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모두 ‘철도 지하화’…"현실성 없는데 던지고 보기"
총선 앞두고 유권자 표 의식한 선심성 공약
“천문학적 사업비 민자유치만으론 불가능”
사업기간 20~30년…공사로 국민불편 가중
“지하화보다 대체 교통수단 확충이 현실적”
여당과 야당이 경쟁하듯 '철도 지하화'를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정부도 올해 3월까지 철도 지하화 수립 계획을 세우겠다고 한다. 세부 내용과 노선엔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도심을 관통하는 철도를 지하에 깔고 상부에는 주택과 상업시설, 공원 등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은 똑같다. 정부와 여야 모두 철도를 지하화하면 교통 혼잡이 해결되고 주변 환경이 쾌적해질 것이라며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경제성이 떨어지고 완공까지 수십 년이 걸리는 대공사다. 정부와 여야의 총선 공약 내용대로 사업이 동시다발로 진행되면 도심이 공사판으로 변해 엄청난 혼잡을 감수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철도 지하화는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입을 모은다. 총선을 앞두고 해당 지역 유권자 표를 의식한 인기영합(포퓰리즘) 공약일 뿐 결국 흐지부지될 확률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국민의힘은 전국 주요 도시의 도심 단절을 초래하는 철도를 지하화하고 이렇게 생겨난 철도 상부 공간과 주변 부지를 통합 개발한다는 내용의 총선 공약을 지난달 31일 발표했다. 지난달 9일 국회를 통과한 ‘철도 지하화 및 철도부지 통합개발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해 정부가 철도 부지를 사업시행자에게 현물 출자하고 시행자는 채권을 발행해 지하 철도건설 사업비를 투입한 뒤 상부 토지를 조성하거나 매각해 투자 비용을 회수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정부 재정 투입을 최소화하며 도심 관통 철도를 지하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더불어민주당이 1일 내놓은 총선 공약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철도뿐 아니라 광역급행철도(GTX)와 도시철도의 도심 구간을 지하화하고 그 위에 주거복합 시설을 개발한다는 내용이다. 민주당은 지하화할 구체적인 철도 노선까지 제시했다. 사업 촉진을 위해 예비타당성조사 지침을 바꾸고 건폐율과 용적률 특례를 적용해 민간 자본을 유치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22대 국회에서 도시철도법 개정도 추진할 방침이다. 민주당은 총선 공약에 담긴 철도 노선이 약 260㎞로 사업비는 80조 원이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민자유치로 충당할 수 있어 별도 예산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출퇴근 30분 시대, 교통 격차 해소’를 주제로 한 민생 토론회에서 유사한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가 밝힌 ‘철도 지하화 종합계획’은 전국 지하화 노선 구간과 지상 개발 구상, 철도 네트워크 재구조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는 각 지방자치단체 의견을 수렴한 뒤 사업성과 균형 발전 측면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내년 말까지 대상 노선을 선정하기로 했다. 지하화한 철도 상부는 환승센터와 중심업무지구, 유통거점 등으로 개발된다. 정부는 오는 6월부터 도심 철도 지하화 구상과 지하 통합역사 마스터플랜에 착수할 예정이다.
정부와 여야는 특별법까지 제정됐으니 철도 지하화 사업이 어렵지 않게 진행될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선 사업마다 적게는 수조 원, 많게는 수십조 원의 사업비가 필요한데 자금 확보가 쉽지 않다.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특별법에 따라 사업자는 자금 조달을 위한 채권 발행이 가능하고 국가가 지상 부지를 현물 출자하는 등 민간 자본 유치를 위한 유인책이 있기는 하다. 용적률 등 특례를 적용해 사업의 매력도를 높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철도 노선 부지를 개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특히 주상복합 시설 등 넓은 부지가 필요한 건축물을 조성하기에는 부적합하다. 땅 모양이 사각이 아니라 길기만 하기 때문이다. 숲길로 조성된 경의선 등 폐쇄된 철도 부지가 주거와 상업 시설이 아닌 공원으로 조성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철도 부지를 주상복합 공간으로 개발하려면 주변 땅을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 도심을 관통하는 철도 주변 땅값은 비쌀 수밖에 없다. 수많은 지주가 있어 땅을 매입하는 일도 힘들 것이다. 사업비가 천문학적으로 불어날 수 있다. 요즘처럼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민자 유치 단계부터 사업이 막힐 가능성이 크다.
사업 기간이 무한정 길어질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경부고속도로 용인~서울 구간 지하화 사업만 봐도 그렇다. 이곳은 교통 혼잡이 극심한 상습 정체 구간이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초부터 지하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2010년대 들어 서초구 등 해당 지자체가 나서 우호적 여론을 조성했고 오랜 기간 갑론을박이 이어지다가 작년 초에야 정부와 서울시가 사업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이 사업은 현재 예비타당성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르면 2027년 착공에 들어갈 것이라는데 정부와 서울시가 세부 방안을 놓고 이견이 있어 더 늦어질 수 있다. 처음 이야기가 나온 시점부터 따지면 착공까지 20년이 넘게 걸리는 셈이고, 계획부터 완공까지는 한 세대 이상이 소요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철도 지하화 사업도 마찬가지다. 철도와 고속도로 지하화가 선거 때마다 공약으로 나왔으나 용두사미가 되고 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거 전에는 바로 시작될 듯 떠들다가 선거가 끝나면 후순위로 밀리기 마련이다.
일단 사업이 시작되면 시민들은 엄청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지하화 공사는 난이도가 높아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지하화한 철도 위에 건물을 짓는 공사는 붕괴와 지반침하 같은 위험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더욱이 도심 지하에는 지하철 노선과 전기·통신 케이블 같은 기존 시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이런 지장물을 피하려면 더 깊이, 더 길게 파야 한다.
공사 기간 중엔 철도 운행을 중단하거나 우회해야 하는 불편도 따른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전문가들은 "마구잡이로 철도를 지하화하는 것보다 대체 교통수단을 확충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