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기레기' 등의 표현은 피했으면 하는 이유
권력과 유착해 기득권 카르텔의 일부가 된 언론
족벌언론과 주류언론 향한 정당한 분노에 공감
그러나 기레기 등의 모욕과 조롱은 역효과 우려
문제는 개별 기자보다 사주, 데스크와 언론 구조
기자들도 반발보다 자기 성찰하고 함께 노력해야
그동안 필자는 시민언론 민들레 지면에 조선일보를 비롯한 족벌언론들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들을 자주 써 왔고, 가끔은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대한 실망과 아쉬움에서 비롯한 강한 쓴소리도 많이 해 왔다. 그러면서 댓글들을 보면 많은 사람이 “기레기” 등의 표현을 하면서 강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을 거듭해서 목격하게 된다.
물론, 한국의 족벌언론과 주류언론(레거시 미디어)들에 문제가 많고 이것이 언론에 대한 대중적 신뢰도를 바닥으로 끌어 내려왔다는 것은 오랜 기간 온갖 사실들로 확인돼 왔다. 주류언론의 문제들이 낳는 수많은 폐해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고 수많은 이들이 심각한 고통을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주류언론, 특히 족벌언론들에 대한 많은 이들의 불만과 분노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그것은 정당한 분노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전에 조선일보를 비판한 글마저도 이적표현물이라고 검찰에 기소당해서 감옥에도 갔다 온 적이 있는 경험의 당사자로서 더욱 그렇다.
그동안 윤석열 정부와 주요 인사, 정부의 정책과 방향에 대한 족벌언론들의 철저히 편향적인 뻔뻔스럽고 낯간지러운 보도를 보면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목놓아 외치던 이들이 내로남불의 초절정을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많은 부분, 오늘날 사회에서 주류언론의 위치와 구실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도 결국 이윤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는 기업이고 자본이다. 한국에서 주요 언론들은 족벌 가문의 소유이거나 건설, 금융자본들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기성체제의 핵심 질서를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기득권 카르텔의 이익을 대변하기 쉽다.
더구나 ‘자유민주주의’에서 ‘동의와 설득을 통한 지배’에서 언론의 구실은 핵심적이다. 그래서 언론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지배기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이것은 검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와의 협력과 유착을 낳기 마련이다. 더불어 주류언론의 구성원들은 대개 이 사회의 엘리트들로서 특권 의식과 시각, 관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한겨레와 경향 같은 ‘진보’(개혁)언론들은 이런 족벌언론들과 분명 다르지만, 중요한 국면에서는 결국 족벌언론들이 짜놓은 프레임을 따라가면서 갈수록 그 차별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큰 실망을 낳아 왔다. 조국몰이와 윤미향 마녀사냥, 추미애 몰아내기, 이재명 죽이기, 최근 민주당 ‘비명횡사’ 공천 논란 등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언론 피해자들을 외면하면서 (‘자율 개혁’을 주장하며) 언론 개혁을 반대하고 가로막는 데서도 족벌언론만이 아니라 ‘진보’언론과 주요 언론 관련 단체들까지 거의 대동단결이 이뤄지는 양상이었다. 문재인 정부 때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둘러싼 찬반 논란에서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이토록 바닥을 뚫고 내려가는 상황에서, 오히려 언론과 그 구성원들이 스스로 성찰하며 더 앞장서 개혁을 추진해도 모자란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주류언론과 그 구성원들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갈수록 커지고, 강한 비판적 목소리를 넘어서 그런 지나친 표현들까지 나오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언론 종사자들을 ‘기레기’, ‘언레기’ 등으로 매도하고 모욕주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더구나 개별적 기자 등에 대해서 비판을 넘어 인신공격적 막말과 욕설 등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가 않다. 물론 이것은 언론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 중에서 극히 일부가 보이는 태도이겠지만 말이다.
