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레기론 ②] 4·10 총선과 위기의 저널리즘
'씨알의 소리' 오세훈 편집위원이 2024년 5월호 5.18민주항쟁 44주년 특집호에 쓴 '기레기론' 두 번째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싣는다.
3류언론, 5류정치
22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렇게 명쾌한 결론 앞에서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어려운 용어 쓰며 긴 시간 동안 이러니 저러니 수선떨며 분석할 필요가 없다. 단순하다. 대통령과 그가 요직에 봉한 집권세력의 수뇌부가 지난 2년간 보여준 저질정치가 패인이다. 기분 참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총선과정에서 이 나라 언론이 보여준 ‘활약상’이다. 지난 호에 필자는 ‘기레기論’(1)을 통하여, 우리 언론의 반인간적, 반지성적, 반언론적 행태가 과장없이 사회적 패륜임을 지적하고 질타하였다. 상식인이라면 이 땅의 저널리즘을 더 이상 ‘언론(言論)’이라는 고상한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편치 않을 것이다.
총선기간 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총소요예산 1,000조 원에 달하는 개발계획을 떠벌였다. 이는 소위 ‘민생투어’라는 이름으로 무려 24회나 열렸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이겼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꿈을 말한 것으로 탄핵되었다. 그에 비하면, 윤 대통령의 선거철 행보는 긴 말 필요 없이 탄핵깜이다. 그의 분신이라고 알려진 한동훈 여당 비대위원장은 어땠던가. 그는 “목련꽃이 피는 4월이면 김포는 서울로 편입되어 있을 것”이라며 사기를 쳤다. 초등학교 반장선거에 나온 후보들도 앞뒤 재고 실현 가능한 공약으로 표를 구한다. 5,000만 씨ᄋᆞᆯ들이 속한 나라살림의 책임자들이 하는 말과 행동, 표정과 제스처라고 믿기 힘든 저질정치가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좀비영화처럼 역겨웠다.
두 사람이 마이크 잡을 때마다 그래서 주권자들은 귀를 막거나 실소했다. 온갖 ‘천박한 구라’와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소리와 심하게 우려되는 이상행동을 이어갔다. 그저 악질적인 소음이고 난동이었다. 이는 분명히 자해인데, 그들은 그토록 심하게 자해를 하면서도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특이증상의 중환자들이었다. 평생 공무원으로 살아온 자들의 기이한 작태를 보면서 우리 씨ᄋᆞᆯ들은 “이것들의 몸과 마음 속에는 공인으로서의 기본 소양과 최소한의 윤리가 첨부터 아예 없었구나!” 하며 자탄하였다.
이 나라 기자들 가운데 윤과 한의 이 비정상 망언망동 행각을 목격하며 그 누구 하나 “이 사람들, 지금 제 정신인가. 이거 정말 큰일 나겠구나” 하면서 심각하게 묻거나 따지며 문제삼고, 파고들어 판이 올바르게 돌아가도록 하는 직업정신을 발휘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매체라면, 그들이 마구 발설하는 개발계획들마다 정부의 어느 부서에서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논의한 실무자 회의자료라도 있는가를 확인해야 했다. 그 천문학적인 숫자들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를 검증했어야 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내 기억으로는, 그 정도의 진지한 문제의식으로 접근한 매체도 없고 기자도 없었다.
지역별로 득표에 도움될 발전구상과 숙원사업들을 졸속으로 제목만 뽑아 무책임한 숫자와 함께 토해냈을 것이다.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은 프로그램에 없었다. 보나 안 보나, 구체적인 내용을 물어오면 답변할 능력도 없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눈에는 그들이 전국을 떠도는 ‘2인조 떴다방 사기집단’으로 보였던 것이다. 기자들은 그 야바위판을 강력한 풀무질로 고조시켰다. 탁월한 바람잡이였다. 동업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친다면 이 세상에 그 이상은 없을 것이다.
