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가 감히 히틀러를 꿈꾸고 있는가
1930년대 미치광이 그린 ‘히틀러: 파시즘의 진화’
윤석열, 트럼프와 오버랩 되는 연설과 선전기법
죽은 과거가 되살아나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음을
‘윤석열의 난’이 또다른 다큐가 될수 있음을 역설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영화가 될 것이다. 윤석열의 실패한 쿠데타의 기록도, 그가 체포를 당하지 않기 위해 한남동 공관에서 한줌의 지지자들과 함께 패악질을 하는 것도, 수많은 국민들이 저러다가 언젠가 그가 재부상해 다시 공포의 정치를 자행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을 갖는 것까지. 지금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다.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은 망상에 빠진 독재자일수록 자기를 기록하기를 좋아하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며, 카메라 앞에 서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줍잖은 독재자를 다큐로 만들기까지 푸티지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앞으로도 수많은 버전의 영상으로 2020년대의 소란을 재차 확인하게 될 것이다.
반 파시스트적 자본주의 기업 덕분에 보게 된 ‘독재자의 초상’
1977년에 만들어진 독일의 희대의 역작 다큐멘터리 ‘히틀러 : 파시즘의 진화(Hitler : The Career)'야말로 바로 그 점을 역설한다. 이 작품을 48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다시 볼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대규모 자본주의 미디어 기업인 넷플릭스 덕이다. 합리적인 자본가라면, 히틀러와 같은 무소불위의 독재자, 파시스트의 존재는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강한 주장으로 보여 주는 편성이 아닐 수 없다. 이건 단순한 장삿속이 아니다. 아무리 자본이 중요하고 반 공산주의를 지지한다 해도, 그렇다고 파시즘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반파시즘이야말로 진짜 우파의 태도이다. 이 작품이 넷플릭스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파와 파시즘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큐 ‘히틀러 : 파시즘의 진화’는 역설적이게도 아돌프 히틀러가 그 오래전에도 영상의 기술과 효과가 대중 선동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장 잘 알았던 인물임을 보여준다. 남아 있는 수많은 기록들은 어쩔 수 없이 장엄한 카메라 워크와 뛰어난 앵글, 교묘한 편집으로 만들어진 고퀄리티의 작품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다큐에서 보이는 히틀러의 모습은 실제로 영상미가 탁월하다. 우습게도 한국의 우파들은 저런 영상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히틀러의 파시즘은, 이 다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분명히 진화해간다. 그러나 현실의 파시스트들, 그것이 윤석열이 됐든 아니면 트럼프가 됐든, 프랑스의 마린 르펜이 됐든 저러한 영상 기술은 터득하지 못한다. 진화는커녕 천박하게 퇴보를 거듭한다. 무식한 이데올로그들일 뿐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윤석열 혹은 트럼프와 오버랩 되는 히틀러의 연설과 선전기법
예컨대 이런 장면이다. 히틀러가 정치 초년병 시절이었음에도 존재감을 확 올리는 연설을 한 곳은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Sportpalast 스포츠광장)에서였다. 이 연설에서 히틀러가 스스로 연출한 연설 장면은 가히 혀를 내두르게 한다. 처음에는 다소 쭈뼛거리는 척, 시선을 아래로 깔고, 옆 테이블의 쪽지를 만지작거린다. 군중들의 흥분과 함성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기다리게 한다. 그런 히틀러를 카메라는 약간 측면에서 앙각(仰角 : 아래에서 위로 찍는 것)으로 잡아낸다. 히틀러는 가장 포악한 사람이었을지언정, 스스로를 미디어 앞에서 어떻게 포장해 내는지 알았던 인물이다. 히틀러는 이 슈포르트팔라스트 연설에서 드디어 자신의 ‘반국가세력론'을 내세운다. 그는 쩌렁쩌렁 소리를 지른다. “독일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나의 투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1977년의 다큐멘터리가 지금의 우리에게 윤석열과 트럼프를 오버랩시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 다큐는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 지금의 얘기이다. 죽은 과거가 현재에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반면교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히틀러 : 파시즘의 진화’ 가 가장 역점을 둔 시기는 1923년에서 1933년까지 10년간이다. 히틀러는 1923년 뮌헨의 펜트헤른할렌의 비어홀에서 폭동으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그는 재판에 회부돼 5년형을 선고받지만 그 재판과정에서 자기 변론을 정치적 재기의 중요한 모멘텀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석열이 이걸 모방하는 중일까?) 실제로 그의 투옥기간은 1년에 불과했고 그나마 그걸 이용해 자신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썼다. 이후 그는 화려하게 정치적 부활을 했으며 펠트헤른할렌이 있는 오데오 광장에 자신의 쿠데타 과정에서 사망한 소위 16인의 동지 묘역을 만들어 나치기념관으로 활용한다.
