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금리 내린다는데…부동산 덫에 걸린 한국금리
미 연준 "9월 금리 인하 논의할 수 있어"
주담대·가계 부채 급증…고환율도 걸림돌
한국은행도 “집값 때문에 금리 못 내려”
부동산 규제 강화하고 대출 조여야 하는데
정부는 효과 없는 주택 공급에만 매달려
미국이 기준금리 다음 달 인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8월 31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기존의 5.25~5.50%로 동결했으나 조만간 인하 여부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둔화하거나 기대 경로에 맞춰 둔화하는 상황에서 경제 성장세가 강하게 유지되고 고용시장이 현 수준에서 유지된다면 금리 인하가 9월 회의 때 테이블 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금리 인하해도 한국은 내리기 힘든 이유
미국의 금리 인하는 우리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벤트다. 우리도 금리를 내려 내수 부진을 타개할 여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경제 원리로만 따지면 그렇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부가 고금리 상황에서도 저리의 정책 자금을 마구 풀고 부동산 규제 완화로 집값을 인위적으로 끌어내리며 최근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 시장이 들썩이고 있어서다.
정부의 이런 정책 헛발질로 주택담보대출이 급증하며 가계 부채도 임계점에 도달한 상태다. 미국이 장기간 고금리 기조를 유지하며 환율 변동성도 커진 상태다. 이럴 때 금리를 내리면 부동산 시장 불안이 가중되고 원화 가치가 급락할 위험이 있다.
미국이 시장이 예상한대로 9월 금리를 내리면 국제 유가나 지정학적 불안 같은 다른 요인이 없다면 원 달러 환율은 안정될 수 있다. 문제는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는 서울과 수도권 집값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까지 내려가면 ‘빚투’ ‘영끌’ 같은 부동산 광풍이 불 수 있다.
정부는 주택 공급을 통해 집값을 잡겠다고 하는데 한참 빗나간 정책이 아닐 수 없다. 공급은 중장기 정책일 뿐이다. 지금은 풀었던 부동산 규제를 돌려놓고 시장에 돈이 더 풀리지 않게 차단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러면서 중장기적으로 공공임대 등 국민 주거 안정에 필요한 주택을 공급하면 된다.
정부와 한국은행 정책 헛발질 주고받기
미국이 기준금리를 내리며 통화정책 전환(피벗)에 나서면 한국은행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집값이 불안한 상황에서 미국을 따라 곧바로 기준금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건 정부가 고금리에도 주택담보대출을 늘려 집값을 띄운 ‘청개구리 정책’을 쓴 탓이 크다.
하지만 한국은행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미국이 금리를 공격적으로 올릴 때 정부 눈치를 보며 금리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과 미국의 금리차가 1년 가까이 역대 최대인 2%포인트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고환율이 장기간 이어지는 현상을 초래했고 물가 안정을 힘들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결국 정부와 한국은행이 잘못된 정책을 주고받으며 우리 경제를 어렵게 만든 셈이다.
한국은행도 이를 인정한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30일 공개한 7월 11일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를 보면 심상치 않은 집값 상승 때문에 금리를 내릴 수 없다는 의견이 개진됐다. 한 금융통화위원은 “주택가격 상승 폭 확대에 따른 금융안정 측면의 위험이 증가했다”며 “금리 인하가 금융시장 불안 요인을 확대하지 않도록 거시건전성 정책과 긴밀히 공조하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위원은 “상당한 경상수지 흑자에도 원 달러 환율이 1300원대 후반에 머무르는 것과 금리 인하가 경제의 구조조정 노력을 되돌리거나 일부 지역의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촉발하는 계기가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7월 금리 동결 발표 후 기자회견에서 “외환시장과 수도권 부동산, 가계 부채 등 앞에서 달려오는 위협 요인이 많아 언제 통화정책을 전환할지는 불확실하고,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며 “한국은행이 유동성을 과도하게 공급한다든지 금리 인하 시점에 대해 잘못된 신호를 줘서 주택가격 상승을 촉발하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상치 않은 서울·수도권 아파트 가격 상승세
서울 집값은 떨어질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1일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한 ‘7월 다섯째주(지난달 29일 기준) 전국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 조사’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매매가는 전주 대비 0.28% 상승하며 19주 연속 오름세를 나타냈다. 전주보다 상승 폭이 줄었으나 선호 지역 아파트 단지는 여전히 강세다. 서울 전셋값도 0.17% 오르며 63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수도권 아파트 가격은 전주 대비 0.16% 상승했다. 지난해 9월 셋째 주 0.17% 오른 이후 45주 만의 가장 큰 상승 폭을 보였다. 서울 집값 급등이 수도권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인위적으로 집값을 띄우는 정책을 펼쳤다. 2022년 세법 개정 때 종합부동산세 세율과 부과 기준을 대촉 낮췄고 다주택자에 대한 세금 중과 기준도 완화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집값 안정을 위해 추진됐던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은 전면 폐기했다. 집 부자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준 이런 정책은 아파트를 사려는 수요를 자극했다.
하지만 집값 상승을 더 부추긴 건 저출산 대책 등으로 내놓은 부동산 금융 프로그램이다. 정부는 지난해 40조 원 규모의 특례보금자리론을 풀었다. 소득 기준 등을 완화해 더 많은 사람이 대출을 받도록 했다. 시중 금리가 높은 가운데 저리의 대출 상품이 나오자 너도나도 은행으로 달려갔다. 올해는 신생아 특례대출로 또 수조 원을 방출했다. 이렇게 풀린 정책 금융 자금은 서울과 수도권 주택 시장에 불을 지폈다. 올해 상반기 신생아 특례대출을 받아 살 수 있는 평형대의 아파트 거래량은 22% 넘게 증가했다.
최근에는 강력한 대출 규제인 2단계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시행 시기를 갑자기 7월에서 9월로 연기했다. 정부는 소상공인 대출과 부채 상황 등을 고려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이 커지자 시행사와 건설업계에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된다. 부동산 시장에 보내는 정부의 이런 잘못된 신호가 집값 불안을 촉발하고 있다.
“정부의 엉뚱한 진단과 처방이 집값 불안 초래”
서울과 수도권 집값이 과도하게 오르자 정부는 3기 신도시에 23만 6000가구 등 대규모 주택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투기 세력이 가세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세우라고 했다. 하지만 공급 대책은 실제 입주까지 최소 3년이 걸리기 때문에 지금의 부동산 시장 과열을 막지 못한다. 대출을 조이고 규제를 강화해야 집값을 잡을 수 있다. 이는 전문가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처방이다.
은행권 가계대출은 올해 상반기 20조 원 넘게 늘어났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배가량 빠른 증가세다. 대부분 주택담보대출이다. 적지 않은 국민이 앞으로 아파트 값이 더 오를 것을 우려해 추격 매수에 나서며 가계대출이 급증한 것이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달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가계대출은 3년 3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이들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7월 말 기준 715조7383억 원으로 한 달 사이 7조 1660억 원 늘었다. 4개월 연속 증가세를 이어갔으며 지난 2021년 4월 이후 월간 증가 폭이 가장 컸다.
정부가 은행에 주택담보대출 자제를 요청하고 있으나 시장 금리가 내려가는 상황이라 대출을 막기엔 역부족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까지 내리면 이런 흐름은 더 거세질 게 뻔하다. 더불어민주당 진성준 정책위의장은 1일 국회 정책조정 회의에서 “윤석열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가 집값 폭등을 부추기고 있다”며 “엉뚱한 진단에 무능한 처방까지 겹쳐 집값 불안이 가중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