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의정 협의체 운 뗐지만…정작 의·정은 치킨게임
대통령실 '제로 베이스' 검토라더니 2025학년도 불가
2026학년도 정원부터 논의 가능하다 슬쩍 말 바꾸기
의사단체는 "당장 2025학년도부터 원점 재검토하라"
수시 모집은 오늘부터 시작됐는데 의정은 '평행선'만
여야의정 협의체, 추석 밥상 앞두고 민심용 보여주기?
"협의체 떠넘기기만 하고 정부 어떻게 한다 입장 없어"
"결국 감당 안되니까 야당에 책임 떠넘기려는 건가"
"더 이상 치킨게임으로 국민 생명 위태롭게 해선 안돼"
여야가 9일 의대 정원 증원 등 의료개혁 문제 논의를 위한 여·야·의·정 협의체에 의료계가 참여하도록 공동 노력을 요구하기로 한 가운데, 정작 핵심 당사자인 정부와 의료계가 평행선을 그리고 있어 단시일에 의료붕괴를 해결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향후 논의에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와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우원식 국회의장 주재로 만나 의료계 참여를 위한 공동 노력에 의견을 모았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의료계가 2025학년도와 2026학년도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를 협의체 참여 조건으로 요구하는 상황에서 우선 의료계를 논의 테이블에 합류시키는 데 한목소리를 내기로 한 것이다.
추 원내대표는 "제일 중요한 문제는 의료계 참여 여부"라며 "(의장과 야당이) 정부·여당이 의료계 참여를 유도할 대화를 활발히 해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고, 정부·여당이 현재 그렇게 노력 중이고 앞으로도 더 활발히 하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어 "의장과 야당도 결국 의료계 동참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며 "같이 기회가 있을 때 의료계 동참을 유도할 수 있는 활동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의료계가 협의 테이블로 나올 수 있게끔 전제 없는, 정부의 진정성 있고 설득력 있는 제안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여당에) 이야기했다"며 "야당도 협의체를 제안했던 만큼 이 부분과 관련한 문제 해결에 이번 추석 전후로 더 집중해야겠다"고 말했다.
여·야·의·정 협의체는 여야 원내대표들이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협의체에 대해 언급하고 대통령실이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앞서 박 원내대표는 지난 4일 정기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환자들이 응급실을 찾아 뺑뺑이를 돌고 있다. 응급 의료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되고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체면을 따지거나 여야를 가릴 때가 아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의료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한 대책을 신속하게 마련해야 한다"면서, 의료대란 해결을 위한 여·야·의·정 비상협의체를 제안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6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 로비에서 기자들과 만나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국민 불안이 큰데, 여·야·의·정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료개혁이 국민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협의하자"며, 박 원내대표 제안을 받아들였다. 추 원내대표도 같은 날 오전 "지금이라도 2026학년도 의대 증원을 포함해 의료개혁 문제에 대해 얼마든지 열린 마음으로 원점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와 당의 입장"이라며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국정브리핑에서 "비상의료체계가 원활하다"며 왜곡된 현실 인식으로 '달나라 대통령'이란 비난까지 받았지만, 여야가 협의체에 한목소리를 내면서 입장을 돌연 바꿨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6일 여·야·의·정 협의체에 대해 "제안에 대해 긍정적"이라면서 "의료계가 대화의 테이블에 나오는 것이 우선이다. 의대정원 문제는 의료계가 합리적 안을 제시하면 언제든 '제로 베이스'(원점)에서 논의하겠다"고 했다.
다만 정치권에서 여·야·의·정 협의체가 힘을 받고 있지만, 정작 문제의 핵심 당자인 정부와 의료계는 '동상이몽'하는 모습이다. 이후 나온 양측의 발표문이나 성명 내용을 보면 논의 시작이나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국무조정실은 대통령실에서 '제로 베이스에서 논의' 언급이 나온 다음 날인 7일 토요일 보도 설명자료를 내고 "일부 언론에 보도된 2026년 의대 증원 유예 결정은 사실과 다르다"며 "의료계가 계속해서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재논의는 불가하다"고 입장을 바꿨다. 정부의 이러한 입장은 당장 2025년도 의대 증원부터 백지화해야 한다는 의료계 입장엔 선을 긋고, 2026년도부터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해석된다.
국정조정실은 "정부안과 다른 의견이 있다면 과학적 분석에 터 잡은 의료인 수요 추계를 제시해야 재논의가 이뤄질 수 있다"며, 대통령의 기존 발언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의료계가 2026학년도 이후 의대 증원 규모에 이견이 있다면 과학적 근거를 갖춰 합리적 의견을 제시할 경우 이를 존중해 2000명이라는 숫자에 구애되지 않고 제로 베이스에서 재논의할 수 있음을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밝혀왔다"고 재차 강조했다.