국민들 불만과 증오 파고 든 히틀러, 자진해 권력 바친 온건 우익
‘히틀러 : 파시즘의 진화’는 화가와 건축가가 꿈이었던, 망상의 정치가가 희대의 권력을 얻게 되는 정치경제적 배경에 대해도 촘촘히 언급해낸다. 어쩔 수 없이 1929년의 세계대공황은 기성의 민주주의적 질서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못하게 만든 최대의 요인이었다. 5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1917년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체결된 불평등한 베르사유 조약(독일에게 가해진 가혹한 전쟁 배상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독일로 하여금 전후 복구를 불가능하게 한 요인이다. 프랑스에 대한 독일인들의 적대적 증오만 키웠으며 히틀러의 주요 정치적 공략 대상이었다)의 내용과 겹쳐 국민들 사이에 극도의 불만과 증오가 이어졌고 이게 파시즘을 증폭하게 했다.
이 틈바구니를 파고든 것이 히틀러였고 그가 내세운 모토도 ‘법과 공정의 나라’ 그리고 단순한 구호 “독일이여 일어나라!”였다. 어리석은 수십 만의 독일 군중은 거기에 열광했다. 1918년의 혁명과 1919년 공산주의자(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그네히트)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하면서 만들어진 우파 온건주의 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은 망설임 없이 히틀러에게 정권을 갖다 바친다. 빌헬름2세의 망명과 함께 1919년에 수립된 독일 최초의 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3년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국가수반인 수상으로 앉힘으로써 종말을 고한다. 그 역대의 수치스런 기록영상을 다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히틀러 : 파시즘의 진화’이다.
히틀러는 대외 침공을 벌이기 전에 국내의 정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는데 그중 한 명이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전위대인 돌격대(SA)의 에스트림 룀이었으며 그를 암살한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로 하여금 살인집단인 SS친위대를, 힘러의 부하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비밀경찰조직인 게슈타포를 만들게 해 정적에 대한 체포와 구금, 고문을 일삼기 시작한다. 하인리히 힘러에 대해서는 2024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에 대한 얘기는 1975년 ‘새벽의 7인’ 이후 수많은 레지스탕스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번 다큐 ‘히틀러 : 파시즘의 진화’에서는 헤르만 괴링과 나치의 요설(妖說)에 앞장선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모습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괴벨스는 특히 패전이 짙어지던 1943년 과거 히틀러가 연설을 했던 슈포르트팔라스트에서 다시 국가 총동원의 궤변을 토해낸다.
2020년대와 판박이인, 1977년에 만들어진, 1930년대 미친 독재자 이야기
이 다큐는 기이하게도 현실의 모습을 판박이로 닮아 있다. 세계 곳곳에서 극우의 정치 행진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민자에 대한 탄압은 과거의 유대인 학살과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고, 나치의 아리안족 우월주의를 흉내내려는 듯 타 인종 타 종교에 대한 억압이 자행되고 있다. 이 영화는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 현상에 대해서도 심각한 경종을 울린다. 실체도 불분명한 반국가세력(공산주의자, 좌파)을 척결하겠다는 미명하에 ‘민주주의적 방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민주주의를 파괴했던’ 히틀러의 모습이 지금 그대로 여기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파시즘도 진화한다는 것이다. 자칫 그대로 놔뒀다가는 10년 후 거대한 세력이 돼 엄청난 내전과 세계 전쟁을 유발하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히틀러가 1933년 집권 후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해 1945년 자살에 이르기까지 그가 희생시킨 인류의 수가 5천만 명이다. 윤석열과 트럼프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 그러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민중이 잠자고 있으면,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한줌의 극우 유튜버들이 세상을 장악할 수도 있다. 이 영화 ‘히틀러 : 파시즘의 진화’를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넷플릭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