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배 마크롱…유럽의회 선거 참패에 "조기 총선"

"여러분 우려 들었다"며 분출된 민심에 '응답'

총선서 심판받고도 승자 행세 윤석열과 대조

최대 승자는 멜로니, 마크롱‧숄츠 운명과 대조

"극우, 이제 EU 정책에서 주요 플레이어"

중도좌파‧중도 약세, 녹색당은 최대 타격

"엘리제궁에 있는 르 펜 상상은 EU엔 공포"

2024-06-10     이유 에디터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넘어갈 수는 없다. 여러분의 메시지, 여러분의 우려를 들었다. 나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은 채 그것들(여러분의 메시지, 여러분의 우려)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의회 선거에서 참패했다는 예측 결과가 나온 직후인 9일 저녁 이렇게 말한 뒤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참패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9일 TV 연설을 통해 하원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2024. 06.09 [AFP=연합뉴스]

마크롱 '책임 정치'…퇴진 위험에도 조기 총선

총선서 심판받고도 승자 행세 윤석열과 대조

프랑스 출구조사에 따르면,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친유럽연합(EU) 친기업 중도파 르네상스당의 득표율은 15%에도 미치지 못한 반면, 마린 르펜이 이끄는 극우 국민연합(RN)의 득표율은 30%를 넘을 것으로 예측됐다.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지난 6~9일 EU 27개 회원국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는 유럽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자리지만, 각국 집권 세력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도 있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결과는 마크롱 대통령에게 굴욕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현재 극히 불리한 여론을 감안하면 조기 총선은 대통령 조기 퇴진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그런데도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은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서 마크롱의 면모를 엿보게 해준다. 4‧10 총선에서 국민의 혹독한 심판을 받고도 마치 본인이 승자인 양 민심을 외면하고 독선적 국정 운영을 밀어 부치는 윤석열 대통령의 행태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독일 출구조사에 따르면, 숄츠의 사회민주당(SPD)의 득표율은 14.0%를 얻는 데 그쳐 중도우파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 29.5%는 물론 극우 독일대안당(AfD) 16.5%에도 밀려 3위를 할 것으로 예상됐다. AfD는 뇌물 스캔들과 나치 옹호 발언 등으로 유럽의회 정치그룹(교섭단체)인 극우 '정체성과 민주주의(ID)'에서도 퇴출된 곳이어서 숄츠에겐 더욱 참담한 성적표다. 그뿐이 아니다. 숄츠의 '신호등' 연립정부에 속한 녹색당(12%)과 자유민주당(FDP) 등도 참패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에 기민·기사당 연합은 프랑스의 마크롱이 했듯이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를 촉구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맨 가운데)이 포르투갈 포루투에서 포루투갈민주동맹 선거 캠페인에 참석하고 있다. 2024. 06. 06 [AFP=연합뉴스]

중도우파 1위 선전…극우‧강성우파 약진

중도좌파‧중도 약세, 녹색당은 최대 타격

10일 AP, 로이터 통신과 폴리티코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중도우파가 1위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한 가운데 극우와 강성우파가 크게 약진했고, 이에 반해 중도좌파와 중도 자유주의 세력이 약화됐으며, 특히 기후‧환경 의제에 앞장섰던 녹색당 그룹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극우 포퓰리스트 세력의 약진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안보 불안감, 팬데믹, 중동 정세 혼란에 따른 유럽행 난민의 급증, 격화되는 미국-중국 경제전쟁 속에 극심해진 산업 경쟁력 위기와 에너지난, 경제침체 등 유럽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자리 잡고 있다.

유럽의회 제1당인 중도우파 '유럽국민당'(EPP)은 현 176석(25.0%)보다 늘어난 191석(26.53%)을 얻었다. 전체 의석은 720석이다. 이에 따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소속한 EPP는 향후 EU 집행부 구성에서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EPP가 예상보다 선전한 데는 기후‧환경 이슈 등에 대한 '거리'를 두는 등 우향우한 게 주효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제2당인 중도좌파 '사회민주진보동맹'(S&D)은 현 139석(19.7%)에서 4석 줄어든 135석(18.75%), 제3당 격인 중도 '자유당그룹'(Renew Europe)은 현 102석(14.5%)에서 19석 줄어83석(11.53%)에 그칠 것으로 예측됐다. 특히 녹색당-유럽자유동맹(Greens/EFA)은 현재 71석(10.1%)에서 18석이나 줄어든 53석(7.36%)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의 "코흐침머" 레스토랑에서 저녁회동을 하기 전 포옹하는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2023. 06 06 로이터 연합뉴스

최대 승자는 멜로니, 마크롱‧숄츠 운명과 대조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연임 가능성 커

극우와 강성우파 세력은 예상대로 크게 약진했다. 이날 유럽의회가 발표한 각국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인구 규모가 큰 주요국에서 극우를 포함한 우파 계열이 압승하거나 확연한 상승세를 보였다. 강경우파인 유럽보수와개혁(ECR)은 현재 69석(9.8%)에서 71석(9.86%)으로, 극우인 '정체성과 민주주의(ID)'는 49석(7.0%)에서 57석(7.92%)으로 의석이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ECR과 ID 의석 총합은 10석이 늘어난다.

