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치 전환을 위한 ‘만물 공동회’ 제안합니다

만민과 만물 아우르는 ‘탈인본주의 정치’로 전환

좌/우, 진보/보수 중간지대 아닌 제3의 새로운 세계

어떻게 만민과 만물이 모두 다 말하게 할 것인가?

민족운동가 안재홍의 ‘다사리’ 정치, 한국적 상상력

서유럽에 ‘사물들의 의회’, 우리에겐 ‘만물 공동회’

2024-08-04     주요섭 밝은마을생명사상연구소 대표
주요섭 (사)밝은마을 생명사상연구소대표

“4.10 총선에서 ‘전환정치’는 어떻게 실패했을까?” 지난 7월 12-13일 지리산 실상사에서 ‘전환정치’의 관점으로 4.10총선을 돌아보는 연찬회가 열렸다. ‘제3지대’의 입장에서 4.10 총선을 평가하고, ‘이중 노동’의 관점에서 현실정치를 살펴보았으며, ‘생명정당’의 가능성을 상상해보았다. 참석들은 모두 ‘정치의 전환’에 공감했다. 그러나, 특별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목적지를 전제하지 않는 ‘연찬(硏鑽)’의 성격도 그렇고, 삼인 삼색의 주장도 그렇고, 결론이 나오기 어려웠다.

다시, ‘전환’이란 무엇일까?

연찬을 마치며 나는 나에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전환정치의 요체는 무엇일까? 전환정치의 문명사적 함의는 무엇일까? 물론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에게 그것은 ‘인본주의 정치를 넘어서’로 요약된다.

나에게 전환이란 단순한 ‘방향바꾸기(turning)’가 아니다. 지속 가능한 사회로의 ‘이행(transition)’으로도 충분치 않다. 나에게 전환은 다른 존재로의 ‘탈바꿈(transformation)’, 혹은 차원 변화다, ‘애벌레-나비’ 은유가 의미하는 새로운 존재로의 ‘재-탄생’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세계 재창조’, ‘다시 개벽’이다.

더욱이 애벌레가 나비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개체 생명의 탈바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벌레의 세계’와 구별되는 ‘나비의 세계’라는 또 다른 우주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것은 새로운 문법과 세계관의 생성과 전개를 의미한다. 나에게는 정치의 ‘전환’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떠올려도 좋겠다. 내가 아는 한 패러다임 전환의 결정적인 함의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 사이의 ‘불연속성’에 있다. 패러다임이 “한 시대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인식의 체계. 또는 틀”이라면, ‘천동설’과 ‘지동설’이 그렇듯이 두 패러다임 사이에는 쉬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강이 가로놓여 있다는 말이다. 패러다임 전환이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스리슬쩍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컨대, ‘인본주의(휴머니즘)’에서 ‘탈-인본주의(포스트 휴머니즘)’로의 ‘전환’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격렬한 심리적·철학적·물리적·사회적 혼란과 저항과 쟁투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7월 25일 영국 북부 위드니스에 있는 허친슨 엔지니어링을 방문했다. 영국의 새 노동당 정부는 대표적인 녹색 에너지 인프라 계획을 시작하면서 왕실의 사업 부문과 해상 풍력 발전소를 개발하기 위한 수십억 파운드 규모의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2024.7.25. AFP 연합뉴스

제3지대, 또 하나의 정치적 세계 탄생시키기

정치의 전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제3지대란 좌/우와 진보/보수의 ‘중간지대’가 아니다. 양 끝도 아니고 중간도 넘어서는 ‘이변비중(離邊非中)’의 새로운 차원의 구도인 것이다. ‘또 다른 세계’의 탄생인 것이다. 단, 이때 새로운 세계는 기존 세계의 대체가 아니라, 공존하며 경합하는 또 하나 세계의 창발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단일한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복수(複數)의 세계, 다중의 우주라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정치적 ‘제3지대’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것의 출현이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한 것은, 인물도 정책도 방법도 그 나물에 그 밥, 맨날 먹던 음식이었다. 전환은 기존의 관념을 깨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정치적 감각과 정동을 충격하는 것이어야 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의 정치적 정동과 감각을 충격한 인물과 정치적 사건이 있었던가?

60여 년 전인 1970년대 말 유럽에서 ‘녹색정치’는 또 다른 세계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녹색정치는 새롭지 않다. 정동을 격발하지 않는다. 기존의 ‘노동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그 사회적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녹색정치마저도 ‘기후문제’ 해결 식의 인간 중심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존 정치 세계의 지평을 넘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좌파 연합 "Nouveau Front Populaire"(새로운 인민 전선 - NFP)의 생태녹색당(EELV) 국회의원 씨리엘 샤틀랭이 7월 9일 파리의 국회에서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6월 30일과 7월 7일에 실시된 의회선거 뒤에 새로 구성된 프랑스 의회가 7월 18일 개원했다. 2024.7.9. AFP 연합뉴스

사물들의 의회 : 탈인본주의 정치의 서구적 모델

그렇다면 또 다른 정치의 태동은 요원한 일일까? 아니다. 새로운 세계의 지평이 열리고 있다. ‘근대화’ 대신 ‘생태화’의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프랑스의 사상가 브뤼노 라투르(1947-2022)가 그들 중 하나이다. 그는 인간 중심의 ‘근대 정치’와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非)-근대 정치’를 구별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 중심주의, 즉 인본주의에서 ‘탈-인본주의’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들의 의회’와 구별되는 ‘사물들의 의회’로 구체화된다.

