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무기삼아 싸운 고독한 반식민주의 투사

18일 세상을 떠난 재일동포 작가 서경식

<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후 끝없는 ‘투병통신’

“미학적 품격과 정치적 올바름의 성공적 결합”

천박 비속해진 역회전 시절, 아픈 그의 부재

2023-12-22     한승동 에디터
2017년 일본 나가노 현 지노 시 인근 자택에서 필자와 인터뷰할 때의 서경식 선생 모습.     한겨레

재일동포 작가요 저술가 서경식 선생이 18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1951년 교토에서 동포(자이니치) 2세로 태어나 험난한 세월을 꿋꿋이 견디고 헤쳐 나가며 한국과 일본 사회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의미심장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향년 72.

2년 전 도쿄경제대를 정년퇴임하기 전부터 허리와 다리 통증으로 불편을 겪어 온 선생은 이날 평소처럼 나가노 현 지노 시 인근 자택 근처의 온천에 갔다가 갑작스레 쓰러진 뒤 운명했다.

지난 5월에 매년 찾았던 인천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강연했고, 9월에도 서울에서 2주일을 머물렀다. 그때 지팡이를 짚고 조심스레 걸어야 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으나 호전되고 있다고 했고, 여럿이 함께 식사하며 얘기를 나누기에도 별 지장이 없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몇 년째 한일 간 왕래가 끊긴 뒤의 재회들을 몹시 반겼다.

뜻밖의 소식에 한국과 일본의 독자들과 지인들이 황망 속에 서로 연락을 취하며 애도했다.

슬프다. 부디 평안하게 영면하시기를.

1990년대 초 책을 통해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선생은 “일본보다 두세 배 정도”나 된다며 기꺼워했던 한국독자들에 대한 횔발한 저술과 강연 등을 통해 ‘디아스포라’와 ‘소수자(마이너리티)’, 경계인 등 한국사회에 생소한 말들을 폭넓은 대중적 반응과 공감 속에 정착시켰다. 그리고 ‘외부자’의 색다른 감수성으로 그림(미술)과 음악에 대한 생각과 ‘타자에 대한 공감’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을 차원 높게 벼리고 확장했으며,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일본, 재일동포, 책, 가족, 모어와 모국어 등에 대한 기성관념들에 충격을 가하고 새로운 사유의 물꼬를 터 한국 독서계와 지식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문화충격’이라 할 만했다.

“뒤돌아보면 내가 머물렀던 시대의 한국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문민정권 시대, 긴 군정을 극복하고 아직 문제투성이라고 하면서도 희망과 활력을 느끼게 해 주었던 시대였다.”

지난 7월 6일, 2005년 5월부터 18년을 이어 온 <한겨레> 연재 마지막 칼럼(‘진실을 계속 이야기하자-연재를 끝내면서’)에서 선생은 “내가 쓴 글이 사람들에게 읽히고 받아들여진 것도 그런 시대의 공기 덕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고 했다.

‘민주화’로 표상되는 한국사회의 역동적인 변화가 동아시아 사회 진보적 전환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며 큰 희망을 걸었던 선생은 그 공기가 또 다시 바뀌고 있는 낌새를 일찍부터 포착하고 불길해 했다. 최근엔 “윤석열 정권 아래서 한국사회가 역회전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며, “모든 것이 천박해지고 비속해지고 있다”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승산이 거의 없었음에도 팔레스타인에서의 정의 실현을 위한 실천적 발언을 계속한 에드워드 사이드를 떠올리며 “우리도 승산이 있든 없든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엄혹한 시대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말고, 얼굴을 들고, ‘진실’을 계속 얘기하자. 사이드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천박함이나 비속함과는 거리가 먼, 진실을 계속 얘기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벗이다.”

이는 선생이 일찍부터 되새겨 온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계 시인 파울 첼란의 투병통신(投甁通信)에 빗댄 말을 떠올리게 한다.

“(글쓰기란) 외딴섬에 표류하는 사람이 빈 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흘려보내는 것과 같은, 또는 어둠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행위다. 누군가에게 가닿을지, 반향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채 알지 못하는 독자를 향해 말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선생은 그 미지의 벗들을 향해 가닿을 기약도 없는 편지와 돌을 마지막 순간까지 던졌다.

루마니아 태생의 파울 첼란은 부모가 독일 나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자신도 나치의 절멸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태생적 모어인 독일어로 시를 썼다.

