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운센드 목사와 자본주의 ‘메기 효과’

‘굶주림 공포’ 되살린 윤석열표 예산과 노동탄압

2023-12-22     강수돌 칼럼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18세기 자본주의 영국 사회에 조셉 타운센드(1739~1816)라는 의사이자 목사가 있었다. 그는 1786년에 <구빈법>에 관한 글을 썼고, 1798년엔 <인구론>이란 에세이를 썼다. 이로써 그는 <인구론>으로 유명한, 교수이자 목사인 토머스 맬서스(1766~1834)의 스승 격이다. 그 이유는 ‘식량은 산술급수적 증가, 인구는 기하급수적 증가’라는 공식의 원조이기 때문! 따라서 (맬서스와 마찬가지로) 타운센드는 국가가 빈민에게 공적 복지를 제공해선 안 된다고 보았다. 다만 그는 맬서스와 달리 빈민들을 강제보험에 가입시켜, 질병이나 죽음 관련 비용을 스스로 충당케 하는 게 바람직하다 했다. 그러나 후발 자본주의 한국을 비롯한 세계 자본주의 여러 곳에서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널리 보이는 것은 맬서스와 타운센드의 인구론이 전혀 타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처방전 역시 엉터리였음을 알려준다.

굶주림의 두려움으로 빈민들을 일하게 하라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더 끄는 부분은 타운센드 목사의 빈민관이다. 그는 1786년의 <구빈법>에 관한 글에서 국가의 공적인 구호조치(빈민 구제)가 약자나 빈민을 보호함으로써 오히려 인구 증가를 돕는다고 비판했다. 1788년에도 그는 구빈법에 반대하며, “이론적으로는 매우 아름답지만, 현실적으로는 구빈법이 제거하려는 악을 오히려 촉진한다”고 쏘아댔다. 흥미롭게도 이를 그는 ‘개와 염소의 비유’로 설명했다, 페르난데스 섬에 염소들만 살면 나약하기만 하고 새끼만 과잉 생산할 것이기에 사나운 개를 풀어 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염소들이 사나운 개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자기도 모르게 강한 존재가 될 뿐 아니라 개체 수 조절도 된다는 얘기! 이런 논리로 그는 모든 국가적 빈민 구제책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 보자. “빈민들로 하여금 노동에 박차를 가하게 자극할 수 있는 건 오직 배고픔뿐이다.” 그가 볼 때, 염소처럼 나약한 빈민들에게 특효약은 사나운 개에 해당하는 굶주림의 공포였다. 그는 그 근거를 이렇게 제시한다. “만일 빈민들에게 직접적으로 노동을 강제한다면 너무나 많은 문제들, 폭력 및 소란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굶주림은 평화롭고 조용하며 지속 가능한 압력일 뿐 아니라, 근면한 노동을 촉진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동기가 된다.” 따라서 법적 강제보다 굶주림의 공포를 이용하면 빈민들이 사력을 다해 노동을 하게 될 것이니, 제발 국가가 복지정책 같은 건 시행하지 말라는 얘기! “배고픔은 가장 사나운 동물조차 잘 길들일 것이며, 가장 사나운 동물에게도 품위와 정중함, 복종과 예속을 가르칠 것이다.”

 

메기는 낮에는 바닥이나 돌 틈 속에 숨어있다가 밤에 먹이를 찾아 활동하는 야행성 민물고기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불독. 연합뉴스 자료사진

어째, 상당히 익숙한 얘기 아닌가? 사실, 우리는 ‘메기 효과’를 수시로 들어 잘 알고 있다. 예전에 어부들이 먼 바다에서 청어나 정어리를 한 배 가득 잡아 항구까지 돌아오면 그 사이에 물고기들이 곧잘 죽어버려 골치를 앓았다. 이에 어느 어부가 커다란 메기 한 마리를 청어나 정어리가 있는 수조에 넣었더니, 물고기들이 메기에게 먹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바람에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생생했다는 얘기! 타운센드 목사의 ‘염소와 개’, 그리고 메기 효과에서 ‘물고기와 메기’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무서운 결론으로 수렴한다. 사람들을 근면‧성실 노동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굶주림(배고픔)이라는 맹견이나 메기를 활용해야 한다!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당근과 채찍’ 논리의 내면화

물론, 오늘날 경영학에서는 이런 공포심만으로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가 가능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공포심 외에 성취욕이나 자아실현감을 적극 자극하는 것이 더 나은 동기부여 기법이라 가르친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회적 동물은 ‘관계’의 동물이기에 ‘인정(認定)욕구’가 매우 강하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우발적 폭력(살인 포함)의 배후엔 종종 모욕감이나 멸시당한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 역시 인정욕구가 짓밟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반면, 부모에게 칭얼거리는 아이나 조직에 저항하는 구성원들에 대해 부모나 리더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아, 그러셨군요”라며 그 마음을 알아주고 경청한다면 의외로 분노가 쉽게 가라앉는 걸 볼 수 있다. 나아가, 기업들이 조직 구성원들을 대할 때, 작은 성취라도 적극 인정해주고 칭찬한다면 그 구성원은 더욱 분발할 뿐 아니라 전체 조직 분위기조차 ‘고(高)성과’ 지향적으로 바뀔 것이다. 이를 ‘인정 효과’라 하자.