‘저널리즘 선언’
남들 보기에 번듯한 언론사 소속의 명함을 들고 다니지만, 그의 정신은 기자의 것이 아니었다. 출입처가 대통령실이면, 그곳 부하직원의 자세다. 그들은 ‘대통령실 출입기자’라는 처지를 상당한 프라이드로 여긴다고 한다. 그 점 이해할 수도 있으나, 나는 그들 가운데 일부라도 적어도 하루에 한 번쯤은 지금처럼 그렇게 불가사의하게, 실은 모욕적으로 흘러가는 청춘의 시간에 대하여 서글픔과 부끄러움, 또는 참기 힘든 불편함을 느끼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인간은 없을까, 상상해본다. “아, 내 인생아, 참으로 누추하구나. 불쌍한지고……정말 쏴버리고 싶다!!!” 언젠가 인연이 된다면, “그때 그는 좀 달랐다”고 편들어줄 수 있겠다.
총선기간 중에, 영미 저널리즘 학자 셋이서 쓴 《저널리즘 선언》(바비 젤리저, 파블로 J. 보즈코브스키, 크리스 W. 앤더슨 공저)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들은 미국과 영국 대학의 저널리즘 &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들이다. 매우 흥미진진하다. 제목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본떠서 지었다고 한다. 전공자뿐만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품위와 향방에 대해 관심 있는 무명의 시민들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의 독후감 1번이다.
책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기존의 저널리즘은 이제 사실상 수명을 다했다는 선언이다. 실은 개혁이냐, 혁명이냐의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 중 한 방향을 택하여 거듭나는 외길만 남았다는 것이다. 입법 사법 행정에 이어 긴 세월 동안 제4부 권력의 위상에서 나름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권위를 유지해온 저널리즘이, 최근 결정적으로 미국에서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급격하게 균열이 일더니 마침내 막다른 골목(the dead end)에 다다른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에게 불리한 뉴스를 가차없이 ‘가짜뉴스’로 단정한다. 이 ‘초간편주의 정치’는 유례없는 현상이다. 트럼프가 창조한 정치기술이다.
이 ‘신기술’은 온 세상을 삽시간에 덮었다. 날이 갈수록 심화일로에 있는 SNS 시대는 ‘가짜뉴스’와 ‘가짜뉴스라고 공격당하는 뉴스’와 ‘가짜뉴스가 진짜뉴스로 둔갑한 뉴스’의 플랫폼이며 서식지다. 그 위에서 굴러가는 세상은 본질을 규명하는 노력을 불필요하거나 그에 준하는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천박함은 역설적으로 철학의 비중을 높여줄 것이다. 그 점에서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 저자들이 한국의 ‘기레기’라는 특별한 개념을 미리 알았더라면, 책의 내용이 훨씬 더 풍성해지고, ‘선언’의 취지와 효과 역시 훨씬 더 강력한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다. 매우 아쉬웠다. 예를 들어, 윤석열과 한동훈 등속의 해괴망측한 정상배들은 그 듬직하지 못한 무대 위에 거하면서 그 덕택으로 아슬아슬하게 수명을 연장해가는 괴물들이다. 그들의 우산을 쓰고 정치를 하는 세력들 또한 큰 차이가 없다. 과분한 명함을 들고 거들먹거리며 우왕좌왕하고 있는 각계각층의 리더들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인종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매체들이 출입처에서 취재한 정보들을 신속하고 엄격한 기사화 과정을 거쳐 뉴스로 내보낼 때, 전통적인 저널리즘은 일반 독자나 시청자들ㅡ정치적으로는 유권자들ㅡ을 타깃으로 해왔다. 책은 그 규범은 이미 깨졌으며, 이 시대의 매체들은 뉴스를 일반 수용자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정부나 기업 등 유력한 정보제공자(취재원)에게 보내고 있음을 지적한다. 매체의 입장에서 이제 저널리즘은 대중을 소외시킨다는 거다. 본질은 구조화된 천대요 멸시다. 계급사회는 영생불멸의 제도다. 이 풍토는 정치권력의 필요에 의해 주권자인 시민들을 동원하는 작업을 수월하게 해준다. 그래서 동업관계가 끈끈할 수밖에 없다. 이같은 구조적 이유로 정보의 획득과 향유에서도 빈부귀천의 차이가 똑같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차별은 당연히 계승된다. 개천의 용은 멸종한 지 오래다.
