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쟁‧난민‧경제난 '총체적 위기'…극우 대약진 예고
중도좌파와 중도 자유당은 큰 패배 예상
혼란은 극단주의 세력 확산의 자양분
유럽의회 선거 돌입…5년 임기 720명 선출
이민‧우크라이나 지원 놓고 극우 내 이견
정치 성향 불문 '유럽 안보 강화' 공약
앞으로 5년간 유럽의 정치 지형을 결정할 유럽의회 선거가 시작됐다. 유럽연합(EU) 회원국 27개국은 6일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7일 아일랜드와 체코(8일까지), 8일에는 라트비아, 몰타, 슬로바키아, 이탈리아(9일까지), 9일에는 나머지 20개 회원국에서 진행된다. 이번 선거에는 총 3억7300만 명의 유권자가 참가해 5년 임기의 유럽의회 의원 720명을 선출한다.
유럽의회 선거 돌입…5년 임기 720명 선출
극우 대약진 예고…교섭단체 구성 촉각
선거 결과는 27개 회원국의 투표가 완료되는 9일 오후부터 각 회원국이 차례로 발표하게 된다. 유럽의회는 EU의 입법, 예산안 심의·확정권 등을 지니고 있어 EU 정책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차기 EU 지도부 구성을 결정하며, 그에 따라 회원국의 국내 정치도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선거 결과에 지구촌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유럽의회는 국적이 아닌 정치 이념 중심으로 뭉친 정당 간 연합체인 '정치그룹'이 교섭단체 역할을 한다. 그래서 각국의 선거 결과는 곧 해당 정치그룹이 유럽의회에서 확보할 의석수로 이어진다. 현 유럽의회에는 모두 7개 정치그룹이 있고, 일부 의원은 무소속이다. 각국 의원 수는 인구비례를 따르며, 그 결과 독일 96석, 프랑스 81석, 이탈리아 76석, 스페인 61석, 폴란드 53석 등으로 의석이 할당된다.
우파의 선전은 기정사실에 가깝다. 극우 포퓰리스트 세력이 얼마나 약진하느냐, 이들이 '선전'을 넘어 유럽의회에서 교섭단체 구성에 성공할지가 최대 관심사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주류'로 평가받는 중도 우파와 좌파는 가까스로 현상을 유지하거나 축소되는 반면, 극우와 우파는 크게 약진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중도우파 EPP, 제1당 현상 유지 그칠 듯
중도좌파와 중도 자유당은 큰 패배 예상
4일 여론조사기관인 '유럽 일렉트' 발표에 따르면 강성우파 성향의 '유럽보수와개혁'(ECR)은 지금보다 10석 증가한 79석, 더 극단적인 '정체성과민주주의'(ID)는 무려 20석이 늘어난 69석으로 예상됐다. 이번에 전체 의석이 705석에서 720석으로 늘어난 점을 반영하면 ECR은 9.8%에서 11.0%로, ID는 7.0%에서 9.6%로 비중이 커진다. 이대로라면, ECR은 유럽의회 전체 정치그룹 중 5위권에서 4위권으로, ID는 7위권에서 5위권으로 약진하는 셈이다. 산술적으로만 보면 ECR과 ID가 손 잡으면 제2당 S&D와 맞먹게 돼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다. 그동안 변방을 맴돌던 극우 세력이 중심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될 가능성도 있다.
반면에 유럽의회 제1당 격인 중도우파 '유럽국민당'(EPP)은 이번 선거에서 현 176석(25.0%)과 비슷한 182석(25.2%)을 확보해 현상 유지에 그칠 것으로 예측됐다. EPP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소속된 곳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연임 여부도 결정된다. 또한 제2, 제3당 격인 중도 좌파 '사회민주진보동맹'(S&D)과 중도인 '자유당그룹'(Renew Europe)은 각각 136석(18.9%)과 81석(11.3%)을 얻는 데 그치면서 두 그룹을 합쳐 모두 24석가량 잃을 것으로 예상된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극우‧우파의 대약진이 예상되자, 폰데어라이엔은 얼마 전 TV 토론에서 "친EU, 친우크라이나·반푸틴, 친법치주의 등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면 함께 일할 것"이라고 말해 강성 우파인 이탈리아 멜로니 총리와의 협력 가능성을 시사했고, 이에 대연정을 구성한 중도·좌파 진영은 그 경우 연임을 반대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극우 세력의 대약진을 부채질하는 건 바로 유럽 대륙의 총체적 위기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안보 불안감, 이스라엘의 가자 군사 공격 등 중동 정세 혼란에 따른 유럽행 난민의 급증, 격화되는 미국-중국 경제전쟁 속에 극심해진 산업 경쟁력 위기와 경제난 등 어느 하나 녹록지 않은 사안들이다. 극단주의 세력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혼란을 확산의 자양분으로 삼는다.
