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의 출마 자격'을 묻는 이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
그에게 기회 주느냐 아닌 한국교육에 기회 주느냐
윤석열 정권 교육 퇴행 현실에서 총체적 인식 필요
한 달여 뒤인 10월 16일의 서울시 교육감 보궐선거가 마치 '곽노현 선거'처럼 되고 있다. 어느 후보들보다도 그에 대한 지지와 반대가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다. 서울시 초대 진보교육감으로서 12년 만에 교육감에 재도전한 그에 대해 조선일보는 '사후매수죄'를 거론하며 "이 정도 선거 범죄로 선거 질서를 어지럽히고 학생들에게 최악의 ‘모범’을 보였다면 평생 근신하는 것이 상식이다"면서 교육감 선거 폐지론까지 제기했다. 여당인 국민의힘 대표는 "성공을 위해선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뭘 해서든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걸 학생에게 가르친다는 것이냐"라며 "곽노현 씨의 등장은 근래 역사기록이 될 만한 최악의 비교육적 장면"이라고 맹비난했다. 이들 '보수' 정당과 언론의 곽노현 전 교육감에 대한 공격은 충분히 예상됐던 바다.
그러나 민주당으로부터 나온 '출마 자중' 권고는 뜻밖이다. 이 당의 정책위의장은 "시민의 상식선에서 볼 때 적절하지 않다"며 사실상 불출마를 권유했는데 "지난 법원의 판결이 억울할 수 있겠지만 시민의 눈으로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자중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번 선거는 곽노현을 다시 교육감으로 택하느냐 아니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이전에 곽노현에게 과연 교육감 출마 자격이 있느냐를 묻는 것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질문을 바꿔보고 싶다. 이번 선거가 '곽노현 선거'라면 그것은 곽노현에게 기회를 주느냐라기보다는 한국 교육에 기회를 줄 것이냐 말 것이냐는 질문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를 통해 한국의 교육, 학교 혁신에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고 필요하냐는 것으로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서울의 첫 진보교육감으로서 교육행정혁신교육의 선도적 주창자이자 설계자이면서 실제 이를 실천했던 그를 통해 한국 교육이 '혁신의 혁신화' '진보의 진보화'의 기회를 얻느냐는 것으로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교육감 재임 기간은 불과 2년간이었다. 그것은 '겨우'이기도 했고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럼에도'이기도 했다. 그 짧은 기간에 곽노현은, 또 서울의 교육 나아가 한국의 학교 혁신은 그를 통해 뭔가를 이뤘고 뭔가를 이뤄내지 못했다. 그 성취와 더불어 미완까지가 전례 없는 교육 개혁의 청사진을 보여줬다. '공교육의 표준' 교체에서 그 전에 본 적 없던 내용과 규모에서의 일대 실험이었다.
2010년 교육감이 되자마자 그가 들고 나왔던 것들은 당시는 파격적이고 급진적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과격'이었지만 이제는 표준이며 상식이 돼 있다. 체벌금지가 그렇고, 무상급식-무상급식을 넘어 친환경 무상급식- 등 의무교육의 실질화, 문·예·체 교육이 그렇다. 지난 10여 년간의 전국에서 시도된 많은 혁신 교육 프로그램들은 '곽노현 혁신교육의 번역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교육 혁신은 그 자신이 '뼛속까지 개혁가'라고 자임하듯이 그가 그때까지 펼쳐 왔던 일들의 집약이며 응축이었다. 삼성 3세 부당 승계 저지와 재벌 개혁, 독립적 국가인권위원회 설립과 인권 증진, 비밀 정보기관의 민주적 통제와 과거 청산 등의 시대적 요구들과 씨름하며 살면서 ‘법치주의 전사’라는 별칭을 얻었던 그의 삶의 이력을 통해 축적된 것이 학교 현장에 대해 적용된 것이었다.
곽노현의 그같은 이력이, 윤석열 정권에서의 정치 사회의 퇴행이 교육의 퇴행으로, 다시 교육의 퇴행이 사회의 퇴행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그의 쓰임새가 과연 다시금 필요한가. 이것이 그의 출마 자격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다른 질문이자 하나의 답이 될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교육의 내부로부터의 위기와 함께 외부로부터 위협이 윤석열 정권에 의한 정치의 교육 지배로써 나타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과 검찰에 의해 곽노현 교육감직 박탈로 교육혁신의 거대한 시작이 막혔다면 이명박 정부 2기랄 수 있는 윤석열 정권에서 조희연 교육감이 쫓겨남으로써 교육혁신이 다시 한 번 중대 기로에 처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교육의 현장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윤석열 정부 이주호 교육부 장관에 의해 강행되고 있는 이른바 ‘보수적 개혁 드라이브’는 디지털 교과서 일방 추진으로 교육을 권력과 대자본의 손에 넘기려 한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윤 정권의 역사 왜곡과 종일 숭일, 외세 추종은 식민지 교육의 부활 시도로 나타나고 있다. ‘밀실야합’ 비판을 받고 있는 국가교육위원회의 국가교육발전계획은 고등학교의 내신 평가를 외부기관에 맡기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는 소식으로 교사 단체들에 의해 "획일화된 교육, 정답만 찾는 교육에서나 가능한 시대착오적이며 전근대적인 발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이 중차대한 계획을 논의한 국가교육위의 전문위원회 위원들 중에 교육전문가인 교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교사 정치기본권 박탈’ 법령으로 해직된 교사 5명을 복직시켰다가 교육감직 상실한 조희연 전 교육감의 경우에서도 드러나듯 교육의 자주성을 위협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더욱 확인해주고 있다.
