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노동 탄압의 나라, 미국
지난 12월 1일, 의회는 정부의 요청을 수용해 철도노조의 파업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미국 이야기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업무중단 금지령’을 내린 것. 철도노조의 핵심 요구사항은 임금인상보다 유급병가였다. 고작 7일의 유급병가. 철도기업들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예: 2021년 영업이익이 매출액의 무려 41%) 이런 정도의 사안조차 기업, 정부, 의회는 풀지 못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몇 달 동안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국가경제에 미칠 폐해가 심각하다며 파업을 중단시킬 방도를 찾아다녔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감행하는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위험한 노동환경, 부당한 처우,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 등.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삶의 질을 추락시키는 환경개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간단명료한 요구사항을 제대로 해결치 못하는 경영자들, 노동자의 요구를 정치적 선동으로 몰아붙이는 여론매체들, 노동자들의 파업에 거의 예외 없이 자본가 편에 서서 개입하는 정부는 오히려 파업사태를 악화시키는 주범들이다. 노동운동을 둘러싼 이 같은 정황은 시대에 따라 양상이 다를 뿐 자본주의 국가 어디서나 유사하다.
미국 철도에는 긴 노동탄압의 역사가 서려있다. 그 역사는 또 미국이 가장 잔혹한 노동탄압 국가 중 하나였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19세기 후반 이래 최근까지 근 150여 년 동안, 미국에서 벌어진 대규모 파업사태 10번 중 3번은 철도 분야에서 벌어졌다. 1886년 남부철도, 1894년 시카고 풀맨, 1922년 전국 철도노조 대파업. 그러자 미국 의회는 1926년 철도파업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철도노동법’을 만들었다. 이번 파업에 정부와 의회가 개입한 것도 이 법에 의거한 것이다.
1870년대부터 미국은 동부를 넘어 서부와 남부까지 철도 교통망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거의 동시에 인수합병을 통한 철도 대기업 시대가 열린다. 철도노조도 전국 곳곳에 설립되고 노동운동이 본격화된다. 당시 미국은 강도 자본가(robber baron)의 시대였다.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기업은 노동자들을 철저하게 착취했다. 잦은 파업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철도 산업에서 벌어진 파업 중 1894년 풀맨 파업은 단일 기업에서 시작해 철도 노동자 전체로 확산된 최초의 연대파업이었고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유혈사태로 미국 노동운동사에 기록을 남긴다.
풀맨은 당시 미국 최대의 철도차량 제작기업이었다. 1894년 5월 시카고 객차 공장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경기불황을 이유로 회사는 수백 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고 남은 직원들의 임금도 30%나 삭감했다. 반면 회사가 노동자에게 임대하는 종업원 주택 월세와 회사 점포의 상품 가격은 그대로 유지했다. 불만에 찬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이후 상급단체인 미국철도노조에서 연대 파업을 전개했다. 풀맨 철도차량을 철도노선에 연결해주지 않은 것이다. 공장이 있는 시카고부터 서부 해안까지 27개 주의 철도교통, 물류유통이 중단되었다. 첫날엔 5000명이었지만 연대 파업이 개시되면서 다음 날엔 4만 명, 세 번째 날엔 10만 명, 그리고 6월 30일이 되자 파업 노동자의 수는 13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공장 건물이 부서지거나 화재가 발생한 것은 물론, 기관차가 전복되면서 정부의 우편물 열차도 뒤집어졌다. 풀맨은 물론 시카고 철도와 유관 기업들은 연방정부에 파업 강제진압을 요청했다. 정부는 법원에 파업 중지명령을 요청했다. 법원은 노조가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며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일리노이 주지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대를 투입했다. 6천 명의 군인, 3천 명의 경찰, 5천 명의 연방경찰이 시카고로 몰려왔다. 결국 군이 발포하면서 30명 이상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군대와 노동자 간의 대결은 격렬해졌다. 공장은 바리케이드와 전복된 차량들로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강제진압으로 파업은 종료되었다. 7월 20일 군은 철수했고, 풀맨 공장은 8월 2일 다시 문을 열었다. 풀맨은 재고용을 원하는 노동자에게 다시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냈다. 당시에는 이런 노동현장이 비일비재했고 노동자들은 피로 얼룩진 투쟁과 고난의 행군을 이어갔다. 회사의 경비용역, 민병대는 물론 군과 경찰까지 노조의 단체행동을 탄압하기 위해 수시로 동원되었고 정부는 온갖 방식으로 파업사태에 개입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로 내몰리고 총에 맞아 죽는 비극이 끊이지 않았다. 폭력적 노동탄압은 뉴딜 개혁조처가 자리를 잡고 2차대전 이후가 돼서야 비로소 크게 줄어들었다. 대신 노동 관련법이 폭력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올 들어 철도노조는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예고했었다. 몇 달의 협상기간이 지나도록 바이든 정부는 사태를 해결치 못했다. 결국 바이든은 의회와 함께 노조의 단체행동을 막아버렸다. ‘자랑스런 친노동 대통령’임을 천명했었던 바이든과 민주당은 노동자들을 배신했다. 노동자 계급은 민주당의 가장 든든한 지지집단이다. 그런데 11월 중간선거가 끝나자마자 바이든은 그들의 등에 칼을 꽂았다. 노조는 다가오는 2년 뒤 선거에서 민주당에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풀맨 파업이 있었던 그해 선거에서 민주당은 상하 양원에서 모두 소수당으로 전락했다. 2년 후 대선에서는 대통령마저 공화당으로 넘어갔다.
미국 법무부는 1969년 노동탄압 100년의 역사를 담은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는 그 100년의 역사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미국은 다른 어느 산업국가보다 잔혹하고 폭력적인 노동탄압의 경력을 가진 나라이다.’ 폭력의 역사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