선생이 파울 첼란에 경도된 것은, 그 자신 자이니치 2세로서 모어인 일본어로 글을 쓰면서 자신이 극복하고자 했던 식민주의 침략자요 ‘적국’인 일본의 언어로 쓸 수밖에 없는 처지가 첼란의 그것과 닮은 데서 오는 공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선생이 한국사회에 소개한 또 한 사람의 나치 절멸 수용소 생존자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의 프리모 레비도 불가항력의 국가폭력이 야기한 부조리의 희생자였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극한의 부조리와 모순, 실존적 위기의 진실과 교훈을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온전하게 전달하고 공감하게 할 수 없다는 데서 절망했다. 서경식의 삶 한 구석을 지배한 비관과 우울도 비슷한 연원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 남았던 첼란과 레비는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식민국 일본의 모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기에 스스로를 ‘언어의 감옥’ 수인이라고 했던 서경식도 ‘닫힌 지하실 같은 답답한 공기’의 일본사회 자체를 일종의 수용소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그가 미술, 음악 또는 예술을 천착했던 것도 그것이 바깥 공기를 접하고 숨 쉴 수 있는 ‘창’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92년에 한글 번역판이 나와 ‘베스트셀러’가 된 선생의 첫 책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를 통해서다. 2005년 <한겨레> 국제부에서 문화부로 발령이 났고, 새 부서에서의 첫 임무가 다양한 책 이야기를 담는 타블로이드판 섹션지(<18.0>)를 만드는 일이었다. 칼럼도 몇 개 싣기로 했는데, 일본쪽 필자로 바로 그 <나의 서양미술 순례> 저자가 만장일치로 낙점됐다. 그때까지 생면부지였던 선생에게 긴장하며 조심스레 청탁 전화를 했을 때 전화선을 타고 들려 온 도쿄 쪽의 음성은 뜻밖에도 부드럽고 흔쾌했다. 이후 마지막 글까지 18년 간 이어진 그의 <한겨레> 연재 칼럼과 몇 권의 저작을 번역하는 '은혜'를 입었다. 

기이하게도 지난 10월 27일, <한겨레>에 실린 선생의 마지막 글도 기획물 ‘나의 첫 책’ 시리즈의 첫 번째 필자인 선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 관한 이야기였다.

“벨기에의 고도 브뤼허의 미술관에서 ‘캄비세스 왕의 재판’을 마주했을 때, ‘아, 역시…’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그림이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산 채로 피부가 벗겨지고 있는 희생자의 모습에서, 몇 개월 전 깊은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을 겹쳐서 봤던 것이다. 그 3년 전에는 모진 병고 끝에 어머니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가 1983년. ‘조국’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았을 집안의 기대 속에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서승)과 법학과(서준식)에 다니던 두 형은 그때 이미 10년 넘게 감옥에 갇혀 있었다. 1971년 4월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격전을 벌인 그해 봄, 방학을 일본 집에서 보내고 김포공항이 도착한 그들은 보안사로 연행돼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조작사건의 희생자가 됐다. 북한의 지령으로 김대중에게 정치자금을 전달하려 했다는 억지였다.

김효순의 <조국이 버린 사람들>(서해문집, 2015)에는 그와 유사한 날조로 삶을 송두리째 강탈당한 자이니치 조국 유학생 희생자들의 기구한 사연들이 무수히 담겨 있다.

그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간첩’이 된 다음해에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박정희 영구집권체재가 가동돼 대통령을 관제 간접선거로 뽑는 군사독재체제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다.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형들은 그 체제가 무너진 뒤에야 각각 17년, 19년만에 출소했다.

선생이 와세다대 제1문학부(프랑스 문학)를 졸업한 것은 집안이 풍비박산난 그 사건이 벌어진 지 3년이 지난 1974년이었다. 이미 재학시절부터 그의 삶은 형들 구명활동과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60여 차례나 현해탄을 오가다 그들의 석방도 보지 못한 채 한많은 삶을 마감한 어머니와 가족들 건사로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가 쓴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름다운 에세이는 대체로 사회적 의제에 무관심하고, 반대로 사회적 의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예리한 에세이는 미학적으로 거친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서경식의 에세이에서는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적 품격이 성공적으로 만난다. 첨예한 정치적 어젠다를 다루면서도 깊은 페이소스와 슬픔, 매혹적인 문체로 채워진 서경식의 글은 독자에게 각별한 매력을 선사한다.”(<서경식 다시 읽기>)

 

1995년에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 상을 받은 <소년의 눈물> 등 30여 권의 저서들 다수가 “빼어난 문장”(수상 이유)으로 빚어진 미학적 품격이 도드라지지만, <시대를 건너는 법> 등에서도 거듭 변주되는 그의 유소년기 고민과 상처, 열등감과 자부심, 부러움과 두려움, 불안, 외로움의 교차는 읽는 내내 자욱한 슬픔을 안겨 준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슬픔이 힘이 된다. 그 슬픔의 원천은 끊임없이 차별받고 억압받는 일본 내의 ‘2등 국민’ 재일동포의 현실에 대한 투철하고 정직한 자기인식이며, 거기에 꺾이지 않고 저항하는 불굴의 정신이다.

 

선생의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적 품격의 성공적 결합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식민지배구조와 뒤틀린 정치현실의 심연에 대한 정직하고 용감한 응시와 깊은 사유, 절제되고 담백하면서도 유려한 표현, 승산이 있든 없든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투병통신적 용기와 의지 위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그의 평생 화두였다.

이는 식민주의 심성에 맞서 때로 치열한 논전을 불사하는 전투적이고 날카로운 ‘논객’으로서의 선생의 면모와도 모순되지 않는다. 선생의 이런 면모를 두고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그는 투사다. 하지만 총칼이 아니라 글을 무기로 삼아 싸우는 고독한 반식민주의 투사다.”

역회전하면서 모든 것이 천박해지고 비속해지고 있는 시절에 더욱 절실해진 선생의 부재가 아프고 슬프다.

평생 고통과 우울로 점철된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편히 쉬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글은 22일 <한겨레>에 실린 필자 글을 수정 보완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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