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실·기자단을 없애야 언론이 산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당시의 일이다. 한겨레신문 기자들은 정부 부처에 있는 기자실에 한동안 들어갈 수 없었다. 기존 언론사 기자들이 기자실 출입을 막았고, 공무원들도 뒤에서 동조했다. 나도 바로 전날까지 같은 기자실에서 지내던 동료로부터 ‘출입 금지’ 통보를 받는 비애를 맛봤다.
동료 기자들에 의한 한겨레 기자의 기자실 출입 봉쇄는 대략 수개월 이어졌다. 대통령을 취재하는 청와대 기자실에는 몇 년 동안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권언유착 타파와 권력 감시를 내세운 한겨레신문을 못마땅하게 여긴 권언 합동 공세였던 셈이다.
이 때문에 한겨레신문 기자들은 창간과 함께 본의 아니게 기자단 카르텔과의 싸움에 내몰렸다. 일부 기자실에서는 몸싸움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기자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자실에 출입하는 것을 임의단체에 불과한 기자단이 막을 권한이 없고,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기자실을 사용하겠다고 당당하게 맞섰다.
다행스럽게 한겨레신문 기자들이 기자실에 들어간 뒤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차례로 찾아 먹는 부처의 해외 무료 취재와 촌지가 사라지고, 각사가 조금이나마 기자실 운영비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1991년 11월 1일 자로 보도된 ‘보건사회부 기자단 거액 촌지’ 사건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의 기자실 개혁 투쟁은 거기까지였다. 기자실 진입에만 매달린 나머지 기자실 제도가 갖는 폐해에는 눈을 돌리지 못했다. 한겨레신문의 탄생과 역할을 주제로 일본 도시샤대학에서 ‘한국 저널리즘과 언론민주화운동’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쓴 모리 토모오미 세츠난대 교수는 이 부분을 통렬하게 지적했다. 그는 “한겨레신문은 ‘기자실을 공개해야 한다’라고 일관되게 주장했으나 ‘기자실을 폐지하라’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여기에 기자실 문제에 관한 한겨레신문의 한계가 있다. 한겨레신문도 기자실에 가입한 미디어의 일원이고, 기자실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자실에 대한 본질적인 비판이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기자들이 기자실 입성에 성공하더니 기자실의 기득권세력이 됐다는 말이다.
신문사를 떠나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위치에서 돌아보니, 모리 교수의 말이 백번 맞다. 한국 기자실의 원형인 일본 기자쿠라부의 문제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모리 교수로서는 한국의 가장 진보적인 신문을 자임하는 한겨레신문이 기자실 폐지를 주장하지 않은 점이 매우 의아했을 것이다.
일본 영화 ‘신문기자’의 모델인 ‘도쿄신문’의 모치즈키 이소코 기자의 예는 일본 기자쿠라부와 한국 기자실이 ‘일란성 쌍둥이’임을 잘 보여준다. 모치즈기 기자가 쓴 ‘신문기자’라는 책을 보면, 총리실의 관방장관 정례 기자회견에 참석해 계속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지자 총리실 직원과 총리실 기자쿠라부의 간부들이 합작해 다양한 방해 공작을 펼치는 대목이 나온다. 대통령실이 누구나 궁금해할 문제를 질문하고 보도하는 문화방송 기자를 핍박할 때 침묵과 무시로 그에 동조하는 많은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을 보면서 모치즈키 기자와 일본 총리실 기자쿠라부 기자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겹쳤다.
기자는 기본적으로 혼자서 자유롭게 취재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다. 애초 기자실이나 기자단이라는 집단적 속성은 기자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나마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는 권력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불가피하게 기자실과 기자단이라는 집단이 필요하다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지금은 민주화와 함께 정보통신의 발달로 누구나 자유롭게 부처의 벽을 넘나들며 취재하고 보도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오히려 어떤 사안을 실체에 가깝게 보도하려면 하나의 시각에 얽매이기 쉬운 기자실을 떠나 다양한 시각, 다양한 목소리를 보고 들어야 한다. 검찰 기자실이나 환경부 기자실에 출입도 하지 않으면서 훌륭한 검찰 관련, 4대강 관련 특종기사를 내보내고 있는 ‘뉴스타파’를 보면 이 시대의 기자가 서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기자실은 여전히 권언유착의 장소다. 관 중심의 일방적인 정보가 유통되는 곳이다. 잘 봐줘야 중노동에 지친 ‘기자들의 쉼터’다. 기자들이 기자실에 붙박여 있는 만큼 기사의 신뢰가 떨어진다. 기자실을 떠나야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 기자단을 없애야 언론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