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반장의 '계몽' 구하기
'뇌 썩음과 개소리'의 방파제 만드는 '소박한 개헌론'
올해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반장이 됐다. 주민 분들이 반장 역할을 해주길 요청해 와 감사하게 수용했다. 집 짓고 밭 만들며 마을에 들어와 산 지 6년이 지나 생긴 일이다. 그동안 마을 어르신들 살아오신 이야기를 담은 책과 보존해 온 토종씨앗 조사와 그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내고, 크고 작은 축제를 기획해 추진하기도 하며 생긴 신뢰가 있었기에 반장 역할을 제안해 주셨으리라. 이제 정말 마을 주민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다. 나의 촌 생활을 아는 지인 중에는 나의 활동을 농촌계몽 활동으로 표현해 주며 격려와 칭찬을 해주는 분들이 계신다. 그렇게 내 마음의 훈장처럼 여겨지는 ‘계몽’이라는 단어가 최근 내란수괴 피고인의 변호를 위해 사용되니, 마치 내 인생에 먹칠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 나아가 내가 존경하는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이 대부분 애국계몽운동가들이셨기에 내 영혼에 무슨 똥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 언어도단의 상황에 부닥친 나는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한 전혀 다른 ‘계몽’이 필요했다.
‘개소리’의 철학적 분석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
『On Bullshit. 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래크퍼트 지음, 이윤 번역, 필로소픽 출간, 2023.8.16.) 개소리에 봉변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 마침 지인이 소개해 준 책이다. 책 제목이 직관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개소리가 하도 난무하니 이런 책도 나온 모양이다.
그런데 가볍게 읽는 수필류의 책이 아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분석철학 교수가 쓰고, 서울대 철학과 출신 번역자가 번역하고 같은 과 교수가 해제를 한, 철학 서적이다.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든다”는 말, “개그를 다큐로 받는다”는 시쳇말이 떠오르지만, 요즘 세상은 진짜 개소리 때문에 죽을 판이니 정색을 하고 분석해 보는 것도 필요했으리라. 그런데 개소리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 길게 쓸 내용은 없었는지 책은 작고 얇다. 인상적인 몇 문장을 옮겨본다.
“개소리를 해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다면 절대 거짓말은 하지 마라.”
“거짓말은 종종 모욕감이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반면, 개소리에 대해서는 불쾌하거나 거슬린다는 표시로 어깨를 으쓱하면서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거짓말이란 것을 지어내기 위해서 거짓말쟁이는 무엇이 진실인지 자신이 알고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효과적인 거짓말을 지어내려면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허위를 그 진실의 위장 가면 아래에 설계해야 한다… (개소리쟁이는) 좀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되어있다… 그는 맥락까지도 위조할 준비가 되어있다… 개소리쟁이의 작업이 의존하고 있는 창조성의 양상은 거짓말에 동원되는 것보다는 덜 분석적이고 덜 정교하다. 개소리쟁이의 작업은 보다 광범위하고 독립적이며 임기웅변과 꾸며냄, 그리고 창의적인 연기의 여지가 많다. 이것은 공들인 노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예술의 문제다. 따라서 ‘개소리 예술가 bullshit artist’라는 친숙한 개념이 나온다… 개소리쟁이는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나를 계몽시킨 또 다른 단어 ‘뇌썩음(Brain rot)’
이런 글들을 읽고 보니 윤석열과 그 변호인들은 헌법재판소에서 한판 ‘개소리 예술쇼’를 하려 했다는 생각이 든다. 실시간으로 온 국민이 지켜본 상황을 거짓말로 가릴 수는 없으니, 그들은 ‘개소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개소리’에는 사람들이 마치 똥이 더러워서 피하듯 정색하고 반박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허점을 노렸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국민이 알고 있는 진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진실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거짓의 성을 정교하게 쌓는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개무시했다. 윤석열이 변론 전략회의를 하며 이런 얘기를 했을 것 같다. “야, 거짓말 할 생각 하지 마. 우리의 전술은 개소리야. 그래서 진실이 뭐가 뭔지 모르게 만드는 거, 그게 우리의 전략이야. 알았지? 자 빠르게 고~ ”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 개소리. 윤석열 탄핵 반대 여론이 높아지는 것을 보면 그 개소리 전략이 통했다는 생각이 든다. 개소리가 개소리를 낳고 개소리가 전국을 휩쓸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또 다른 단어에 ‘계몽’됐다. 바로 2024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는 ‘뇌 썩음(Brain rot)’이라는 단어다. 그 뜻은 “사소하거나 너무 쉬운 것으로 간주되는 온라인 콘텐츠 등의 과도한 소비로 인해, 사람의 정신적 또는 지적 상태가 악화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태”다.
