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권 아래서 더욱 빛나는 '김대중 육성 회고록'

어쩌다 대통령 vs 준비된 대통령

매국, 흡수통일 vs 자주, 평화통일

노무현 장례식 때와 겹치는 그의 울음

2024-08-16     임종업 에디터
서울의 봄 한신대 연설. 1980

'김대중 육성 회고록'.

<김대중 육성 회고록>(한길사)은 8.15광복절 전후로 아주 달리 읽힌다. 하나의 책이 특정일을 전후로 느낌이 달라지는 경험은 희유하다.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유행가 가사가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현상과 흡사하다. 다른 점은 사랑하는 이가 더 이상 곁에 없다는 사실.

올해 광복절은 뉴라이트계열과 독립운동단체가 각각 따로 기념식을 치렀다. 전자를 대표하는 윤석열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광복을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자유를 향한 투쟁’이라고 규정하고, 북한을 흡수통일했을 때 투쟁이 완결된다는 희한한 주장을 폈다. 후자를 대표하는 이종찬 광복회장은 자주독립을 위해 피로 쓴 역사를 견강부회 세 치 혀로 덮을 수 없다며 자유와 번영의 근간을 왜곡하는 일에는 반드시 단죄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평화통일과 국민통합을 추구했던 제15대 대통령 이야기다. 한반도를 전쟁 위기로, 모든 국민을 분열과 대립으로 몰고가는 윤석열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이다. ‘회고록’은 자체로 빛나거니와 윤석열의 행태와 그것이 빚은 국정 난맥상이 ‘육성’을 절절하게 만든다.

 

문익환 목사와 함께. 1987

회고록은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41회에 걸쳐 진행된 김대중 구술 동영상 인터뷰 42시간 26분 분량의 내용을 풀어서 정리했다. 김대중도서관 측이 묻고 김대중 대통령이 답하는 방식이다. 웃음과 기침소리까지 녹취하는 1차 작업, 오류와 혼선을 바로잡는 2차 작업, 공개를 원치 않는 부분을 삭제한 3차 작업을 거쳐 완성했다. 시대순으로 주요사안과 쟁점을 정리하여 이를 바탕으로 질문지를 만들고, 솔직하고 개방된 자세로 답변했다고 하니 ‘육성 회고록’이라는 이름에 값한다. 김대중을 잘 모르는 이한테는 ‘김대중과 그의 시대’로 들어가는 문이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한테는 지난한 시대를 건넌 이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된다.

회고록은 대통령이 되기까지를 기술한 앞쪽 3분의 2, 대통령이 된 이후를 기술한 뒤쪽 3분의 1로 대별되는데, 통털어 말하면 ‘준비된 대통령’ 이야기다. 뒤쪽 3분의 1 즉 대통령이 되어서 그가 한 일이 곧 김대중의 진면모다.

 

스티븐 호킹 박사와 함께. 1993

김대중 대통령은 전임 김영삼 정부한테서 거덜 난 나라를 인수했다. 국가는 부도위기였고, 남북한은 극한대결의 상태였다. 첫째 국가부도 막기. 외자 유치와 단기외채의 장기전환에 전력을 기울였다. 구체적으로 금융, 재벌, 공공부문, 노동 등 4개 부문의 개혁으로 드러난다. 위기의 근본이 경제성장을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한 데서 비롯됐다고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 같은 노사정 대타협, 금모으기 운동이 이뤄졌다. 둘째 햇볕정책. 김영삼 정부의 핵연계 정책을 폐기하고 정경분리 원칙을 폈다. 북한의 금창리 핵시설 의혹, 대포동 미사일 발사 전후에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금강산 관광이 이뤄지며 남북 전쟁 위기를 넘겼다. 제1, 제2차 연평해전은 무력도발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대북정책에 따른 대응이었다. 북한과 신뢰가 쌓이며 평양 남북정상회담, 6.15공동선언으로 이어졌다.

(부적절한 표현이지만) 이 밖에 주 5일제 공론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 하의 문화예산 증액,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의료보험 통합, 자민련과의 공동정부 구성, 국가인권위원회 출범, 전교조 합법화, 국회의원 비례대표에 여성 50% 이상을 공천토록 한 정당법 개정 등이 그의 업적으로 꼽힌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골라서 하는 듯한 윤석열과 뚜렷이 대비되지 않는가.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살해 위협, 투옥과 망명 등 군부독재에 대한 항거로 다져진 연단과 부단한 독서, 연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책의 앞쪽 3분의 2 곳곳에는 ‘과정에서의 빛나는 순간’들이 점철돼 있다.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가 대통령 부정선거라기보다 부통령 부정선거였다는 판단,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파병 때 의용군 형태로 보냈더라면 하는 아쉬움, 1967년 목포지역선거에서 벌어진 김대중 죽이기를 박정희 대 김대중 구도로 만든 배포 등.

책에는 김대중의 울음이 두 차례 나온다. 인간 김대중의 속내다. 첫 번째는 미국 망명 당시 광주민주화운동 비디오를 처음 보았을 때 동족에 의한 동족학살의 슬픔에서 비롯한 대성통곡, 두 번째는 1980년 교도소 수감 당시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에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서럽게 울었다는 대목. 이는 자신의 정신적 후계자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의 통곡과 겹친다.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윤석열 정권에서 벌어진 ‘김대중 지우기’를 예감한 것이 아니었을까.

책의 말미 ‘후배 정치인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대표적인 육성이다. 우선 정치인이 가져야 할 덕목.

나는 후배 정치인들에게 두 가지 내용을 당부하고자 합니다. 첫째, 정치인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 하는 데는 원칙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좌표를 잃고 권력만 추구하는 정치인이 됩니다. 동시에 정치는 실질적인 결과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뤄내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과 전략적 사고를 갖춰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개혁과 진보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이어가는 데에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둘째 정치인은 국민의 반보 앞에서 국민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정치인은 자신의 비전을 실천함에 있어서 항상 국민들과 함께 가야 합니다. 이것을 잘 못하는 정치인은 독선적 인물로 평가받고 정치적인 동력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게 됩니다. 정치인은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국민 앞에 있어야 합니다. 국민과 호흡하면서 국민과 함께 가야 한다는 점에서 반보만 앞서가야 합니다. 정치인이 국민과 유리되면 결국 실패합니다.

둘째 창조적인 외교.

우리가 사는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저주받은 땅이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우리가 국권을 잃어서 식민지가 되었고 분단이 되고 전쟁까지 하는 등 온갖 수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고 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정학적 저주라는 말은 우리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다는 능동적이고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의식이 결여된 패배주의적이고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인식의 표현입니다. 나는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작지만 지정학적으로 크고 중요한 나라입니다. 나는 늘 ‘도랑에 든 소는 양쪽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다’는 비유적인 표현까지 써가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 출간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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