유럽, 전쟁‧난민‧경제난 '총체적 위기'
혼란은 극단주의 세력 확산의 자양분
유럽의 극우 및 강성 우파 정당 대다수는 EU의 권력 확대를 저지하는 한편, 이민과 난민, 기후 등 주요 현안에 대한 EU의 정책을 바꾸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망명 신청자 제한을 강화하고, 낙태와 성소수자 권리 보호 등에서 국가 권한의 회복을 도모한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일종의 모델로 삼고 있다.
또한 2035년부터 신규 탄소 배출 차량 판매 금지와 같은 기후 관련 규정도 뒤집고자 한다. 미·중 경쟁이 격렬해지면서 유럽의 성장동력이던 제조업이 위기에 처하자 유럽의 산업 경쟁력 제고가 공통의 키워드가 됐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녹색산업·환경 규제 이슈가 부각됐던 2019년 선거와는 분위기가 달라졌고 무역 보호주의 심화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이들이 특히 주목하는 사안은 난민과 이민 문제다. 극우와 강성 우파인 ID와 ECR은 물론 중도우파인 EPP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더 강경한 이민정책을 주문하고 있다. 특히 8개월째인 이스라엘의 가자 군사 공격으로 인해 중동 전역에 혼란상을 연출하면서 유럽행 난민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이 문제를 핫이슈로 만들었다. 극우 세력에는 호재가 아닐 수 없다.
이를 반영하듯 최근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웨덴 등의 총선에서 이민자, 난민 유입과 일자리·주택 부족 문제를 결부시킨 우파 정당에 대한 젊은 층의 지지율이 두드러지게 높아졌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8일 EU 여론조사기관 유로바로미터 자료를 근거로 젊은 층이 극우 약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15∼24세에서 '이민에 부정적'인 비율이 2019년 32%에서 지난해 35%로 늘었고, 25∼34세도 38%에서 42%로 높아졌다.
이민‧우크라이나 지원 놓고 극우 내 이견
정치 성향 불문 '유럽 안보 강화' 공약
그러나 이민 문제를 놓고 극우와 강성우파 사이에 이견이 표출되고 있다. ECR에 가담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의 '이탈리아형제들'(FdI)은 최근 망명 신청 제한을 완화하는 EU 타협안에 동의했지만,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더 엄격한 안의 채택을 주장하고 있다. 최근 연정 구성에 성공한 네덜란드 극우 자유당(PVV)의 헤이르트 빌더르스 대표는 이날 투표를 마치고 "우리는 이민을 줄이고 망명 규칙과 정책을 강화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3년째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에 많은 과제를 던져 주었다. 러시아발 안보리스크에 대처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하고 있지만,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어서 일반 유럽인 사이에 전쟁 피로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상황이다. 또한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수입이 중단되면서 에너지난과 고물가, 고금리 등으로 민생 경제는 고통을 받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존의 주류 정당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 지원을 지지하고 있지만, 극우와 강성우파 정당들은 우크라이나 지원과 EU 가입을 놓고도 이견을 드러내고 있다.
RN의 마린 르펜이나 멜로니 총리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네덜란드 PVV의 빌더르스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나 최근 소속 의원의 '나치 옹호' 발언으로 ID에서 퇴출된 '독일대안당'(AfD)은 EU의 러시아 제재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자금 지원을 반대한다.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관련해선 멜로니는 지지하지만, 오르반과 르펜은 반대한다.
정치 성향과 관계없이 모두가 유럽 안보 강화를 일제히 내걸었다. 그동안 유럽이 의존해온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집단방위체제에 회의적인 트럼프가 11월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나토 안보동맹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반영됐다. 특히 유럽의 안보 자강론이 화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