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길을 따라 향로봉을 바라보다

한반도 평화 기원하는 「2024 통일걷기」

고성-인제 진부령 구간 도보 여행기

대결의 아픈 현실과 대비되는 절경에 탄성

2024-07-31     최강문 작가, 전 『월간말』 기자

남측의 대북 풍선보내기와 이에 대응해서 북측이 보낸 오물풍선, 다시 남측의 대북선전방송 재개 등 날로 악화되는 남북관계 속에서도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DMZ 평화의 길을 걷는 행사는 예년과 같이 시작되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7월 27일을 기념하여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출발해 파주 임진각까지 걷게 되는 이 행사 중 강원도 고성과 인제를 잇는 진부령 구간의 도보 여행 하루를 조명해본다.

 

통일걷기 진부령 구간 들어가는 참가자들.

기대했던 일출을 볼 수는 없었다. 7월 30일 이른 아침, 간밤의 소나기는 그쳤지만 가랑비가 내렸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흐린 날씨 탓이었다. 지난 주말 북측에 내린 폭우로 압록강 수위가 높아지면서 평안북도 신의주와 의주 일대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착잡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진부령 정상.

해발 520미터 정상 일대에 위치한 진부령미술관과 군부대 사잇길에서 ‘평화의 길 진부령-서화2리’ 구간이라 불리는 총 26.7킬로미터의 도보 여행 구간이 시작된다. 2017년에 시작되어 올해로 8년째에 이르는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2024 통일걷기」의 강원도 인제 구간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구간이다.

진부령미술관 옆 향로봉1초소에서 시작되는 진부령 도보 여행에 앞서 군 당국의 출입허가가 필요하다. 민간인출입통제를 적용받는 구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아직 이 구간을 드나드는 도보 여행객은 많지 않다.

오전 6시 30분, 「통일걷기」를 시작하기 전 진부령 구간을 관할하는 군 부대측과 산림청 관계자의 주의사항 설명이 있었다. 군사시설 사진 촬영을 삼가 줄 것과 철조망 너머로 벗어나지 말 것, 야생 식물을 채취하거나 훼손하지 말 것 등등. 도보 여행이 끝날 때까지의 모든 구간을 군 관계자와의 동행 하에만 진행해야 했다. 구간에는 미확인 지뢰지역도 포함되어 있는 등 여러 위험도 따른다.

 

진부령 구간을 살펴보는 참가자.

이윽고 걷기가 시작되었다. 왼편으로는 군부대 담벼락을, 오른편으로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을 막기 위해 설치한 1.5미터 남짓 높이의 철조망이 죽 펼쳐진 길. 무장한 초소병의 무심한 눈길을 뒤로 한 채 울창한 숲 사이로 접어드는 길.

진부령 구간을 걷는 코스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자갈길과 콘크리트 포장도로, 아스팔트길이 혼재하는 칠섭로 오르막을 두어 시간 땀을 흘리며 올라가면 나타나는 적계삼거리가 바로 선택의 갈림길이다. 칠섭로를 계속 따라 향로봉 정상으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인제군 서화면 서화2리로 향하는 완만한 내리막길로 하산할 것인가. 선택은 자유의지에 따르지 않는다. 향로봉 정상으로 향하려면 이곳 진부령 구간 출입허가와는 별도로, 향로봉 출입허가를 군 당국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이번 「통일걷기」는 향로봉행 일정이 포함되지 못했다. 기후 조건에 따라, 또는 군의 작전 상황에 따라 출입 허가는 변동적이기 마련인데, 최근 날로 경색되어만 가는 남북관계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리라 판단되었다.

비록 향로봉까지 갈 수는 없더라도 십여 명의 참가자들은 흔쾌히 걷기 시작했다. 쉽게 걸어볼 수 없는 길, DMZ에 가까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걷기 구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부령 구간은 향로봉에 대한 관심도 크게 반영되기 마련이다, 비록 갈 순 없을지라도.

향로봉, 멀리 북쪽의 백두산에서 금강산을 거쳐 남쪽의 설악산,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허리’로 불리기도 하는 높이 1,296m의 산.

 

올해 5월 향로봉 강설 관련 뉴스 화면.

사실 향로봉은 한국에서 설악산, 지리산 못지않게 유명한 산이다. 북쪽으로는 금강산이, 동쪽으로는 설악산 대청봉은 물론이고 멀리 화진포와 거진항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여서 한국전쟁 당시 이 일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산의 높이가 3미터 내려앉을 정도로 엄청난 폭격을 받은 적도 있는 향로봉은 최종적으로 남측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과거의 전쟁의 상흔보다 현재진행형의 날씨예보 덕분에 유명세를 타기도 한다. 겨울 매서운 추위가 오면 설악산 대청봉 아니면 향로봉의 기상이 우선 소개된다. 향로봉은 남한에서 가장 추운 지대로 8월 평균기온이 17.5 °C, 2월 평균기온은 무려 영하 14.5 °C라고 한다.

