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권이 부활시킨 색깔 공포증, 내면화된 국보법
국가보안법이 사문화됐다는 건 완벽한 착각
70년 넘은 교전국가 국민의 정신상태가 온전할까?
내면화된 국가보안법이 더 위험하다
인간 심리, 특히 집단심리는 그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역사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심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 가지의 사회역사적 요인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우리 민족 고유의 사회역사, 그리고 분단 체제이다. 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풍요중독사회》, 우리 민족의 사회역사가 형성, 발전시켜온 한국인의 민족심리에 대해서는 《한국인의 마음속엔 우리가 있다》라는 저서를 통해 자세히 논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집단심리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이 두 가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인의 집단심리 그리고 한국 사회는 분단 체제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분리 됐을 뿐 아니라 철저히 차단된 남과 북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반도에는, 한국 전쟁 이후로만 계산하더라도, 70여 년 넘게 분단 체제가 지속되고 있다. 분단 체제는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되어 있다거나 단순히 두 개의 국가가 갈등을 빚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한국과 가장 사이가 나쁜 국가,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를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일본이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일본에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으며 일본인과 친구가 되거나 SNS 등을 통해 대화하고 교류할 수도 있다. 또한 일본의 언론이나 출판물을 볼 수 있고 일본의 노래, 문학작품, 드라마나 영화 등도 자유롭게 접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인들은 북한에 갈 수 없으며 북한 주민과 친구가 되거나 SNS 등을 통해 대화하거나 교류할 수도 없다. 북한의 언론방송이나 출판물, 노래, 문학작품, 드라마, 영화 등도 접할 수 없다. 심지어는 정부의 차단으로 인해 북한의 웹사이트에도 접속할 수 없다. 과거에 독일도 한국처럼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도 두 나라 사람들은 상호 방문이나 왕래가 가능했고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으며 상대측의 방송, 출판물, 문화 등도 접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한반도의 분단 체제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폐쇄적이고 적대적인 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70년 넘은 교전국가 국민의 정신상태가 온전할까?
한국에서는 북한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발언을 하면 종북으로 몰려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 십상이고 정부의 허락 없이 북한 사람과 접촉하거나 교류하면 간첩으로 몰려 처벌을 받는다. 심지어는 북한의 언론방송, 출판물, 노래, 드라마, 영화 등을 듣거나 보는 행위조차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이런 정도로 상대방과의 연계나 교류를 전면 차단하며 상대방을 극렬하게 적대시하는 관계란 과연 어떤 관계일까? 전쟁 중에 있는 적대적인 교전국 간의 관계이다.
교전국가는 상대 국가를 무찔러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이런 상대 국가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것, 상대 국가 주민과 접촉하거나 교류하는 것, 상대 국가의 방송이나 출판물 등을 접하는 것 등을 반역죄나 간첩죄로 간주한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올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과 북의 관계를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완전한 두 교전국 관계”로 규정하며 그것이 남과 북의 “명백한 현주소”이며 “조선반도(한반도)의 실상”이라고 선언했다. 70여 년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분단 체제는 남과 북이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라는 북의 주장을 반박하기 어렵게 만든다.
분단 체제의 본질이 전쟁 중인 교전국 관계이기 때문에 분단 체제는 필연적으로 한국인의 심리 나아가 한국 사회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 싸움이 벌어지는 집에서 생활하고 성장하는 아이들의 정신이 온전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70여 년 넘도록 전쟁 중인 교전국 관계가 지속되어온 한반도 상황은 이 땅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살아가고 죽는 한국인들의 정신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장기간의 분단 체제 혹은 전쟁 중에 있는 교전국 관계는 한국인들에게 색깔 공포증을 핵으로 하는 분단 트라우마라는 마음의 상처를 강요했다.
국가보안법이 사문화 됐다는 완벽한 착각
한반도 차원에서 분단 트라우마를 강요하는 것이 분단 체제라면, 한국 차원에서 분단 트라우마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국가보안법이다. 어떤 이들은 이미 국가보안법이 사문화되었으므로 굳이 폐지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잘못된 주장은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민주당의 다수 의견으로 굳어졌고 다수의 국민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중에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려고 노력했을 때 당시의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반대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은 과연 사문화되었을까? 해외로 여행을 간 한국 여행객들이 한 식당에 들어갔는데, 그 식당에서 우리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이국땅에서 동포를 만났다는 반가운 마음에 여행객들이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누군가가 “저 사람들, 북한 사람들이야!”라고 말한다. 이런 경우 한국의 여행객들은 어떤 행동을 할까? “북한 사람들이면 어때서?”라고 말하며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기꺼이 합석하려고 할까? 아니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조용히 그 식당을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갈까? 남북 관계에 반짝 훈풍이 불고 있는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아마도 후자의 행동을 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북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는 행동을 한 여행객들 중에는 국가보안법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그런 행동을 했을까? 국가보안법이 한국인들의 정신과 행동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어서다. 한국에서 국가보안법은 외적 처벌장치로 기능하던 단계를 넘어 내적인 처벌장치로 굳어진 지 오래다. 한마디로 국가보안법은 사문화된 것이 아니라 내면화, 내재화되었고 무의식화되었다는 것이다.