그렇다. 윤석열 내란범죄 피고인과 그 변호인들은 ‘뇌 썩음' 상태였다. 윤석열이 “레거시 미디’어는 너무 편향돼 있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잘 정리된 정보를 보라”고 했다고 하지 않는가! 옥스퍼드 출판부는 2023년과 2024년 사이 ‘뇌 썩음’이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가 230% 증가‘했다며, 이 단어가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에서 발견되는 낮은 품질, 낮은 가치의 콘텐츠와 이러한 유형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에 미치는 것으로 인식되는 부정적인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데 모두 사용”된다고 밝혔다.
뇌 썩은 자의 개소리에 제대로 ‘계몽’돼 있지 않은 사회
미국의 정신 건강 센터인 뉴포트 연구소(Newport Institute)는 뇌가 썩은 자들의 특징 행동으로 ‘둠 스크롤링(doom scrolling)’을 지적한다. ‘둠 스크롤링(doom scrolling)’은 ‘파멸(doom)’과 ‘스크롤링(scrolling)’이 합쳐진 신조어로 온라인에서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콘텐츠를 소비하며 무의식적으로 스크롤을 멈추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윤석열과 그 추종세력이 부정선거론, 중국의 한국 점령론, 반국가세력 간첩론 등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둠 스크롤링’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연구소는 이렇게 뇌가 썩으면 정보를 정리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의사 결정을 내리고, 정보를 기억해 내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 경고가 틀림없음은 윤석열 대통령의 기상천외하고 초현실적인 12.3 비상계엄 선포로 증명이 됐다. 뇌가 썩은 자가 국가 최고지도자였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등골이 오싹해진다.
뇌 썩은 자의 개소리는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가는 주요 원인이라고 본다. 뇌가 썩은 자의 개소리가 판치는 세상을 어떻게 예방하고 바로 잡아야 할지 아직 우리 사회는 제대로 ‘계몽’돼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다. 이 숙제를 푸는 방안의 하나로 나는 <국민주도상생개헌행동(이하 <개헌행동>)>에 ‘계몽’되고 있다. 지난 2월 24일 창립된 <개헌행동>은 1972년 유신독재 개헌을 하면서 사라진 ‘국민발안권’을 헌법에 다시 살려 넣는 원포인트 개헌을 해서, 이번에 치러질 것으로 예상되는 대선 때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이른바 ‘국민발안 원포인트 개헌’이다.
읍·면·동 마을공동체가 '뇌 썩음과 개소리'의 방파제 되는 개헌
<개헌행동>은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입법 할 수 있다는 조항을 헌법에 넣어놓고(1단계), 이후 읍·면·동 마을에서부터 숙의와 토론을 거쳐 개헌절차법을 만들고(2단계) 개헌절차법에 따라 개헌안을 만들어서 2026년 지방선거나 2028년 총선 때 다시 국민투표로 개헌(3단계)을 하자는 단계별 개헌론을 제안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각종 사회적 의제에 대해서 각 마을에서 숙의 토론하는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전국에서 참여한 마을활동가들과 함께 공동대표단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숙의하고 토론하는 전국 읍·면·동의 마을공동체는 '뇌 썩음과 개소리'의 발아를 막는 첨병이자, 그 전염을 막는 방파제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 ‘계몽’되고 나니, 김계리 변호사의 “저는 계몽됐습니다”라는 변론은 “저는 뇌가 썩어서 개소리를 하고 있습니다”와 같은 말로 독해가 되고, 내 마음속 훈장의 자리를 제대로 되찾은 것 같아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 그리고 국민발안권 원포인트 개헌 추진을 전국의 마을활동가들과 함께 하고 있으니, ‘계몽’을 욕보이는 만행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며칠 전 마을 어르신이 내게 전화를 해서 “반장님, 경로당에서 밥 먹으니까 같이 먹게 어서 오세요.” 라고 전화 하셨다.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경로당에서 점심을 같이해 드신다. 그런데 반장 수고 한다고 밥을 같이 먹자고 부르신 것이다. 사람 살아가는 정에 관한한 내가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이 나를 ‘계몽’ 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