싸여 있는 해역이다. 미국과 쿠바 사이의 플로리다해협을 통해 대서양으로 연결되고, 멕시코와 쿠바 사이의 유카탄 해협을 지나면 카리브해가 나온다. 멕시코와 미국에 접한 해안선 길이는 각각 2805km와 2700km로 비슷하다. 영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해역의 면적은 멕시코 49%, 미국 46%, 쿠바 7%가량이다.
멕시코라는 이름은 아즈텍제국 중앙고원 지역의 부족 이름에서 유래했다. 16세기 이곳을 탐험했던 유럽인들은 이곳 해역을 ‘북쪽 바다’ ‘플로리다만’ ‘코르테스만’ ‘성미카엘만’ ‘유카탄해’ ‘뉴스페인만’ 등으로 부르다가 17세기 중반 이후 멕시코만으로 굳어졌다. 이 표기는 1550년 세계지도에 맨 먼저 등장했고 문헌상으로는 1552년에 처음 기록이 나온다. IHO와 유엔도 멕시코만 표기를 인정하고 있다.
트럼프는 “아메리카만에 접한 미국 영토가 더 넓은데 왜 멕시코만이라고 해야 하나”라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에 어긋날 뿐 아니라 명칭이 자리 잡을 때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 턱없는 주장이다.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는 미국 텍사스주는 1824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 멕시코 영토였다. 1836년 텍사스공화국으로 분리됐다가 1845년 미국이 병합했다. 멕시코가 반발해 2년 간 미국과 전쟁을 벌인 뒤 과달루페 이달고 협정으로 리오그란데강(멕시코식 명칭은 리오브라보)을 국경선으로 확정지었다.
텍사스 동쪽 루이지애나주와 플로리다주도 미국이 1803년과 1810년 프랑스와 스페인으로부터 각각 사들인 땅이다. 멕시코만이 보편화할 당시 미국은 존재하지도 않은 나라였으며, 그나마 지금의 미국 영토도 한참 뒤에 형성된 것이니 미국만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는 셈이다.
잽싸게 트럼프에 추파 던지는 구글과 애플
멕시코만의 명칭 변경은 인접국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플로리다해협을 빠져나온 멕시코만류(Gulf Stream)는 미국과 캐나다 동쪽 해안을 따라 흐르다가 아일랜드, 영국, 아이슬란드, 독일,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으로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로 흐른다. 이제 그 해류도 미국만류라고 바꿔 불러야 할 판이다.
필리핀 동쪽에서 북상해 대만과 일본을 거쳐 북태평양으로 흐르는 구로시오(黑潮)해류가 일본식 발음을 딴 것이라고 해서 우리가 우리 식으로 ‘흑조해류’라고 읽지는 않는다. 일본식 명칭이 국제 표준이고 약속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이 정치·군사·경제·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를 통틀어 초강대국이고,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 관행과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는 이단아라는 점이다. 구글과 애플은 행정명령이 발표된 지 3주 만에 미국에서는 아메리카만, 멕시코에서는 멕시코만으로 단독 표기하고 나머지 나라에서는 두 표기를 병기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은 구글에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지만 미국 영향력 아래 놓인 디지털 제국들이 방침을 바꿀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트럼프는 자국의 힘만 믿고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에게도 멕시코만 표기를 미국만으로 바꾸도록 압력을 넣을 가능성이 있다.
국력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지역 명칭-페르시아만의 경우
지구상에는 동해(일본해)처럼 지명을 두고 분쟁을 벌이는 지역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이란과 아라비아반도 사이에 있는 해역이다. 1960년대까지는 고대제국 이름을 딴 페르시아만이라는 표기가 일반적이었으나 아랍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란을 제외하고 사우디아라비아·오만·아랍에미리트·카타르·바레인·쿠웨이트·이라크 등 페르시아만 연안 아랍 국가들이 아라비아만이란 명칭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라크를 제외한 이들 6개국은 현재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이기도 하다.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주도하는 아랍 국가들의 목소리가 커진 반면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이 무너지며 이란의 국제적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페르시아만 단독 표기가 줄어들고 아라비아만 명칭을 병기하거나 고유명사가 아닌 영어 일반명사 걸프(The Gulf)로 부르기 시작했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우리나라 언론들은 페르시아만 전쟁이라고 지칭했다가 아랍 국가들의 항의를 받고 걸프전으로 바꿨다. 페르시아만 표기도 ‘역전앞’ 식으로 걸프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은 만안(灣岸)전쟁이라고 불렀다. IHO와 유엔은 지금까지 페르시아만 표기만 인정하고 있다.
이란과 아랍 국가들은 같은 이슬람권이면서도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어 있는데다 정치·외교적으로도 대립하고 있어 해역 명칭에 관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다투고 있다. 페르시아만이나 아라비아만을 명칭에 썼다는 이유로 축구대회 참가를 거부하는가 하면 자국에 주재하는 해당국 대사를 불러 항의하기도 한다. 이란 국민들은 2012년 5월 이후 페르시아만 수역 명칭을 삭제한 구글을 상대로 “페르시아만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는 트위터 캠페인을 펼쳤다.
그리스-마케도니아 등 지명 놓고 분쟁 벌이는 곳 수두룩
그나마 아라비아만 표기는 비록 소수에 불과하긴 하지만 19세기 이전 지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트럼프는 역사적 근거도 없는 미국만 표기를 밀어붙이며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발칸반도의 북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란 이름으로 1991년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분리 독립했다. 그러나 그리스는 자국에 마케도니아주(州)라는 지명이 있는데다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중심지였던 그리스 북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마케도니아의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막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양국 정상 간 협상을 거쳐 2018년 프레스파 협정을 맺고 북마케도니아라는 국명으로 바꿨으나 지난해 5월 취임한 고르다나 실리아노브스키-다브코바 신임 대통령이 마케도니아 국명을 사용해 한때 그리스와의 갈등이 재연되기도 했다.
이처럼 자국의 이름을 바꾸는 데도 이웃 나라의 동의가 없으면 쉽지 않은 판국이다. 위에 든 사례 말고도 세계 곳곳에는 지명을 놓고 나라 간 분쟁을 벌이거나 원주민과 갈등을 빚는 곳이 수두룩하다. 자국민의 인기를 얻기 위해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행보를 다른 나라 지도자들이 따라할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