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전쟁, 그 이후

갈등 넘어 적대 영역 들어선 청년층 젠더 문제

2023-12-12     김대현 문학평론가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김대현 문학평론가

다시 손가락 전쟁이 벌어졌다. 대형 게임사 넥슨을 비롯하여 여타의 게임 캐릭터 홍보 애니메이션 등에 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손가락 상징이,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크리에이터에 의해 은밀히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이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제기된 것이다.

혐의 벗어도 남는 낙인효과

사안은 2년 전 GS그룹 계열사들의 홍보물로 야기된 1차 손가락 전쟁과 유사하게 흘러갔다. 책임자가 나선 넥슨은 즉각적인 해명과 함께 해당 애니메이션을 삭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와 함께 해당 이미지를 제작한 외주업체에 문책을 시사하자 외주업체는 사과와 함께 사건의 당사자로 지목된 크리에이터를 퇴사처리 했다는 입장문을 게재했다. 다른 업체도 유사한 행보를 거쳤다. 그 과정에서 사실관계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해당 이미지의 작성자가 다른 남성 크리에이터로 드러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이외에 혐오 표식으로 지목된 다른 이미지들도 어떠한 혐오의 의도 없이 제작과정에서 포함될 수 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언론매체와 시민단체는 문제를 제기한 커뮤니티의 주류를 이루는 젊은 남성들의 피해의식,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backlash), 나아가 여성 일반에 대한 적개심을 강하게 비판했다. 초기에 남성들의 문제제기에 편승했던 일부 정치인들의 침묵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적어도 공중의 여론 지형에서 논리의 대세는 비판자들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손가락 전쟁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종결될 것인가? 사실 이에 대해서는 그리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유사한 사건을 겪은 다른 게임들의 선례에 비추어 볼 때 해당 크리에이터는 향후 남성 소비자가 중심이 된 시장에서 본연의 업무를 담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속한 외주업체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사실 규명을 통해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해도 마찬가지다. 논리의 적부를 떠나 그들은 낙인효과로 인해 이미 적대의 중심에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갈등 넘어 적대 영역 들어 선 청년세대 젠더 문제

다수의 남성 소비자들은 불매운동을 비롯하여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회사에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주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GS와 넥슨 등이 즉각적으로 대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본이 주도하는 질서에서 시장원리는 다른 어떤 논리에 우선한다.

설령 문제제기가 사실이라 해도 크리에이터가 숨겨 놓은 일종의 이스터 에그(Eeaster Egg)로서 크리에이터를 해당 영역에서 완전히 퇴출시키는 것은 가혹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여성 징병에 대한 청원이 단지 여성들에게 불이익을 전가하기 위한 일부 남성들의 감정적 대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나 그러한 혐오 표현이 이른바 미러링 전략으로서 다수자의 포용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라 인식하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기성세대의 인식과 달리 ‘2023 젠더 인식조사’에 따르면 갈등의 축을 이루는 18~29세 사이에서 젠더 문제가 심각하다는 인식이 79%에 이른다. 이것도 지난해의 91%에서 일시적으로 줄어든 것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젠더 문제는 국민 평균의 인식보다 더욱 심각하다. 이미 청년세대의 젠더 문제는 갈등의 영역을 넘어 적대의 영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서로를 적대하는가?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의 갈등은 흔히 말하는 고전적인 성 역할의 차이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과거 남성 집단 내부적으로만 행해졌전 경쟁의 양상과 달리 또래 집단인 그들은 한정된 자리를 두고 입시와 취업, 승진과 창업 모든 분야에서 상호간에 강력한 경쟁자로 작용한다. 고도 성장기와 달리 다른 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경쟁자를 경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 어느 한 쪽이 공정한 경쟁자가 아니라 부당한 방식으로 경쟁에 임한다고 인식하면 문제는 심각하다. 이는 가산점, 할당제 등과 연동한 젠더 이슈와 맞물려 갈등을 부추긴다.

갈등을 봉합해야 할 정부의 정책은 젠더 갈등의 양상에 대한 인식의 시차로 인하여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킨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 대한 혐오 표현이 더욱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는 까닭이다. 갈등의 해결 방식은 소통이지만 적대의 해결은 상대의 말살이다. 언제든 나를 해할 수 있는 적의 일원에게 인권의 보장은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편 또한 마찬가지다. 젠더 갈등에서 남성 집단의 모든 문제제기를 성평등 운동의 백래시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다. 역차별을 호소하는 남성들의 문제제기는 미숙한 젠더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그 요청에 공동체가 귀를 기울이는 순간 지금까지 이루어진 성평등 운동의 성과가 후퇴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무죄추정의 원칙, 기회의 공정, 기사 및 논문작성의 윤리 등 현재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라 해도 마찬가지다.

젊은 남성들의 분노도 이 지점이다. 그들은 여성에 편향된 언론 및 정치지형으로 자신들의 정당한 분노가 왜곡되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소통을 원하지만 정치, 언론, 사회에서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존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손가락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볍지 않은 이유다. 손가락에 대한 분노는 단지 크리에이터가 행한 조그만 이스터 에그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누적되어온 그들의 박탈감이 집약되어 돌출된 것이다.

젠더 갈등의 양상에 대해 동일한 문제제기와 동일한 비판이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를 적으로 인지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서로에 대한 증오만 축적될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탈선이 예정된 길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대의 선의를 읽어내야 하는 죄수의 딜레마

문제의 지점을 다시 설정해야 하는 까닭이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성 평등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은 두 말할 것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 차원에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실천의 방식이 당위의 차원에 머물고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면, 아니 현실을 더욱 악화시킨다면 그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반을 적대의 대상으로 삼고 더 나아질 수 있는 공동체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상대의 말살이 아니라 소통이다. 이런 의미에서 손가락 문제가 제기된 게임 ‘메이플 스토리’ 유저들을 시작으로 온라인 커뮤니티로 번지고 있는 어린이재활병원 릴레이 기부 운동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월 2일에 시작된 이 운동은 12월 10일 현재 총액 9억 원을 돌파하고 있다. 혐오에 대응하는 것은 혐오가 아니라 관용이라는 것을 모토로 기부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이는 혐오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최적의 대응에 해당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혐오의 연쇄에 청년들이 지친 것으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이는 그들의 기부행위가, 선행하는 자신들의 혐오를 상대측에 전가하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공동의 묵시적 전략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우려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만큼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의 내면에 깊이 숨겨진 상대의 악의를 읽어내는 것이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읽어내야 할 것은 혐오의 사슬을 끊는 것은 혐오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신뢰라는 이야기다.

죄수의 딜레마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는 것보다 상대의 이익을 함께 고려할 때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젠더 갈등에서 우리가 고려할 것도 이것이다. 상대의 악의를 읽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선의를 읽어내야만 한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명백한 증거 없이 회사에 대한 업무방해 혐의로 직장이나 사업을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본연의 업무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기부 운동의 모토가 된 관용은 이럴 때 어울릴 수 있는 말이다. 그들을 비롯한 손가락 전쟁의 모든 참여자가 서로의 이익을 고려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서로를 구속하는 죄수의 신분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동지적 관계임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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