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거리 좁힌 중국 원작 미스터리 SF 영화 ‘삼체’

유물론에 반하는 작품을 중국이 허용한 이유

2024-03-24     오동진 영화평론가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오동진 영화 평론가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중국과 서구세계가 그다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호적이고 협력적이다. 특히 영국이 그렇다. 심지어 미국도 중국과 상호 이해를 같이 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현실과 매우 달라 보이고, 현실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현실의 국제정치가 잘못 가고 있다고 우회적으로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넷플릭스의 ‘어매이징’한 8부작 드라마 ‘삼체’는 중국의 고전적 사상(당대의 유물론이 아니라)과 서구의 합리적 이성이 오히려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삼체’는 순수 중국 작가로 SF문학 최고 권위인 휴고상을 수상한 류츠신의 방대한 소설(3부작 총 1972쪽 분량)을 원작으로 한다. 엄청난 분량도 분량이지만 작품의 지적 심도가 워낙 깊어서 영화로 만들어지기 쉽지 않은 내용이다. ‘삼체’를 영화로 만드는 작업은 마치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만드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영화의 테크놀로지는 인간이 가진 어떠한 철학적, 과학적 상상력도 화면에 구현해 내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이번 8부작 드라마는 여실히 증명해 내고 있다. 총연출이자 쇼 러너 감독(회차의 앞 부분만 연출을 맡고 이후는 다른 감독들을 캐스팅해 연출을 총지휘 하는 방식)은 놀랍게도 홍콩계 캐나다 국적의 신예 쩡궈상(曾國祥)이 맡았다. 그는 우리에게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란 작품 정도가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무간도’ 등의 홍콩 영화로 유명한 쩡즈웨이(曾志偉)이다. 익제티브 프로듀서(기획투자자)로는 브래드 피트, 로자먼드 파이크 같은 미국과 영국의 유명 배우들이 이름을 올렸으며 제작은 ‘왕좌의 게임’을 만들었던 데이비드 베니오프와 D.B. 와이스, 알렉산더 우가 맡았다.

 

문화대혁명 참극으로 시작하는 다중 우주론 등의 지적인 영화

삼체란 ‘삼체(三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물질이 두 물체(이체) 간의 중력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개의 물체 사이에 존재할 때 발생하는 불규칙한 현상들에 관한 것이다. 현대의 이론물리학은 이 삼체 문제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 ‘삼체’는 지구의 태양이 하나가 아니라 세 개일 때 발생하는 재앙을 소재로 하고 있다. 여기에 다중 우주론 혹은 다세계론과 페르미 역설과 같은 외계인에 관한 학설을 중첩시킨다. 드라마 ‘삼체’는 어렵지만 매우 흥미로운, 그래서 오랫만에 만나게 되는 놀랄만큼 지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더더욱 눈길이 가는 것은 드라마의 초입을 1966년의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의 극좌 대학살극) 시기에 벌어진 참극의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이징 칭화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인 예저타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인민재판에 회부된다. 아인슈타인은 제국주의 미국에 망명해 원자폭탄을 만드는 이론을 제공한 반동의 괴수이다. 예저타이 교수는 홍위병들 앞에서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의 근원은 (아직은) 알 수 없는 것이라며 우주의 근원이 유물론적인 것인지, 창조론적인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우주와 세계의 시작과 그 근원은 인간의 이성이 결국 알아 낼 수 있는 미지(未知)의 영역인지(칸트의 미지론) 아니면 신이 창조한 만큼 그 목적과 의미는 결국 알아 낼 수 없다는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인지(종교의 신학이론), 이는 철학의 오랜 명제임에도 마오쩌둥의 반혁명 타파 노선에 도취된 홍위병들은 학문의 자유 영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든지 ‘반란은 정당하고 혁명은 떳떳하다’며 광신적 구호를 외칠 뿐이다. 결국 예저타이는 이들에게 맞아 죽는다.

딱딱한 과학, 역사물 아닌 서스펜스와 미스터리 가득한 영화

한편 아버지 예저타이 교수가 매질을 당해 눈 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한 예원제는 이후 반동의 딸이라는 이유로 강제노동소에서 살아 가지만 곧 그녀가 가진 이론물리학의 전문성을 인정한 공산당국은 그녀를 흥안 관측소에서 일하게 한다. 이곳은 일종의 성간(星間) 통신, 곧 외계와의 통신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우주연구소이다. 예원제는 80년대까지 여기에 억류돼 살다가 마오쩌둥 사망 이후의 개혁 개방화에 따라 칭화대 교수로 복귀한 후 미국인 석유재벌 마이크 에반스를 만나 일생일대의 사건을 겪게 된다. 예원제(젊은 시절은 진 쳉, 미국에서의 삶은 로잘린드 차오가 배역을 맡았다)와 마이크 에반스(조나단 프라이스)는 이 ‘삼체’ 드라마에서 매우 중요한 캐릭터이다.