그에게 ‘근대적 문법’의 요체는 자연과 사회(인간)의 이분법이고, 그가 제안하는 ‘비근대의 문법’은 ‘자연과 사회(인간)’의 혼종적 결합, ‘하이브로드’다. 그의 코스모스는 인간/비인간으로 갈라진 두 세계가 아니라, 수많은 결합들의 결합, 세계들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그의 우주에서는 인간만이 아니라, 고양이와 과속방지턱과 바이러스도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행위자들이다. 그의 우주는 인간-비인간을 아우르는 혼종적 ‘행위자의 네트워크(actor–network)’인 것이다. 그리고, 행위자들 사이에 감응하고 상호작용하고 밀고 당기는 ‘정치’와 ‘외교’는 일상적인 일이다. 이제 그의 정치는 인간의 정치를 넘어서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가 된다. 인간과 비인간이 공동으로 또 다른 세계를 구성하고 창안하는 ‘사물들의 정치’, 혹은 ‘코스모스 정치’가 실현된다.

 

르완다 민주녹색당의 지도자이자 의장인 프랭크 하비네자가 7월 13일 총선을 앞두고 키갈리에서 열린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2024.7.13. AFP 연합뉴스

라투르에 따르면, 오늘의 ‘현실정치’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인간’의 관점, ‘경제-생산’의 관점으로만 구성된 외눈박이의 현실이다. 나의 감각으로 다시 말하면, 우리의 현실은 단일하지 않다. 복수(複數)의 ‘현실들’이 공존한다. 닭공장의 현실, 로드킬의 현실, 기후파국의 현실, 출산 거부의 현실, 철도-도로 인프라의 무한 개발의 현실, 지리산 개발 경쟁의 현실 등등이 그것이다. 다양한 존재들 사이, 그리고 그 존재들이 구성하는 수많은 현실들 사이, 정치·외교는 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사물들의 의회’가 절실한 이유다.

 

일제 강점기의 감시대상인물 카드에 들어 있는 안재홍.     나무위키

다사리 정치 : 탈인본주의 정치의 한국적 상상력

‘사물들의 의회’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인간-비인간 공생정치에 대한 상상력이 실재했다. 민족운동가 민세(民世) 안재홍의 ‘다사리 정치’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안재홍(1892-1965)은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이며 언론인, 역사가, 언어학자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과 남조선 과도정부의 민정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6.25에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했다.

나에게 안재홍은 무엇보다 ‘다사리’ 철학을 제창한 심오한 생명사상가이다. 그는 ‘다사리’를 열쇠말로 자신만의 정치철학을 정리했다. 안재홍은 만민공생(萬民共生)·대중개락(大衆皆樂)의 ‘다사리’의 국가를 이상적 목표로 제시했다.

그런데, 이때 ‘다사리’는 인간만의 ‘다사리’가 아니다. ‘다사리’라는 말은 ‘다섯’이라는 숫자에서 왔는데, 안재홍은 다사리를 “모든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을 널리 사랑으로 보살핀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안재홍에게 ‘다사리’는 한국적 정치 형식의 원형이다. ‘다사리’는 “만생(萬生)을 사랑하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이며, “만민공생(萬民共生)의 홍익인간의 정신을 이은 것”이다.

이를테면, 안재홍의 ‘다사리’ 철학은 또 하나의 생명정치사상이다. 안재홍에 따르면, 우리말 ‘비’(비어 있음)와 ‘씨’(씨앗, 생물)와 ‘몬’(물질, 무생물)은 우리나라 고유의 우주기원 및 만물생성의 철학적 원리이다. ‘비’로부터, ‘씨’와 ‘몬’을 통해 만물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특히 ‘비’가 중요하다. 안재홍에 따르면, “‘비’는 ‘비어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허공(虛空) 혹은 본무(本無)이니, 이는 곧 우주만물이 바로 이 비어 있음, 즉 허공에서 생성(生成)하여 출발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사리’는 철학적 원리만이 아니다. ‘다사리’는 만민과 만물을 “다 살게 한다”라는 뜻과 함께, 만민과 만물이 “모두 다 말(씀)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안재홍에 의하면, ‘다사리’는 ‘만민총언(萬民總言)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사리’로서의 정치란, 만민들이 다 ‘사리어(말하게 하여)’ 정치과정에 참여케 하고, 이를 통해 모두가 잘 ‘살도록’ 하는 것이다.

