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하시나 정권 강권통치 민중봉기로 붕괴
총리 사임 뒤 인도로 망명, 임시정부 수립
공무원 채용시 독립유공자 가족 특혜가 시위 유발
시위 강경진압이 오히려 정권 종말 재촉, 자업자득
우크라 전쟁 뒤 물가폭등 등 서민 어려움도 가세
방글라데시 특유의 양대 정당 반목 대립도 한몫
지난 7월 공무원 채용 때 독립유공자 가족들에 특혜를 주는 우대조치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항의시위로 촉발된 방글라데시의 반정부 유혈 시위가 2009년부터 15년간 연속 집권해 온 셰이크 하시나 총리 정권을 무너뜨렸다. 하시나 총리는 5일 사임한 뒤 국외로 망명했다.
총리 사임 뒤 망명, 임시정부 수립
하시나 총리 사임 뒤의 치안 및 질서 유지 주도권을 쥔 것으로 보이는 군부의 와케르 우즈 자만 육군참모총장은 이날 총리의 사임 사실을 발표하고 “모든 정당과의 협의를 거쳐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4일 밤부터 무제한 외출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일부 시위군중이 이를 무시하고 수도 다카의 총리 관저로 밀고 들어갔으며, 군이 총리관저를 시위대에 개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하시나 총리와 가족 등 일행은 군 헬기를 타고 다카 공항으로 탈출한 뒤 인도로 망명했으나, 최종 목적지는 영국일 수 있다는 관측들이 나왔다.
시위군중, 독재자 몰아낸 ‘민중의 힘’ 자축
시위군중은 다카 시 전역의 거리 곳곳에서 기쁨에 들떠 “우리가 해냈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등 독재자를 몰아낸 ‘민중의 힘’에 스스로 놀라며 자축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5일 오후에 군의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다카 시민들 사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얘기들이 돌았으며, “그때부터 데모에 가담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제 분위기가 됐으며 ‘(정권타도를) 해냈다 ’는 분위기가 퍼졌다.” 다카에 사는 40대 대학교 직원 아반티 하룬은 “지금까지의 정권(하시나 정권) 아래서 언론 자유가 억압당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아사히신문> 8월 5일)
이크발 카림 부이얀 전 육군참모총장(2012~2015년)은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방글라데시를 괴롭혀 온 모든 극악무도한 살인, 고문, 실종 및 대량 체포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걱정하며 슬퍼한다”면서 “우리 군대는 어떤 식으로든 이 현재 상황을 만든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나서서는 안 된다”며 군의 중립을 촉구했다.(<뉴욕타임스> 8월 4일)
시위 강경진압이 오히려 정권 종말 재촉
하시나 총리는 항의시위자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강경진압을 명했으며, 7월 중순부터 말까지 특수부대(RAB)까지 동원한 시위진압 과정에서 200명 이상이 사망하고 1만여 명이 체포당했다. 진압경찰관도 13명이 목숨을 잃었다. 통금령이 내려진 계엄상태에도 불구하고 지난 4일부터 재개된 시위 진압과정에서만 70~95명이 숨지고 1천 명 이상이 다친 것으로 알려졌다. 정권의 조급한 강경진압이 오히려 저항의 규모와 강도를 키웠으며, 그로 인한 대규모 유혈사태가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다.
공무원 채용시 독립유공자 가족 특혜가 시위 유발
시위는 지난 7월 공무원 채용시의 특혜조치에 반발하며 이의 철폐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데모로 시작됐다. 특혜조치는 1971년에 파키스탄에서 방글라데시가 분리 독립할 때 독립전쟁에 참가해서 싸운 가족(자녀)들을 공무원 채용 때 우대해 주는 조치로, 채용 정원의 30%를 독립유공자 가족에게 할당하는 제도다.
