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14세 징용자였다〉 피와 눈물로 쓴 사부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가슴 졸이며 읽은 책 한 권을 소개합니다. 제2차 세계전쟁도 저물어가고 있던 1943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두 해 동안 평범한 한국 사람들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가요. 일제의 지배 아래서 ‘모던 뽀이’ ‘모던 껄’이 그들만의 자유를 구가하였고, 다름 아닌 일제의 너그러운 식민지 지배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곁에 있기는 하지요. ‘위안부’로 끌려갔던 한국 여성들이 사실은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고, 작전지역에서 일본인 장교와 연애도 하였다는 달달한 이야기를 술술 써내려간 덕분에 유명 인사가 된 교수라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 분들은 출간된 지 얼마 안 되는 <아버지는 14세 징용자였다>(논형. 2024. 1)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책에는 14살 어린 소년이 갓 결혼한 형님을 대신해 일제에 끌려가서 겪은, 강제동원의 피어린 역사가 펼쳐집니다.
구사일생 소년공이 기록한 일제 강제동원 참상
저자 지성호 교수의 부친 지재관 님이 역사의 산증인이십니다. 책에서는 ‘재호’라는 이름으로 나오지요. 이 어린 한국 소년은 아차 하는 순간에 일제 앞잡이에게 붙들려 무자비한 폭력에 시달리며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것은 돈을 벌려고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도 아니었고, 속아서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자비한 ‘강제동원’이었습니다. 홋카이도 광산으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생지옥을 경험합니다. 일본 홋카이도의 미쓰이 광산주식회사 산루광업소(三井鑛山株式會社 珊瑠鑛業所)에서는 문자 그대로 짐승만도 못한 노예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어요. 책의 한 대목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지만, 죽음의 방식과 애도의 방식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이 일하다 죽었는데도 감독들은 장례용품 하나 주지 않았고 그저 방관했다. 모두 망연자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한국인 징용자) 가네가와가 1반 반장으로서 망자를 위해 할 일을 다했다. 망자가 덮던 이불 홑청을 뜯어 그 한쪽 면을 여러 쪽으로 찢어낸 다음 이를 엮어 끈으로 만들어 가까스로 망인의 수족을 거둘 수 있었다. 남은 한 면으로는 수의 대신으로 시신을 싸매주었다.
다음 날 감독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상시와 다름없이 작업을 진행시켰다. 노동자들이 아침 점호를 마치고 일터로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화장터로 운구할 썰매가 도착했다. 이케다와 취사장 사람들이 시신을 들어 썰매에 안치하고 동여매주었다.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것뿐이었다. 썰매는 이윽고 출발했다.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야마모토를 떠나보냈다.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결국 나이 어린 소년 지재관, 아니 책 속의 ‘재호’는 감시가 삼엄하기 그지없었던 탄광촌을 극적으로 탈출하였고, 마침내는 해방이 되고 한 해가 더 지났을 때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옵니다. 아마도 그가 깊이 신앙한 하나님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말 기적적이라고 보아도 좋을 생환(生還)이었어요. 또 하나 다행스러웠던 것은 소년 ‘재호’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처지였음에도 매우 영리하고 빈틈없는 ‘꼬마 영감’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뼈저린 체험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깨알같이 기록하였다.” 이처럼 꼼꼼한 어린 소년공의 피어린 기록을 바탕으로, 그분의 아들인 지성호 교수가 이 책을 쓴 것입니다.
아픈 역사 외면하는 악마들의 필독서
그럼에도 윤석열 정권은 이렇게 내몰리고 질질 끌려가서 죽을 고생을 하고 온 한국 국민들과 그 후손들이 일본 정부나 전범(戰犯) 기업으로부터 직접 배상받을 기회까지 빼앗았지요. 이름하여 ‘제3자 변제법’- 이런 조치는 악질 친일파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억지요, 엉터리 법입니다. 짐작하건대 대통령을 비롯해 그 수하 국방부 장관이라는 신원식 등은 자기네 집안에 이렇게 피로 물든 역사가 아마 한 줄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점은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여러 학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그래서 그들은 ‘아름다웠던’ 일제강점기를 향수에 젖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 시대가 바람처럼 흘러가고 만 것을 그토록 아쉬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끔찍한 신(新)친일의 역사를 쓰고 있는 윤석열 정권의 고위 인사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들 지 교수는 일본에 뿌려진 아버지의 피눈물 어린 사연을 확인하려고 현장을 샅샅이 찾아다녔습니다. 이 또한 보통은 기대하기 어려운 열정이요, 이로써 이 책은 읽는 이들의 폐부를 크게 울리는 ‘사부가(思父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글은 더러 있어도, 제국주의자들의 노예로 끌려간 아버지가 걸어가야만 하였던 형극(荊棘)의 길을 되밟은 아들의 가슴 아픈 노래는 드문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한 개인. 한 집안의 가슴 아픈 역사로 그치지 않습니다. 책을 펴낸 논형출판사는 출간에 즈음하여 그 소감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러한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도 우리는 과연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인가.” 동감입니다. ‘재호’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대다수 한국인을 괴롭힌 국가폭력, 제국주의적 지배의 실제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역사란 책상머리에 앉은 역사가가 멋대로 상상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재단하고 해석해도 좋은 요리재료가 아닙니다. 아픈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며 웃음을 짓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악마의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