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환율개입 뒤에도 멈추지 않는 엔 매도 투기

5조 엔 개입 뒤 1달러=154.40, 다시 157엔대로

개입 효과 한정적, 엔 매도세 더 부추길 가능성

당국 개입 유무에 입닫고 시장과 심리전

일본정부 추가 개입 여력은 최대40조 엔 정도

2024-05-01     한승동 에디터
29일 일본 도쿄의 한 외환 시세판 모니터에 엔·달러 환율이 표시되고 있다. 이날 엔화 가치는 달러당 160엔까지 떨어지면서 1990년 4월 이후 3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2024.04.29. AP 교도 연합뉴스

지난 달 29일 엔 시세가 외환시장에서 한때 1달러=160엔대까지 떨어지면서 일본정부와 일본은행이 5조엔 규모의 엔 매입 시장개입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5월 1일 외환시장에서 시장개입 뒤에도 여전히 이익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투기세력의 엔 매도세가 멈추지 않고 있다. 시장 관계자들의 관심은 일본 재무성이 어느 정도의 시장(환율)개입 여력을 갖고 있느냐에 쏠리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와 시장은 추가 개입 여부를 놓고 서로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팽팽한 수읽기 긴장 속에 공방전을 이어가고 있다.

5조 엔 개입 뒤 1달러=154.40에서 다시 157엔대로

1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엔 시세는 이날 외환시장에서 한때 1달러=157엔대 후반에서 거래됐다. 지난 29일 (일본은행의 시장개입 뒤) 1달러=154.40엔까지 올라갔던 엔 시세가 다시 3엔 이상 떨어진 것이다. 일본정부와 일본은행이 5조 엔 규모로 시장개입을 단행했다는 관측이 나온 뒤에도 정부의 개입 자세를 시험하듯 엔 매도 움직임은 멈추지 않고 있다.

이번에 단행된 것으로 알려진 시장개입 규모 5조 엔은 지난 2022년 10월 21일에 단행한 사상최대의 엔 매입 시장개입액 5조 6천억 엔에 필적하는 규모다. 이처럼 막대한 규모를 투입해서 엔을 사들였는데도 엔 시세는 1달러=154.40엔까지 올랐다가 1일 다시 157엔대로 주저앉았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30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취재진을 만나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기시다 총리가 이끄는 집권 자민당은 지난 28일 치러진 중의원 보궐선거에서 전패하며 위기에 몰렸다. 2024.04.30. AP 교도 연합뉴스

개입 효과 한정적,엔 매도세 더 부추길 가능성

이는 일본은행의 지난 25일 금융정책결정회의의 결과 공표 전에 엔 매도 달러 매입 쪽으로 움직인 시장 참가자들이 개입 뒤에도 기본적으로 엔 매도를 통해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투기세력이 엔 매도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수준까지 엔 시세를 끌어올리지 못해, 여전히 엔을 팔기 쉬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행에서 시장개입 실무경험을 한 적이 있는 후쿠오카 파이낸셜 그룹의 사사키 도루 전략팀장은 “5조엔이라는 규모로도 엔 시세를 밀어올리기는 한정적이어서, 개입은 효과가 없다는 인식을 줘서 엔 매도세가 (더) 강해질 것이라는 불안을 느끼게 한 내용이었다”고 지적했다.(<닛케이> 5월 1일)

당국 개입 유무에 입닫고 시장과 심리전

2022년과 이번 시장개입에서 공통점은 개입을 실행한 일본은행에 개입을 지시한 재무성의 태도다. 간다 마사토 재무성 재무관은 개입 실시 유무에 대해 확언하기를 계속 피하고 있다. 시장이 당국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없어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개입 유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면 대규모의 엔 매입 주문이 들어갔을 때 그것을 개입한 것으로 오인하고 엔을 다시 사들이도록 유인할 수 있다. 그런 속내가 읽힌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 3월 19일 도쿄의 일본은행 본부에서 정책회의 뒤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2024.3.19. 로이터 연합뉴스

일본정부 추가 개입 여력은 최대40조 엔 정도

‘엔 매도 개입’과는 달리, 엔을 사들이기 위해서는 밑천이 되는 달러가 필요하다. 밑천이 될 일본정부 보유 ‘외환 준비’금은 지난 3월 말 시점에 1조 2900억 달러(약 200조 엔)에 이른다. 다만 이 모든 돈을 곧바로 개입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중에서 개입에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규모가 얼마나 될지 시장 참가자들 사이에서 열띤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3월 말 현재 일본정부는 1550억 달러의 외환예금을 보유했다. SMBC닛코증권의 스에자와 히데노리 금융재정 애널리스트는 “매각 가능한 증권은 2000억 달러 정도고, 예금과 합쳐도 3000억 달러 정도가 단기적인 상한”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뱅크 오브 아메리카도 마찬가지로 “2024년의 상한을 3000억 달러(약 47조 엔) 전후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더 적게는 “약 30조 엔의 여력이 있다는 인상”(다이와증권 다다이데 겐타 수석 외환전략가)이라는 시각도 있다.

보유 외환 전부를 앞으로의 시장개입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번 개입과 같은 정도의 규모(5조 엔)라면 앞으로 개입에 쓸 수 있는 남은 실탄은 최대 8발(40조 엔) 정도라는 시각이 많다.

남은 실탄이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정부와 일본은행은 효과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시간대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29일의 ‘개입’으로 엔 시세가 가장 높이 올라간 것은 오후 1시나 오후 4시 등 유럽세가 참가하기 빠듯한, 거래가 적은 시간대였다. 원래 29일은 일본의 공휴일로 시장 참가자가 적고 거래가 평소보다 적은 타이밍이었다.

2022년 9~10월의 개입도 엔이 급등한 타이밍은 각기 오후 5시, 오후 11시, 오전 8시로, 도쿄시장의 주요한 거래시간대를 피한 시각들이었다.

일본 국내세는 수입기업과 기관투자가 등의 달러 실수요가 탄탄해서 개입에 나서더라도 엔 시세를 밀어올리는 효과는 한정될 수 있다.

3일이나 6일 추가개입 가능성

유동성이 떨어지는 타이밍은 엔 약세 방향에도 시세 차이가 나기 쉽고, 급변동을 이유로 한 개입에 나서기 쉬운 면도 있다. 추가개입으로 움직인다면, 대형 연휴 후반에 해외시장의 거래가 있는 5월 3일이나 6일이 초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3일은 4월의 미국 고용통계 등 중요한 경제지표가 공표되는 날이기도 하다.

주요 20개 국가・지역(G20)과 주요 7개국(G7)의 국제협조 체제에서 환율개입은 환율을 특정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세 변동을 고르게 할 목적의 ‘스무딩(smoothing) 개입’으로 한정된다. 이후로도 시세를 밀어올리는 개입보다는 엔 약세 진행을 막는 개입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즈호 증권의 야마모토 마사후미 수석 환전략가는 “엔 시세를 밀어올리는 효과가 약해져서, 다음은 더 대규모의 환율개입이 필요해질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남은 실탄이 줄어든 것을 시장이 간파하면 엔 매도 투기가 강해질 위험도 있다. 1년 반만에 일본정부가 ‘개입’에 나섬으로써 시장과의 심리전은 다음 단계로 옮겨 가고 있다.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