 

1898년 10월에 서울(한성)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종로 집회 광경.   위키백과

어떻게 만민과 만물이 모두 다 말하게 할 것인가?

요컨대, 정치적 원리로서 ‘다사리’란 무엇보다 ‘모두가 말하게 하는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우리는 투표를 통해 말하고, 이른바 ‘언론의 자유’를 통해 말하기를 보장받는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여전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말의 통로와 주제는 권력과 알고리즘에 의해 독점되고 통제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 비인간 존재들이 있다.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만, 인간과 함께 ‘다사리’ 우주를 구성하고 있지만, 인간의 대상으로써 자원(資源)이 될 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동물과 초목들, 바람과 물 그리고 기계들이 그것이다.

생명정치는 권력과 자본을 가진 인간들만이 아닌, 입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는 뭇 생명들이 말할 수 있게 하는 정치이다. 인간만이 아닌, 비인간 존재들이 말하게 하는 정치이다.

그렇다면, 비인간 존재들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1927-1998)에 따르면, 생명체 및 조직체와 같은 ‘자기준거적 체계(self-referential system)’들 사이에는 원초적 소통 불가능성이 존재한다.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없다. 두 체계 사이에 정보의 전달은 불가능하다. 루만에게 소통이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공동의 의미 구성’이다.

루만에 따르면, 그러나 인간은 불통(不通)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언어와 문자, 상징물 등의 다양한 소통 매체를 발명해 소통 능력을 발전시켜왔다. 체계들 사이에는 수많은 소통의 다리가 놓였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다리만이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 사이에도 소통의 다리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집안에서 고양이와 함께 살며, 몸짓과 소리와 같은 신호들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 간단한, 혹은 매우 복잡한 기계언어를 통해 핸드폰과 AI와 같은 기계들과 소통하고 있다.

서로의 속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자아에게 타자는 모두 ‘외계인’이다.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듯이, 우리는 고양이나 나무의 내면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매일매일 고양이와 나무를 관찰하고 경험한 우리는 그들을 ‘대변(대의)’할 수는 있다. 물론 대변을 한다고 해서 그대로 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노동부도 노동조합도 노동자의 마음과 이익을 있는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대변할 수 없다. ‘사물들의 의회’라 하더라도 인간 세상에서 만들어진 이상 인간의 언어가 사용될 수밖에 없다. ‘인간’을 통해 ‘비인간’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고양이와 나무와 기계들의 ‘대변 제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인간 및 비인간 존재들에게 대변은 숙명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숙명 때문에 무궁무궁진한 ‘대변의 기술’, ‘관계의 기술’을 창발할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소통’의 원초적 불가능성은 ‘감응(感應)’의 원초적 가능성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될 수 있다. 그리고, 뭇 생명-물질의 감응의 능력은 ‘소통 가능성’의 원초적 잠재력이다. ‘천지공심(天地公心)’이 그것이다. ‘사물들의 의회’가 개회되기 전 천지공심을 고양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898년 서울 대한문 앞에 태극기를 들고 모인 시위 군중들.  위키백과

‘만물공동회(萬物共同會)’ 한번 해 볼까요?

기존의 정치적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정치가 출현해야 한다. 정치적 실험이 절실하다. ‘만물 공동회’는 어떠한가? ‘만물 공동회’는 ‘사물들의 의회’의 동아시아 버전이기도 하지만, 고대 동아시아의 생명정치의 복원이기도 하다. ‘다사리 정치’의 실제적 구현일 수도 있다. ‘만생 공동회’도 좋고, ‘만물 공동회’도 좋다. ‘만생·만물 공동회’라고 이름 붙여도 괜찮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동학에는 경천(敬天)과 경인(敬人)과 더불어 천지만물을 공경하는 ‘경물(敬物)’의 사상이 있다는 것을. 또한 동학에는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대인접물(待人接物)’의 윤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연원은, ‘다사리’ 철학이 그렇듯이, 풍류도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이다.

또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알려진 홍대용(1731-1783)의 ‘인물균(人物均)’ 사상이 그것이다. 홍대용은 인간과 금수(禽獸)와 초목 사이에는 귀천이 없다고 생각했다. 홍대용은 사람만을 귀하게 여기고 동식물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인간의 자만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과 금수와 초목은 제각각의 ‘예의’가 다를 뿐, 하늘에서 바라보면 사람과 물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18세기 조선의 사상가 홍대용은 이미 만물의 ‘존재론적 평평함’(인물균)과 ‘자기준거’(제각각의 예의)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독립협회의 ‘만민 공동회’를 알고 있다. 그렇다. 오늘 우리는 ‘만민 공동회’ 대신 ‘만물 공동회’를 상상한다. 19세기 말에 열강의 침략에 맞서 잠자는 민중의 목소리를 일깨운 만민 공동회가 있었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21세기에 온 만물의 목소리를 일깨울 ‘만물 공동회’는 어떠한가? 서유럽에 ‘사물들의 의회’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만물 공동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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