그렇다고 드라마 ‘삼체’가 무슨 우주생성이론이나 이론물리학, 중국의 공산당 현대사에 치중하고 있는 ‘재미없는’ 드라마라는 얘기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드라마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풍으로 꾸며져 있다. 초반의 문화대혁명 신을 제외하고 예원제의 에피소드는 중간중간 플래시 백(회상 장면)으로 처리된다. 주요 분량이 아니다. 그보다는 특수경찰 다스(베네딕트 웡)와 비밀경찰 조직의 수장인 웨이드(리암 커닝엄)가 영국과 유럽의 과학자들, 물리학자들에게 벌어지는 이상한 죽음, 자살과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사건의 뒤를 쫓는 얘기가 주된 흐름인 작품이다.

런던에서 물리학자들이 잇따라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벌써 한 30명쯤 된다. 여기에 영국 내 가장 촉망받는 5인방 과학도들로 베라 예의 제자들인 사울, 진 청, 오거스티나 살라사르, 윌 다우닝, 잭 루니들의 주변에도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베라 예는 드라마 초반 투신자살한다. 그녀는 누군가가 보내 준 VR 헤드셋으로 평소 어울리지 않는 VR게임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베라 예의 엄마는 베라의 제자이자 친구인 진 청(제스 홍)에게 그것을 건네주고 진 청은 이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우주의 메시지를 전해 듣게 된다.

일찌감치 이론물리학을 때려치우고 사업가가 돼 막대한 부를 쌓은 잭 루니(존 브래들리)도 누군가에게서 이 헤드셋을 선물받고 외계인들의 계획을 알게 되지만 현실 사업가인 그는 이 모든 것이 정교한 사기행각이라고 생각한다. 잭 루니는 결국 누군가에게 살해 당한다. 첨단 나노기술의 선구자인 오거스티나, 곧 오기 박사(에이사 곤잘레스)는 자신의 망막에 타임 코드와 이상한 자기장이 떠오르게 되자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급기야 연구를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나노기술은 나중에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되며 1000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물리학과 교수로 일하는 윌 다우닝(알렉스 샤프)은 췌장암 말기로 죽어간다. 드라마 ‘삼체’는 이 다섯 명의 주인공이 이렇게 저렇게 죽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 에피소드가 씨줄날줄로 얽히면서 전개된다.

‘유물론적 권력’이 왜 관념론적 상상의 이야기 허용했을까

드라마 ‘삼체’는 결국 인간의 과학기술이 지닌 유한적 기능이나 유물론과 이성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인간의 정신영역에 대한 얘기이다. 이건 곧 물리학과 관념론, 특히 신의 영역에 대한 얘기이고 과학과 종교에 대한 오랜 논쟁이다. ‘삼체’는 이를 기반으로 하는 드라마이다. 특이한 것은 유물론의 절대성을 더욱 강조하며 사상적 학문적 통제를 가하고 있는 현 시진핑 시대에 이처럼 인간의 관념을 파고드는 상상력의 얘기가 큰 인기를 모았으며 또 그를 짐짓 허용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2007년에 첫 1부가 발간돼 2010년 3부까지 중국에서만 300만부가 팔렸다.

강고한 유물론자들의 권력기구인 중국 공산당은 그간 두 가지를 허용하지 않거나 제한해 왔는데 하나가 SF이고 또 하나가 전설, 구전에 입각한 공포물이다. 모두 유물론적 이성주의에 맞지 않다는 이유이다. 중국 공산당이 이 ‘삼체’란 소설과 영화화를 허용하고 오히려 지원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이 창작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음을 선전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특히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과의 합작 드라마 제작을 통해 자신들이 그만큼 서구 사회에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목적 때문일 수 있다. 드라마 ‘삼체’는 이런 점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지점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현재의 중국이 취하는 교묘하면서도 이중적인 외교 전략이 읽혀지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의 이런 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 양조위를 할리우드에 보내 만들었던 판타지 액션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때도 그랬다. 영화는 늘 그 이면에 정치적 책략이 담겨 있는 셈이다.

영화는 짐짓 먼 미래, 외계의 존재를 얘기하려는 척 하지만 정작 하려고 하는 얘기는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존재, 우리가 지녀야 할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삼체’의 주인공들은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한다. 이들은 극 중에서 몇 가지 질문을 반복한다. “당신은 신을 믿는가?” “이런 세상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 아닌가?” 그리고 “자연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몇 가지의 질문만으로도 드라마 ‘삼체’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 적어도 중국과 미국은 영화와 드라마만이라도 협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문화예술이 정치의 영역에서의 벌어진 거리를 좁혀주는 셈이다. 이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삼체’가 알려주는 번외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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