전문가들이 흔히 인용하는 스웨덴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와 영국의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보고내용ㅡ한국이 세계 최하위라는ㅡ보다, 우리 시민들이 이 땅에서 매일매시 피부로 느끼는 민주주의와 언론자유 체감지수가 훨씬 더 실질적이지 않은가. 오늘의 우리 언론은 특히 세상의 기대와 동떨어진 내용과 행위로 일관하며, 수용자(신문의 독자와 방송의 시청자)의 외면을 받은 지 오래 되었다. 이는 정치권력이 주권자인 시민들이 바라는 정치는 하지 않고ㅡ실은 못하고ㅡ저질정치로 일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무시당하는 현상과 항상 맥을 같이 한다.
2천 년짜리 지혜들
격화소양(隔靴搔癢)이라는 말이 있다. 발바닥 어딘가가 가려우면 신발을 벗고 그곳을 정확히 긁어야 한다. 오늘의 언론과 정치는 두터운 신발을 신은 채 가려운 곳을 긁고 있는 꼴이다. 두양소근(頭痒掻根)이란 말도 있다. 머리가 가려운데 발뒤꿈치를 긁는다는 말이다. 견문발검(見蚊拔劍)이란 말도 있다. 모기 보고 칼을 뽑는다는 말이다. 이 기막힌 통찰과 절묘한 뜻을 담은 고사성어들은 2천 년 넘은 큰 지혜들이다. 그 모두 오늘의 시시하고 우스운, 말하자면 망국적인 저널리즘과 정치를, 그 야합(野合)을 규탄(糾彈)하고 있다.
오늘 이 세상의 저널리즘과 정치는, 특히 이 나라 언론과 정치는 신발 신은 채 발바닥을 긁는다. 머리가 가려운데 발뒤꿈치를 긁는다. 모기를 보고 칼을 뽑아 달려든다. 더 나아가 이 미친 작태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다. 뿐만 아니라, 도대체 뭣이 그렇게 문제냐며 드잡이하려고 달려든다. 그처럼 거칠고 사나운 난동이 반복되고 지속된다. 마침내 협력자들조차 입을 다문다. 말문이 막힌 씨ᄋᆞᆯ들과 귀를 닫은 지배자들 사이에 공감과 평화, 이해와 우호는 없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두 견인집단이 수용자이며 주권자인 시민들과 물과 기름처럼 함께 하지 못하고 이렇게 따로 굴러가다가 어느 날 망국의 벼랑에 서게 된다. 외통수다.
최근 4·10 총선결과는 그렇게 하여 천길 절벽에 선 주권자들이 저질언론과 더러운 정치를 한꺼번에 몰아서 손본 쾌거였다. 천만다행이다. 나는 벗들과 함께 축하의 막걸리판을 벌였다. 취기에 편승하여 “이 나라는 인류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범이 될만큼 높은 국격을 회복할 운명인가 보다” 하며 흐뭇해했다. 그렇게 안도하고 있는데, 문제는 패인(敗因)의 9할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 민의를 무시하고 반성도 없고 변화도 없이 오던 길을 그대로 가겠다고 한다. 실로 오만한 자세다. 겁 먹은 짐승이 부리는 허세로 보인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다. 사마귀가 수레에 덤빈다는 말이다. 제나라 장왕(莊公)이 행차 나가는데, 왕의 수레 앞에 사마귀 한 마리가 날카로운 앞발을 들고 서서 물러서지 않았다. 사마귀는 원래 융통성이 없어 뒤로 물러나거나 옆으로 피할 줄을 모른다. 왕은 그 용맹스런 사마귀에게 특별한 소회와 함께 경의를 표하고 돌아서 지나갔다고 한다. 지금 이 시간, 이 땅의 씨ᄋᆞᆯ들은 죽창을 들고 들불처럼 적에게 달려들던 조상들의 마음이다. 그 불가슴을 다스리고 다스리고 또 다스려 평화적으로 전진하는 행렬이다. 그 앞에 사마귀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