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10개 만들기’가 교육정책이 나아갈 길
몇 해 전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 포진해 있는 미국유학파를 '지배받는 지배자,' 즉, 미국의 엘리트 지식인에게 지배받는 한국사회의 엘리트 지배자로 특징지으며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적 식민성을 질타했던 교수를 기억한다. 그 김종영 교수가 작년엔 <서울대 10개 만들기>란 책을 내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딱 이거다 싶었다. 주장하는 바가 한눈에 들어왔다.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등 지역거점 국립대 9개를 정부의 집중투자를 통해서 서울대 수준의 대학으로 육성하자는 것. 지역거점 국립대들을 세계적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으로 키우자는 정책 제안이었다.
논거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선 명문대가 가진 학벌권력과 창조권력을 이른바 SKY대가 독점한다. 이 독점체제가 버티고 있는 이상 아무리 기회균등을 도모하고 입시제도를 공정하게 바꿔도 입시경쟁 교육이 변하지 않고 사교육비가 줄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교육지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반면 지역거점 국립대가 모두 서울대 수준이 되면 좋은 대학이 서울대 등 국립대 10개와 연고대 등 사립대 10개쯤 되기 때문에 대입경쟁과 사교육비가 줄어든다. 수도권 집중도 완화된다. 지방학생들이 지역거점 국립대에 가고 지역거점 국립대를 중심으로 산학연 콤플렉스가 생기게 돼 지방균형발전을 촉진할 것이다.
지역거점 국립대들을 연구중심대학으로
그럴듯하긴 한데 실현가능하겠느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카이스트, 포스텍, 광주과기대, 대구과기대, 울산과기대를 보라. 정부의 집중투자로 20년 이내에 세계 유수의 좋은 대학 반열에 들어간 생생한 사례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5천만 인구-3만 달러 클럽에 들어간 우리나라의 국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무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는 세계 랭킹 500등 안에 드는 대학이다. 정부의 의지와 대학의 의지가 힘을 합하면 얼마든지 외국 유학생이 몰려오는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다. 참고로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연구중심대학이 146개가 각 주마다 흩어져 있고 과반수가 주립대다. 인구 4천만에 땅덩이가 우리나라 4배에 달하는 캘리포니아 주에는 연구중심대학이 11개가 있는데 8개가 주립이고 사립은 스탠포드, 칼텍, 남가주대 3개뿐이다. 김종영 교수가 자신의 모델을 캘리포니아 모델로 이름 붙인 이유다.
그럼 향후 20년 동안은 속수무책으로 있으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만약 우리 사회가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중장기 교육정책의 핵심으로 삼고 흔들림 없이 집중투자를 지속하면 4, 5년 안에 지역거점 국립대의 바람직한 발전 변화상이 드러나며 교육계와 산업계에서 다양한 공진화의 선순환이 시작할 것이다. 일단 선순환에 들어가면 놀랄만한 가속과 탄력이 붙을 게 틀림없다. 예를 들어, 지역거점 국립대학의 위상이 계속해서 높아져서 졸업장의 가치가 올라가고 좋은 일자리로 연결될 거라는 신뢰가 생기면 그때부터 학부모 행태도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입시경쟁 지옥과 사교육비 부담에서 벗어날 자연스런 모멘텀이 생각보다 빨리 올 가능성이 높다. 그때까지 손 놓고 있으란 것도 아니다. 교육계는 진보교육감들이 교육혁신의 깃발을 들고 추진했던 교육과정과 수업방식, 생활교육의 변화들이 일반학교로 확산되고 공교육의 새 표준으로 뿌리내리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지식강국 대한민국 만드는 길
서울대 10개 만들기 혹은 연구중심 국립대 10개 만들기는 무엇보다 지식강국 대한민국 만들기 프로젝트다. 선진국 대한민국의 지적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도 연구중심대학이 최소한 15개는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역거점 국립대에 대한 서울대 수준의 집중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등에 대한 국고지원금이 서울대의 1/3에도 못 미치는 작금의 국고지원 격차는 정당화될 수 없다.
이와 함께 전국의 풀타임 박사과정 학생들에게는 주거공간과 생활비를 제공해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생활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지역거점 국립대가 연구중심대학으로 진화할 수 있다. 미국 등 선진국의 연구중심대학들이 50,60년 전부터 해온 일을 21세기 한국의 국립대학이 못할 이유가 없다. 지금처럼 박사과정을 선진국, 특히 미국에 유학 가서 이수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뿌리 깊은 종속적 학문 관행을 바꿔내고 주체적인 문제의식과 개념 틀을 발전시킬 자주적인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해야만 지식강국 대한민국으로 우뚝 설 수 있다.
선진사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적 자주성과 주체성, 창조성과 혁신성이 강한 사회다. 남의 나라 대학과 지식인이 자기 나라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들어 낸 개념 틀과 가치관을 우리나라 문제에 적용하는 지적 식민주의 방식으로는 고유한 경로의존성에 따른 독특한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풀기 어렵다. 이런 방식으로는 기껏해야 빠른 추격자가 될 수 있을 뿐 새 길을 개척하는 창조와 혁신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이미 그런 단계를 넘어섰다. 교육이 이런 사실에 발맞춰 진화하지 못하고 거대한 낭비구조로 남아 있는 게 문제다. 내가 보기에는, 더디게 보이더라도 이런 낭비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교육정책이 바로 서울대 10개 만들기다.
30년간 교육부의 최대 정책 실패
이렇게 볼 때 지난 30년 동안 교육부가 저지른 제일 큰 정책 실패는 지역거점 국립대의 위상을 웬만한 ‘인 서울’ 사립대만도 못하게 낮춘 데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대, 전남대, 경북대의 위상은 연고대 못지않았고 웬만한 사립대를 능가했다. 지역거점 국립대들이 지금처럼 위상이 떨어지고 역할을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난 30년 넘게 교육부가 서울대만 집중지원하고 지역거점 국립대를 거들떠보지 않은 결과다.
이렇게 볼 때 가장 큰 책임은 대학정책실장을 지낸 교육부 관료들과 이주호, 유은혜 등 최장수 교육부 장관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MB정권 시절 5년 내내 교육수석, 교육차관, 교육장관을 지내면서도 지역거점 국립대의 위상하락을 방임했던 이주호가 다시 교육장관으로 컴백했다. 그의 어제 경향신문 인터뷰에서도 서울대 10개 만들기 혹은 연구중심 국립대 10개 만들기 정책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