내면화된 국가보안법이 더 위험하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면 강도 높은 처벌을 하는 법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가정해보자. 흡연자들은 법이 만들어진 직후에는 그 법을 의식해서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지 않는다. 하지만 법이 제정되고 나서 10년쯤 지나고 나면 대부분의 흡연자들은 그런 법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수 있지만, 여전히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 법이 한국인들에게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력한 외적 처벌장치는 설사 시간이 오래 흐른다 하더라도 결코 사문화되지 않으며 내면화됨으로써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국가보안법이 외적 처벌장치로 기능하는 것보다 그것이 내면화되는 것이 정신건강에는 더 해롭다. 외적 처벌장치는 사람들이 의식을 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그것을 거부하거나 맞서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에 외적 처벌장치가 내면화되고 무의식화되면 그것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부하거나 맞서 싸우지 못하게 된다. 외적 처벌장치로서의 국가보안법은 그것이 약화되거나 피할 수 있는 조건에서는 거부 혹은 반대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 반면에 내면화된 국가보안법은 거부나 반대 행동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의 내면화는 그것이 초래하고 강요하는 심적 불편함이나 고통의 원인을 알지 못하게 방해하며 한국인들의 마음과 행동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통제한다. 이것은 국가보안법이 과거보다 현재에 더욱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화통일’ 아닌 ‘빨갱이로 몰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분단 트라우마의 핵인 색깔 공포증은 색깔이 아니라 색깔 공격과 관련된 공포증이다. 절대다수의 지구촌 사람들처럼, 20세기 말 냉전이 해체된 이후부터는 한국인들도 사회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즉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는 거의 없다. 한국인들 중에는 이웃집에 이사온 사람이 사회주의자일까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인들이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이웃집 사람이 사회주의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혹여라도 그와 엮여 자신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쉽게 말해 괜히 사회주의자와 접촉하거나 교류했다가 색깔 공격을 받거나 간첩으로 엮이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북한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거의 한국인들은 북한이 남한을 적화통일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은 2000년의 615공동선언 이후부터 큰 폭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피해망상증의 주요 내용은 ‘간첩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안기부(현 국정원)가 내 귀에 도청장치를 심어놨다’는 등의 북한과 공안기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615공동선언 이후에는 이런 내용의 피해망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국가가 정신병의 내용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런 극적인 변화는 북에 대한 공포가 크게 약화되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한국인들은 북한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 엮여 ‘빨갱이’ ‘종북’이라는 색깔 공격을 당할까봐 두려워한다. 색깔 공포증은 색깔 공격을 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증,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빨갱이나 종북으로 몰리는 것에 대한 공포증이다.
윤석열 정권이 부활시킨 색깔 공포증
한국 사회에서 색깔 공격의 주체는 극우파쇼세력이고 그들의 배후는 미국이다. 해방 직후 한국 사회의 이념 갈등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와 한국인들은 사회주의에 우호적이어서 미국의 간섭과 지배가 없었다면 한국인들은 사회주의를 포용하는 국가를 건설했을 것이다. 이승만조차 자신이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을 지배하게 되면서 이승만은 극렬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했고 사회주의를 적대시하며 잔혹하게 탄압했다. 한국 현대사는 색깔 공포증의 뿌리가 사실상 한국의 극우파쇼세력과 미국에 대한 공포임을 보여준다.
국민에 대해서는 이념 전쟁을 매개로 하는 공안통치를, 북한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호전성을 보이는 윤석열 정권의 등장은 한국에서 한동안 주춤했던 색깔 공포증을 부활시키고 강화했다. 윤 정권의 폭주를 막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는 다시 빨갱이 사냥, 종북 사냥이라는 마녀사냥이 난무하는 야만국가로 회귀할 것이다. 현 정권을 반드시 심판해야 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