최대 승자는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다. 그가 이끄는 극우 이탈리아형제들(FdI)은 득표율 28.3%로 1위를 차지했다. Fdl은 EU 내 강성우파 정치그룹인 ECR에 속한다. 뒤이어 야당인 중도좌파 민주당(PD)과 오성운동(M5S)이 각각 23.7%, 10.5%를 얻었으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창당한 '포르자 이탈리아'(전진이탈리아)가 10%였다. 이번 승리는 이탈리아 국내 정치뿐 아니라 EU 차원에서도 멜로니의 영향력이 커질 것임을 예고한다. 프랑스의 마크롱이나, 독일의 숄츠의 정치적 운명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나치 옹호발언으로 유럽의회 정치그룹에서 퇴출된 독일의 극우 '독일대안당'(AfD) 지도자와 당원들이  9일유럽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것을 자축하고 있다. 2024. 06.09 [AFP=연합뉴스]

"EU, 나치‧파시스트 정치적 변방에 가둬"

"극우, 이제 EU 정책에서 주요 플레이어"

1위를 지킨 EPP의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이날 오후 "강한 유럽을 위해 중도층에는 여전히 다수가 남아있다"면서 기존 협력 파트너인 중도 및 중도좌파 그룹과 계속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그는 "나의 목표는 친유럽, 친우크라이나, 친법치주의자들과 함께 이 길을 계속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극우‧포퓰리스트 정당들이 약진함에 따라 유럽의회의 정치 지형과 정책에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EPP 자체가 이미 '우향우'를 한데다가 더 강력해진 극우‧포퓰리스트 정당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선거에서 반EU, 반세계화와 함께 이민 제한, 기후‧환경 규제 완화 등을 주장해왔다는 점에서 포용적인 EU의 기존 정책 변화는 어느 정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는 주요국의 권력 이동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줄 공산이 크다. AP에 따르면 지난 2019년 유럽의회 선거 이후 극우‧포퓰리스트 정당들이 헝가리, 슬로바키아, 이탈리아에서 집권했으며, 스웨덴과 핀란드, 조만간 네덜란드를 포함한 일부 나라에선 집권 연합의 일원이 됐다. 나아가 이번 선거는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등의 극우‧포퓰리스트 정당들에 더 힘을 실어 주었다. 통신은 "지난 수십 년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타도에 뿌리를 박아온 EU는 강성 우파를 정치적 변방에 가둬 놓았다"며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강력함을 보여주면서 극우는 이제 이민, 안보, 기후 등의 정책에서 주요 플레이어가 됐다"고 진단했다.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총재가 9일 유럽의회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뒤 당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4. 06. 09 [AP=연합뉴스]

"극우에 휘둘리는 프랑스, EU에 실존적 위협"

"엘리제궁에 있는 르 펜 상상은 EU엔 공포"

EU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국제사회의 시선은 온통 프랑스로 쏠려 있다.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란, 그것도 파리 올림픽을 몇 달 앞둔 채 내린 도박에 가까운 마크롱의 승부수 때문이다. 하원 의회 1차 선거를 오는 30일, 2차 선거를 7월 7일 실시되며, 1차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며, 2차 결선 투표를 치른다.

이번 프랑스 선거 결과를 보면 르 펜의 극우 RN이 마크롱의 중도 르네상스당을 압도할 것으로 보이지만, 폴리티코는 EU 의회 선거 유권자와 프랑스 의회 선거 유권자 구성이 달라서 충분히 해볼 만한 게임이라고 봤다. 폴리티코는 르 펜이 그동안 우크라 지원 기권, 나토 통합사령부에서의 궁극적 탈퇴, 국제주의 반대 등을 외치며 EU의 주요 입법에 반대해왔던 점을 거론한 뒤 "브뤼셀은 극우에 휘둘리는 프랑스를 EU에 대한실존적 위협으로 여기고, '엘리제궁에 있는 르 펜' 상상은 공포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앞으로 5년간 EU를 이끌 새 지도부 구성 작업도 본격화한다. 이를 위해 EU 27개국 정상은 17일 브뤼셀에서 만찬을 겸한 비공식 정상회의 개최한다. 오는 27∼28일 정례 정상회의에서 EU 행정부 수반인 집행위원장 후보를 확정할 것으로 예상되며, 현재로선 폰데어라이엔(65)이 연임할 공산이 크다. 유럽의회 개원식 겸 첫 본회의가 열리는 다음 달 16∼19일 유럽의회 의장과 14명의 부의장단 선출, 상임위원회 구성도 완료된다. 경우에 따라선 집행위원장 인준 투표 가능성도 있다. 새 EU 집행부는 유럽의회에서 인사청문회, 임명 동의 투표를 거쳐 12월 1일 공식 출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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