그런데 메기 효과이건 인정 효과이건,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관계라는 맥락 속에서 벌어지는 경우, 결국은 자본의 몸집만 크게 불리게 된다. 사실, 우리의 노동현실은 메기 효과나 인정 효과가 상호 배타적인 게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임을 잘 보여준다. ‘당근과 채찍’이란 말처럼, 메기 효과가 채찍에 해당한다면, 인정 효과는 당근과 같다. 마부나 기수가 말을 잘 다스리기 위해선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결합해 써야 하는 것이다. 설사 결과적으로, 당근을 받는 구성원이 20% 이하, 그 외 80% 이상은 늘 채찍을 맞더라도, 일단 모두에게는 ‘당근과 채찍’ 논리가 내면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본과 권력의 입장에서는!

경영을 뜻하는 매니지먼트(man-age-ment)의 뿌리가 기마술(manège, maneggiare)이라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즉, 마부나 기수가 말을 손(man)으로 다룰(ager) 때는 당근만도, 또 채찍만도 아닌, ‘당근과 채찍’의 절묘한 결합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기업 조직에서 사람을 다루는 것도, 마치 마부가 말을 다루듯 ‘당근과 채찍’을 잘 써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기업 조직의 목표인 더 많은 이윤(잉여가치)을 효과적으로 획득할 수 있으니!

그러고 보니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소’나 ‘청어’, 또는 ‘말’ 취급을 당한다. 거꾸로 말하면, 맹견이나 메기가 잡아먹을 듯 설치거나 마부가 말을 다루듯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섞어 통제하는 그런 사회, 그런 조직, 그런 관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얘기! 그 결과는? 살아 있는 노동을 자본에 더 많이 갖다 바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자본주의 시스템의 원리에 대한 통찰은 우리의 구체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최근에 벌어진 일부 사례들을 보자.

‘굶주림의 공포’ 되살린 윤석열표 예산과 노동탄압

첫째, 윤석열 정부는 예산편성 때, 부자나 자본을 위해 세금을 대폭 깎아 재산을 지켜주는 대신, ‘돈 안 되는’ 민생‧연구‧복지 예산은 감축하는 기조를 보였다. 부자나 자본은 ‘검찰공화국’의 눈치를 보며 속으로 좋아하지만 빈민, 노인, 노동대중은 경제적 궁핍화에 신음한다. 그나마 국힘당과 민주당이 12월 21일 합의한 예산(약 657조 원 규모; 기존 정부안에서 약 4조를 줄이고 동시에 늘림)에서는 민주당의 민생 예산(연구개발, 새만금, 지역상품권, 소상공인 지원, 이자 보전, 요양병원 간병 지원, 희귀질환자 의료비 지원, 발달 장애인 지원, 청년 월세 지원, 내일 채움 공제, 1000원 아침밥 등)이 약간 반영됐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18세기 영국의 타운센드 목사가 말한, ‘굶주림의 공포’가 2024년을 앞둔 지금도 빈민과 노동대중을 자본주의의 틀에 더 단단히 결박한다. 이런 식으로, 소득 불평등이나 사회경제 양극화는 자본주의의 실패이거나 의도치 않은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를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차별과 불평등이 해소되기는커녕 (설사 일시적으로 줄더라도) 오히려 장기적으로 심화하는 경향이 있다.

 

정의당 배진교 의원이 22일 국회에서 노란봉투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2022.11.22. 연합뉴스

둘째, 2천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정규직, 비정규직 가리지 않고) 그 권익을 증진하기 위해 헌법 33조에 보장된 노동3권(단결권, 교섭권, 행동권)을 요구하고 실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합헌)이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가 통과시킨 ‘노란봉투법’(하청 노조도 원청업체와 교섭할 권리 보장, 또, 기업이 노동자나 노조를 상대로 천문학적 손배 소송을 함부로 못하게 함)을 보란 듯이 거부했다.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저항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무서운’ 개나 메기가 필요하다는 듯! 그런 식으로 노동자들이 굶주림의 공포에 떨도록 만들어야, 마침내 노동자 스스로 최대 ‘주52시간’ 한계선을 허물자고 요구할 것이란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인가?

셋째, 서이초 교사의 불행한 죽음을 계기로 여러 논란들이 불거졌으나, 그 중에서도 유난히 ‘학생인권조례 탓에 교권이 침해됐다’는 논리가 보수언론을 등에 업고 부각되었다. 그 결과 예컨대 보수 색채가 짙은 서울시의회나 충남도의회에서는 이 참에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려 든다. 학생들에게는 ‘사나운’ 개나 메기 같은 존재가 필요할 뿐, 인권이나 존중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얘기! 그러나 차분히 보건대, 교사의 죽음을 부른 ‘갑질 학부모’ 사건은 결코 학생인권과 교권 간 대립이 낳은 게 아니다. 이는 한편으로, 돈과 권력 (사다리꼴 서열화) 앞에서 사람과 생명을 경시하는 물신주의의 산물이며, 다른 편으로는, 대학입시와 노동시장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중독시스템(경제성장 중독체제)의 산물이다.

민주공화국에서는 자본주의 위에 민본주의 있지 않은가

사실, 18~19세기 영국의 타운센드나 맬서스는 결코 예외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당시 신흥 부르주아들은 물론 지식인, 지주, 귀족들 다수가 빈민이나 노동대중을 그런 식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수백 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조차 국가나 자본이 학생이나 국민, 노동대중을 ‘사나운’ 개나 메기로 협박하며 다스리려 한다면? 그러면서도 화려한 자본축적 이면에 ‘일자리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비해, 구직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잉여인간 법칙’이 우리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면?

누가 뭐래도, 이건 아니죠!!! 더구나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표방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이나 생명이 모두 존중되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사람과 생명을 무시, 경시, 멸시하는 자본주의(資本主義)와 과감하게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할지 모른다. 길지 않은 인생, 옹골차게 행복한 삶을 위하여! 부디, 제발!

관련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