에델바이스로 흔히 알려진 한국 멸종 위기 야생 식물 솜다리꽃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멸종위기종인 날개하늘나리, 금강제비꽃 등의 130여 종의 고산 초본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기는 쉽지 않다. 개체 수가 작기도 하지만, 역시 근본 이유는 군 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파묘

최근 흥행한 영화 「파묘」에서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는 대사로 인해 다시금 관심을 끌기도 했던 산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속 ‘험한 것이 묻혀 있다’는 설정도, 그 ‘험한 것’을 잘못 건드려 동티가 났다는 설정도 모두 허구다. 민통선 내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군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민통선 내에서 농사 짓는 주민들조차도!

두 번의 쉼터를 지나, 칠절봉 중턱을 돌아가는 고갯마루에선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그렇게 두 시간 남짓 땀범벅 속 걸음걸음에 다다른 적계삼거리. 서화2리로 향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백두대간 종주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서는 아쉬움이 터져나왔다.

“칠절봉부터 동굴봉까지 다녀오고 나면 향로봉은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 중에서는 유일하게 남은 구간입니다. 사전 예약을 통해 일부 개방을 한다지만, 여기까지 와서 못가니까 정말 아쉽습니다. 그 유명한 향로봉 비석도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올해 처음으로 「통일걷기」에 참가한 등산 애호가 이정표씨는 향로봉엘 가볼 수 없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백두대간 종주에도 관심이 많은 그에게 ‘닫힌 향로봉’은 분단 현실에 대한 또 한 번의 체감이었다.

그렇다고 실망과 아쉬움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트레일 구간을 포함한 이 일대가 산림청이 지정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꽃과 풀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생태전문가, 야생초 전문가 같은 참가자들이 함께할 때에는!

 

진부령구간에서 만나는 꽃과 풀

향로봉엘 가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참가자들은 길섶의 야생초와 예쁜 꽃에 더욱 환호했다. 그럴 때마다 2017년 첫 「통일걷기」 때부터 단골로 참가해 온 김담 작가가 일일이 꽃과 풀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 건 메꽃, 요건 노루오줌, 참나리, 싸리나무, 누리장나무꽃, 접시꽃에 각시취꽃 그리고 초롱꽃 …”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냐는 옆 사람의 질문에 “꽃들은 무정하나, 인간은 유정하잖아요” 하고 웃어넘겼다. 김담 작가는 2019년에 12박13일의 「통일걷기」에서 느낀 단상을 『윈드 오브 체인지』 책에 담기도 했다.

 

진부령 구간에서 자연생태 탐방 중인 참가자들

생태전문가 최태영 박사도 동참했다. 그 또한 2017년부터 「통일걷기」에 빠지지 않고 개근 참석한 열성 도보 여행 참가자다. 도보 길의 자그마한 물체에 예쁜 나비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서 말했다.

“너구리 똥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나비들이 날아오는 이유는 번식기를 앞두고 미네랄을 섭취해서 화려한 색깔을 내기 위해서지요.”

길을 가다 큼직한 나무 둥지에 웬 사각 물체가 매달려 있는 걸 발견하고선 신나는 목소리로 또 말했다.

“이게 바로 무인센서 야생동물 카메라입니다. 인적이 드문 이 길에 어떤 동물들이 나타나는지를 자동으로 녹화영상으로 남겨주지요.”

「통일걷기」 구간 중 가장 높은 고도를 뽐내기라도 하듯 풍부한 자연환경, 풍부한 이야깃거리에 참가자들은 향로봉엘 못 간 아쉬움을 금세 잊을 법도 했다. 게다가 세월교라 불리는 적계10교에서 적계1교까지 이어지는 맑고 깊은 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길은 ‘감동의 연속’이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한 참가자는 “한국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계곡 풍경을 보았다”고 말할 정도로 모두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서화2리, 맑은 하천과 초록빛 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이날의 「통일걷기」는 끝났다.

 

적계계곡의 빼어난 풍경

하루의 걷기를 마친 한 참가자는 “철책과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바로 DMZ트레일의 매력”이라면서 “비록 대결과 반목의 아픈 역사이기도 하지만, 좀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2017년부터 시작된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통일걷기」의 첫 발은 “통일이 멀어지는 이 시간에 통일이 그저 다가오기를 넋 놓고 기다릴 수 없다”는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의원(서울 구로갑)의 절박한 마음이었다. 첫 행사가 시작되던 당시 남북관계는 북측의 미사일 개발과 핵실험 그리고 한미 군사훈련이 상호작용하면서 대결 일변도로 치닫고 있었고, 이러한 가운데 남과 북의 화해와 평화를 촉구하는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입안되고 추진된 행사가 바로 「통일걷기」인 것이다. 이후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던 때에는 동쪽으로는 통일전망대 북쪽과 중부전선의 철원 백마고지 전적비와 열쇠전망대까지, 서부전선으로는 도라산역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와 통일을 마중나갔던 기억도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생생하다. 2017년 이래 매년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가해 온 이 의원은 진부령 구간 걷기가 이루어진 이날 이렇게 말했다.

“다시 남과 북의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는 지금, 우리 국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평화통일운동이 바로 이런 형태의 걷기가 아닐까요? 통일을 바라는 누구나 「통일걷기」에 참여해서 함께 걷기를 바랍니다. 함께 걸으면서 함께 목소리를 모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4 통일걷기 참석자들. 첫째 줄 중앙이 이인영 의원.

2024년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통일걷기」는 오는 8월 8일 파주 임진각에서 12박13일 간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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