대통령실도 지난 6일 '제로 베이스' 언급을 슬그머니 뒤로 무르고 의료계가 협의체 참여 선행 조건으로 요구하는 2025학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에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지난 8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당장 내일부터 2025학년도 수시 원서 접수로, 현재 입시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건드릴 수 없다"며 "2025년도는 안 되고, 2026년도부터는 의료계가 합리적 근거를 갖고 오면 숫자에 구애받지 않고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의사단체들은 대체로 정부가 주장하는 2026학년도뿐 아니라 당장 내년 2025학년도부터 의대정원 증원 문제를 전면 재검토하거나, 의대증원 자체를 유예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은 지난 7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2025년 의대 정원 원점 재논의가 불가한 이유와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냐"며 "의협은 의료대란 사태를 해결할 여야정의 합리적인 단일안을 요구한다"고 책임을 정치권에 돌렸다. 그는 이날도 "2025년도 원점 재검토는 불가능하고, 4567명 교육은 가능하느냐"고 했다. 2025학년도 원점 재검토를 하지 않고 올해 유급될 1학년생과 2025학년도 신입생 7500명에게 정상 교육이 가능하냐는 주장이다.
의헙은 이날도 '대국민 호소문'을 내고 "정부는 2025년 포함해 모든 증원을 취소하고, 현실적으로 논의가 가능한 2027년 의대 정원부터 투명하고 과학적 추계방식으로 양자가 공정하게 논의할 것을 제안한다"며 "의대 증원 백지화는 전공의 복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했다. 이들은 "올해 증원을 강행하면 내년부터 수년간 의대와 수련병원의 교육은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며 "순리와 법에 따라 의대 정원을 논의할 수 있는 가장 빠른 학년은 2027년"이라고 주장했다.
경기도의사회 역시 7일 입장을 내고 "의료계와 대화에 최소한의 진정성이 있다면 윤 대통령의 사과, 막말·실언을 일삼은 보건복지부 조규홍 장관, 박민수 차관, 장상윤 사회수석을 즉각 파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여야의정 협의체 제안은 이번 사태의 원인인 2025년도 의대 증원 강행을 중단해야 한다는 본질을 왜곡한 꼼수 주장"이라면서 "진정성이 있다면 의료 파탄을 초래한 증원의 즉각적 중단이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도 지난 6일 입장을 내고 "의료 공백 상황에 대한 국민 불안을 해소하고, 지역·필수의료 체계를 개선하기 위한 여·야·의·정 협의체를 구성 운영하자는 국민의 힘 한동훈 대표의 제안을 환영한다"면서도 "의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상호 존중을 전제로 의대 증원을 원점 재검토하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의사 수 추계 결과가 도출될 때까지 의대 증원을 유예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의료 개혁의 핵심 당사자인 정부와 의료계가 내년도 의대 정원을 두고 평행선을 긋는 가운데, 이날부터 전국 39개 의대를 비롯해 4년제 대학이 일제히 수시모집 원서 접수를 시작하면서 원점 재검토 논의는 더욱 힘들어지는 양상이다. 의료계와 정치권에선 2025년도까지 원점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정부가 2025학년도 논의는 불가능하다고 선을 긋고 있고 학부모·수험생에게도 대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부도 2025학년도는 이미 재검토가 어렵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교육부 관계자는 "물리적으로 (인원 조정이)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이미 2025학년도 수시모집에 들어간 만큼 정원을 조정할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의대의 수시 결원이 매년 발생하는 만큼 결원을 채우지 않는 방법으로 타협하자는 안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근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수시모집 이후 정원을 강제 재조정할 경우 학부모와 수험생의 줄소송이 예상되는 점도 재검토를 어렵게 하는 부분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도 기자들과 만나 "2025년 의대 정원 유예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현실적으로 내년도 증원에 타협이 어려움에도 응급실 의료 붕괴로 여론이 악화되자, 추석 밥상 민심을 고려해 뒤늦게 '보여주기식' 대화를 시도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여·야·의·정 협의체 언급 뒤에도 정부가 2025학년도 불가론만 강조하는 것은 이들의 대화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는 한동훈 대표가 말한 여야의정 협의체로 책임을 떠넘기기만 했을 뿐, 지금 현재 어떻게 하겠다는 입장이 없다. 이랬다, 저랬다,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고, 왔다 갔다 하고 있다"며 "오히려 혼란만 부추기고 있다. 대화가 시작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여야의정 협의체는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국민들이 생명의 위협을 겪지 않도록 의사들이 하루빨리 병원에 복귀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7개월간 수차례 지적되어온 문제를 정부가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고 폭넓게 개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더 이상 치킨게임으로 국민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그러한 일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전현희 최고의원은 "의사 증원 정책 결정 권한이 있는 정부 여당이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굳이 한동훈 대표가 야당에게 여야의정 협의체를 구성하자라고 (박찬대 원내대표 제안을) 다시 그대로 역제안을 했다. 그리고 마치 새로운 제안인 것처럼 생색을 낸다"며 "이것은 자신들이 의료대란을 해결할 의지가 없다라는 것을 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전 최고의원은 "결국 자신들이 감당이 안 되니까 해결은 민주당이 해라 그런 속셈이 아닌 건지 묻고 싶다"며 "한 대표는 야당을 끌어당겨서 책임 떠넘기기식 물귀신 작전하지 말고 집권여당 대표다운 권한과 책임감을 가지고 윤 대통령과 진정성 있는 의료대란 해결 담판에 나서기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