이같은 상황들이 분명히 드러내는 것은 교육은 '교육 외'의 것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교육' 자체만으로는 교육의 문제는 제대로 풀 수 없다는 점이다. 교육의 전문성과 함께 규정된 헌법 제31조의 자주성의 확보를 실질적으로 이뤄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지금의 현실은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현실의 확인은 과거 검찰과 국정원의 사찰과 공작이 드러나면서 '곽노현 죽이기' 음모가 사실로 밝혀졌던 것과도 맞물린다.
교육의 문제는 결국 교육의 안과 밖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인식에서부터 풀릴 수 있다. 곽노현이 친환경 무상급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무상급식을 넘어 ‘친환경 무상급식’은 학생에게는 건강을, 농민에게는 안정적 판로를, 농약과 화학비료에 찌든 우리 국토에는 지력회복을 주는 것이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교육은 교육청과 학교가 알아서 한다는 생각과 확실하게 결별해야 한다. 시청과 자치구와 협력하지 않고는 아이들 교육을 만족스럽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던 것과 같은 상호연결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는 또한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 간의 공존을 볼 수 있는 눈이기도 하다. 학생인권은 교사인권 존중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교사인권은 학생인권을 전제로 작동한다는 것, “진실은 세상을 양자택일의 조각으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진실의 한 측면으로 받아들이면서 발견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에 진실은 외관상 반대로 보이는 것들의 역설적인 융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곽노현의 말이 그같은 포괄적, 양면적인 시야를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다시 문제는 그에게 걸려 있는 족쇄, 경쟁 후보에 대한 이른바 ‘사후매수죄’라는 굴레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선의의 부조(扶助)’였음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와 근거에도 불구하고 법정이 최종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곽노현에 씌워진 그 족쇄는 그같은 논리 앞에서 혼란스러운 이들이 스스로 자신에게 씌우는 족쇄이기도 하다.
이는 보수언론들에 의해 그가 '부패 인물'로 낙인찍혀 있는 현실의 반대편에 그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교육계인사들도 흔쾌하게 인정하는 것, 그가 서울교육의 고질적인 인사행정, 시설행정, 사학행정에서의 부패와 비리를 추방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특히 쪽지인사를 없앴고 대여섯 차례의 인사에서 조금도 잡음과 뒷말이 없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큰 아이러니다.
12년 전 그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공방은 유죄 판결로 종결된 것일까. 현실의 제도적인 법정에서의 판단은 일단 끝났다. 그러나 곽노현이 이 사건에서 던진 질문은 아직 그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질문은 아직 제대로 제기된 적조차 없다. 그 질문은 곽노현이 당시 유죄 선고와 교육감직 박탈 가능성 앞에서, 교육감 자진 사퇴로써 35억 원의 막대한 선거비용 반납 의무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법정 투쟁을 벌인 것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됐는지에 대한 주목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가 법정 싸움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은 승소를 확신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확신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빚어진 이 갈등으로부터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 것 이상의 소득을 우리 사회가 얻어내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이 한국 사회에 던질 만한 질문이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그 질문의 한 연료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어떻든 그는 그 싸움이 필요했다고 봤고, 문제와 정면 대결해보려 했다.
이것은 결코 영웅담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진지함에 대한 얘기다. 문제에 정면으로 직면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사후 매수죄라는 결론에 대해, 오히려 검찰과 언론 기성의 힘이 대중들의 인식과 상식을 '매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려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당 정책위의장 등의 사람들이 우선 갖춰야 할 진지함이다.
사후매수죄의 법정 싸움에서 곽노현은 패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진실의 패배인 것은 아니다. 진실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 진실은 곽노현이 보였던 것과 같은 진지함이 모일 때 얻어질 것이다. 곽노현의 출마 자격을 묻는 이들에게 먼저 있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진지함은 우리의 교육에 대해 생각할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