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디스토피아 '백색소음', 이태원참사 그린 '애열'
서울휘슬러영화제 상영작을 소개합니다②
서울휘슬러영화제가 개막 일주일을 앞두고 있다. 국내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이란 영화에서부터 중국, 캐나다, 시리아, 이스라엘 등 다양한 국가의 23개 작품이 관객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중 눈에 띄는 한국 단편 두 편을 소개한다.
1. 백색소음(심사위원 제이슨 버니 Jason Verney)
AI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스타일리시하게 만든 공상과학 디스토피아 드라마. 이 세상에서 진짜는 무엇일까? 대미를 장식하는 백남준과의 짜릿한 만남!
◆<백색소음> 조정웅 감독과의 일문일답
- 화두가 되고 있는 AI 기술을 이용한 작업, 어땠는지?
영화를 배운 적 없고, 찍어본 적 없는 일반인으로서 영화적 서사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하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AI의 현 단계는 생성형 AI 즉, 제작을 보조하는 도구입니다. 앞으로 인간의 역할은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현하는 것은 당분간 AI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백남준 선생의 <사이버네틱스 선언>의 의미를 곱씹으며, 그의 예언적 화두가 실현되고 있음에 짜릿한 기분을 느낍니다. 사이버네틱스 이론은 인간과 기계의 질적인 차이가 양적으로 전환됨을 시사합니다. 곧 인간과 기계를 구분 짓는 경계가 허물어지고, 둘의 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음을 의미합니다.
생성형 AI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인간이 기계의 언어를 학습해왔습니다. 개발자들의 몫이었지요. 하지만 이제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곧 기계의 인간화 즉, 백남준 선생이 말했던 <사이버네틱스화한 삶을 위한 예술>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인간의 기계화가 아닌, 기계의 인간화를 염두해 둔 것이기도 합니다. AI 기술은 많은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 오웰이 미디어에 대해 걱정했던 미디어의 빅브러더화, 즉 디스토피아적 <1984>의 재현과 오버랩됩니다. 백남준 선생은 이에 대해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현시대의 안녕을 전하였지요.
저는 다가올 기술 문명이 AI의 시대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이는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공생하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비전에 대한 확신으로 AI 기술에 관심을 갖고 다가올 미래를 사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 제작과정의 한계나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제작 과정의 어려움은 크게 없었습니다. 기획에서부터 제작까지 단 1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최종 편집까지 하여 1주일 반 만에 모든 프로세스를 완료하였습니다. 영화를 배우지 않은 일반인이 이렇게 단기간 내에 영화 제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퍼포먼스를 극대화해주는 AI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려웠던 것은 스토리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토리의 가능성은 제한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전의 데이터를 짜깁기하는 것으로는 카타르시스를 줄 수 없습니다. 저는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데 있어,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했습니다
- 서울 휘슬러영화제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누구나 하고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은 이 영화제에서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제 말을 전달할 수 있는 확성기를 쥐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대중들의 공감이고, 또 하나는 그 가치가 실현되는 것을 원합니다. 관객들이 저의 영화를 보고 제 가치에 공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 애열(심사위원 조 맥퍼슨 Joe Mcpherson)
단순하게 친밀한 카페에서의 데이트처럼 보이지만, 대화의 깊이에서 이면에 담긴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힌트가 곳곳에 숨어있다. 2022년 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이 단편은 한국의 정서로 보이는 미묘한 예언과 반전으로 완성된 수작이다.
◆<애열> 엄세은 감독과의 일문일답
-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
어느 날에 꿈을 꿨습니다. 웬 남자가 앞에 앉아있었는데, 우린 함께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분명 설레는 분위기였는데, 어느 순간 그 남자친구가 팔다리가 저리다며 힘겨워했어요. 점점 창백해지는 손을 붙잡고 저는 그 사람의 피가 다시 돌게 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들은 거의 제가 꿈에서 들은 그대로 입니다. 깨고나선 꿈을 잊어버릴까 봐 급히 노트에 적고 있는데,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지나가더라구요. 아, 우린 이태원에 있었구나. 그래서 남자친구 발에 신발이 없었구나.
이후 이태원 참사에 대한 자료를 정말 많이 찾아봤어요. 제가 모르고 있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고,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동안 큰 우울감에 빠져있던 거 같아요. 그 날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 중, 소중한 사람의 손을 놓치고 여전히 살아계시는 분들이 느낄 고통이 상상조차 안 되더라구요. 애열은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어떤 비극을 겪고, 홀로 남게 된 자들에게 일말의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였어요. 그날의 기억 속에 아직도 머물러계시는 모든 분들의 밤이 평안하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 이태원참사 이야기지만, 단서는 숨겨놨다. 관객이 금방 찾을 거라는 의도가 있었나?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말자’였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저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장치를 숨겨두더라도, 그걸 찾고 이해하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22년 10월 달력, 명단, 그리고 목걸이로 인한 상흔 등 사건을 암시할 수 있는 표현을 많이 숨겨뒀습니다. 러닝타임이 짧다 보니, 작품을 다시 봤을 때 처음엔 발견하지 못한 부분들을 새롭게 찾을 수 있게 만들고 싶었어요. 혹여 제가 설정한 힌트를 발견하지 못하셨더라도, 사랑했던 사람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느끼셨다면 저는 그것만으로 충분할 거 같습니다. 영화라는 건 창작자가 아무리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매력이라 생각합니다. 이 작품을 보게 될 분들께 온전한 해석을 맡기고 싶습니다.
- 세상을 떠난 친구의 말, ‘물고기는 3초면 잊는다’ 라는 대사가 강조되는 데, 어떤 의미인가?
영화 속에 나온 카페는 제가 실제로 자주 가는 카페인데, 작은 어항을 이리저리 헤엄치는 잉어들을 보면서 '어떻게 그 좁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기억력이 3초뿐이라면, 3초마다 새롭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너무 괴로운 기억들은 가시처럼 박혀서 빠지질 않아요. 잊으려고 애를 써도 더 깊이 박힐 뿐인 거 같아요. 더 이상 회상과 망각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요.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전부 잊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남자친구 시훈이도 자신을 잊지 못해 계속해서 사이렌 소리를 듣는 수오를 보면서 차라리 네 기억력이 3초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싹 잊었다가, 다시 시작하길 바라면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부디 수오가 더 이상의 사이렌을 듣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던 거 같아요
- 서울휘슬러영화제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길 바라는가?
처음 초청 메일을 받았을 때, 마침 팀원들과 함께 있었어요. 휴대폰에 메일창을 켜두고 옹기종기 모여 기뻐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영화제가 코앞인 게 매우 설렙니다. 이렇게 의미있는 영화제에 초청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힘써주신 만큼 많은 이들에게 이번 영화제가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휘슬러영화제는 시민언론 민들레와 공동주최로 10월 25일(금)부터 27일(일)까지 3일간 서울 홍대 인근 상상마당에서 열릴 예정이며 예매 링크는 다음과 같다.
※네이버를 통해 예매하기:
https://booking.naver.com/booking/5/bizes/505592/items/6216981
※서울휘슬러영화제 후원하기 : 기업은행 301-101031-04-095 한국스마트협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