대학생 등 고학력자층의 취업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인기 높은 안정적 취업처로 선호도가 높은 공무원 채용 때 독립유공자 가족들을 특별 우대하는 '불공평한' 조치에 대해 오래 전부터 강한 불만과 함께 폐지하라는 대중적 압박이 컸다. 하시나 총리가 이끄는 집권 '아와미연맹'(AL) 정권은 2018년에 특혜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선거전략의 하나로 내세웠던 특혜 폐지 조치는 그 뒤 실행되지 않다가 올해 6월 정권의 시녀로 비판받아 온 대법원이 그 폐지조치가 위헌이라며 그마저 뒤엎는 판정을 내렸다. 그 일을 계기로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다카대학 등의 국립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대법원은 7월에 독립유공자 가족 특혜제도를 대폭 축소하는 판정을 내려 항의시위를 가라앉히려 했으나, 총리 사퇴를 요구하기에 이른 민심을 돌려 놓기에 이미 늦었다.
우크라 전쟁에 따른 물가폭등 등 서민경제 어려움도 가세
이에는 2022년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수입물가 폭등으로 서민경제가 어려워진 사정도 가세했다. 방글라데시는 하시나 정권 아래서 봉제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 기반의 경제성장전략이 성과를 내면서 높은 성장을 계속해 왔다. 2026년에는 최빈국으로 분류되는 유엔의 '후발 발전도상국'(LDC) 등급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예정돼 있었다.
이런 경제성장과 소득수준 향상으로 국민들의 기대 수준이 높아진 상황에서 권력 유지에 집착한 하시나 정권의 장기집권욕이 권위주의적인 강권 억압통치로 내달리면서 파국이 시작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경제난 속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면서 상류층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반감이 커가고 있는 가운데 오랜 불만의 대상이던 공무원 채용 특혜조치가 그것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방글라데시 특유의 양대 정당 반목 대립도 한몫
여기에는 아와미연맹과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NP)이라는 대립 반목하는 특유의 양대 정당구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국가 건설 때의 영웅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아버지다. ‘방글라데시 독립의 아버지’이기도 한 무지부르 라흐만은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그는 1975년에 지아우르 라흐만이 주도한 쿠데타 때 일가족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렇게 해서 7대 대통령이 된 지아우르 라흐만의 아내이자 1991~1996년, 그리고 2001~2006년에 각각 10대, 12대 총리를 지낸 칼레다 지아는 이번에 쫓겨난 셰이크 하시나와 번갈아가며 방글라데시 정권을 맡아 서로 상대방 세력 타도에 골몰해 온 정적이다. (지아우르 라흐만은 1981년 신군부 세력의 육군 장교들 손에 처형당했다.)
하시나는 살해당한 무지부르 라흐만 초대 대통령의 장녀로 해외 망명생활을 하다 1981년에 지금의 집권당 아와미연맹 당수로 취임해 방글라데시 민주화에 앞장선 정치 지도자로 떠오른 뒤 1996년에 총리가 됐다. 하시나는 2001년에 한 번 하야했으나 2009년에 다시 총리가 된 이후 15년간 장기집권을 해 왔다. 하시나 총리의 아와미연맹이 공무원 채용 독립유공자 가족 특혜제도에 집착한 것은 국가독립에 앞장선 그녀의 가족사와 독립운동 명분에 기댄 친여 인재 확보를 통해 정권의 안정적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정치적 계산과 얽혀 있을 것이다.
집권세력의 자업자득
하시나가 이끄는 집권 아와미연맹은 올해 1월 총선 때 승리해 5번째로 총리직을 맡았으나, 칼레다 지아가 이끄는 최대 야당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BNP)은 자당 소속 2만 명 이상을 체포하며 탄압한 하시나 정권의 강권통치를 성토하면서 총선을 보이콧했다. 그 때문에 당시 투표율은 그 전 총선 때 기록한 80%의 절반인 40% 정도로 떨어졌다. 정권에 반대하는 유권자 대부분이 투표를 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하시나 정권은 노벨 평화상을 받은 ‘그라민 은행’ 창설자인 무하마드 유누스(84)를 노동법 위반 죄로 처벌하기도 했다. 빈곤층에 대한 무담보 소액 융자(마이크로 파이낸스)의 선구자로 한때 정계진출을 시도한 경제학자 유누스는 하시나 정권과 대립했다.
이 양대 정당구조에서 최대 야당인 BNP가 시위 학생들과 손잡은 것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하시나 정권의 조기 몰락으로 이어졌다. 사태를 그렇게 만든 하시나 총리와 아와미연맹의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