그런 태도를 보이는 분들은 아마도 ‘족벌언론과 주류언론들이 보여 온 기막힌 행태들을 돌아보라. 그것을 주도한 기자들이 그동안 함부로 낙인찍고, 편견을 부채질하고, 조롱과 혐오를 부추겨서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당해 온 피해자들을 보라. 예컨대 조국 가족과 윤미향 가족이 겪은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칼에 맞아 죽을 위기를 넘은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아직도 계속 낙인찍기와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것은 반박하기 어려운 사실이고, 그것이 낳은 피해의 정도는 지금 일부 언론과 기자들이 겪고 있는 불편함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고 정말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런 언론과 기자들의 잘못된 행태를 그 반대편에서 대상만 바꿔서 (아무리 소규모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따라 하는 것을 정당화해 줄 수는 없다.
첫째. 혐오, 모욕, 조롱으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그 대상이 누구이든, 그것이 대규모이든 소규모이든 적절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너도 그만큼 당해봐라’는 대응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우리 모두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누구도 그런 괴롭힘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은 일관돼야 한다.
둘째, 지금 주류언론들이 나타내는 문제들의 원인과 책임은 일선의 말단 기자들 보다는 구조적인 것에 있고 언론사의 사주, 대주주, 데스크와 고위 임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단 기자들을 비난하고 모욕하기보다는 진짜 고위 책임자들을 분명히 겨냥해서 더 정면으로 강력하게 비판하고 책임을 묻는 게 더 필요한 일이다.
셋째, 혐오성 멸칭의 사용과 조롱성 비난은 말단의 일선 기자들의 반성과 성찰보다는 심정적 반발 속에 오히려 그들이 언론 개혁의 반대 세력의 편으로 더욱더 밀착해 가도록 내치는 역효과를 불러오기 쉽다. 이것은 언론 개혁 운동 진영의 힘을 키우고 세력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지가 않다.
물론, 많은 이들이 언론 피해자들에 대한 커다란 공감, 언론 개혁에 대한 강력한 열망 속에서 일부 과도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더구나 이에 대한 많은 언론과 구성원들의 반응도 씁쓸하다. 댓글을 차단하고, 고소와 고발을 하거나, 언론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몰상식한 집단으로 몰아버리는 식으로 대응하곤 한다(검찰 개혁 지지자들을 모조리 ‘개딸’로 낙인찍고 비이성적 팬덤으로 몰아가듯이).
그러기 전에, 먼저 언론과 기자들이 그동안 함부로 낙인찍고, 편견을 부채질하고, 조롱과 혐오를 부추겨서, 기사와 댓글의 소용돌이 속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당해 온 피해자들의 고통을 돌아보면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살펴보고 개선 노력을 약속했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좌표 찍히고 매도를 당해보니, 그동안 우리에게 그런 괴롭힘을 당해 온 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가 가고 공감하겠다’며 말이다. 그런 것이 선행되지 않기에 언론과 기자들의 이런 반응은 ‘내로남불과 선택적 공감’이라는 냉소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 같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개별 기자들을 ‘기레기’ 등의 심한 표현으로 매도하고 모욕주고 조롱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러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추가하자면, 그것이 진실과 정의를 쫓는 정말 훌륭한 기자들까지 도매금으로 묶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시대에 정말 보기 싫고 욕 나오는 기사와 보도들이 넘쳐나는 속에서도 너무나 소중하고 그래서 더욱 빛나는 기사와 보도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침묵할 때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단을 보도했던 민들레 기자들이 있었고, 정영학 녹취록과 검찰 수사기록 5만 쪽을 눈병이 날 정도로 몇 번이나 읽고서 대장동의 진실을 보도한 봉지욱 기자가 있었다.
김건희 주가조작과 검찰 법인카드 유용의 진실을 밝혀낸 뉴스타파 기자들이 있었고, 검찰의 디지털 캐비닛과 불법 사찰을 밝혀낸 뉴스버스 기자들이 있었다. 채 상병의 진실을 위해 이종섭 ‘도주대사’를 비행기까지 따라 타고 호주까지 쫓아간 MBC 기자들이 있었다. 이런 기자들의 용기는 우리가 윤석열 시대를 버티고 이겨낼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기자들이 고립된다면 날뛰는 코끼리에게 앞장서 창을 던졌다가 짓밟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 다른 언론사와 기자들도 언론 장악하려는 윤석열 정부, 광고주와 포털이 강요하는 클릭 경쟁, 출입처와 기자단을 벗어나서 좀 더 용기를 내고 함께한다면 방안의 모든 도자기를 부수는 코끼리의 난동을 멈추는 데 성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