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가 낸 문제, 일본영화가 답하다, 어쩌면
[오동진 칼럼] 엽기적 괴물은 나오지 않는 영화 '괴물'
모든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야 이해되는 교사의 억울함
잘 알지도 못 하면서 과잉된 판단과 주장을 하는 어른들
합리적 판단 부재가 빚은 충돌의 희생자는 우리의 미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새 영화 ‘괴물’은 미스터리 영화이다. 제목과 달리 영화에 괴수는 나오지 않는다. 연쇄 살인마같은 엽기적 인간 괴물이 나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들 마음 속에 괴물이 살고 있다’ 같은 내용도 아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들 혹은 우리사회 내부의 괴물같은 심리 상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기는 하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해관계의 극단,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오해와 편견, 올바르지 못한 해결 방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진정으로 말이 안 되게도, 공적 시스템은 지나치게 ‘루즈하거나’ 극히 관료화 돼있는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괴물’을 보고 있으면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보면, 지금 우리사회에서 쟁점화 돼있는 교권의 추락, 공교육이 갖고 있는 시스템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의 교육 문제, 사회 문제에 대해 엉뚱하게도, 그러나 역설적으로는 반갑게도, 일본영화가 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느껴진다.
모든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야 이해되는 교사의 억울함
싱글맘인 무기노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어느 날 5학년 아들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에게서 이상행동을 발견한다. 사오리는 숲속 외딴 곳에서 그것도 어두운 밤에 ‘괴물이 누구냐?!’고 소리치고 있는 어린 아들 미나토를 간신히 찾아내고는 공포에 떤다. 아이를 차에 태우고 돌아오는데 미나토는 뜻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달리는 차에서 문을 열고 나가 다치기까지 한다. 사오리는 아이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학교를 찾아가 담임과 자초지종을 따져보려 한다. 엄마 사오리는 이 모든 것이 아이의 담임인 호리 선생(나가야마 에이타)이 ‘저지른’ 체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오리는 호리가 미나토에게 “너의 머리 속에는 돼지 뇌를 이식했다”는 말까지 한 것으로 확신한다. 미나토가 어느 날엔가 자신에게 ‘돼지 뇌를 이식한 사람은 사람인지 돼지인지’를 물었기 때문이다. 사오리는 명백하게 이 모든 일이 선생 탓이라고 생각하고 학교 측에 조치를 요구한다. 학교는 결국 호리 선생에게 징계 처분을 내린다.
그러나 정작 호리는 억울하다. 그는 미나토를 때린 적이 없고 ‘손과 코가 부딪친 적이 있을 뿐인데’ 미나토가 종종 이상행동을 보여 왔다고 주장한다. 호리 선생은 오히려 미나토가 호시카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라는 동급생 아이를 괴롭히면서 ‘이지메’에 앞장서고 있다고 증언하지만 전혀 먹히지 않는다. 미나토는 선생에게 맞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소극적인 태도로 인정하는데 그런 아이의 태도는 더욱 더 선생 호리가 폭력적인 교육 태도를 지녔음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학교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까지 벌인다. 문항은 한 번이라도 호리 선생이 무섭게 느껴진 적이 있느냐 없느냐 식의 질문으로 돼 있고 당연히 압도적으로 그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온다. 호리는 사태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지만 그의 어수룩한 행동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영화 예술가는 사건을 표면화하기보다는 내면화하는 데 주력하는 사람들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런 면에서 더욱 특장점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는 나가노 현에 있는 스와 호수 근처의 한 작은 마을과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정돼 있다. 실제 사건도 일본의 한 소도시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쩌면 사건에 대한 정보는 기사 한 줄, 혹은 1단짜리 기사나 박스 기사 정도였을 것이다. 그것을 히로카즈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사카모토 유지(‘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각본)는 이를 여러 사람의 마음 속으로, 혹은 여러 명의 상황 속으로, 더 나아가 다중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엮어 냈다.
영화는 크게는 세 축으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전반부는 엄마 사오리의 시점으로 사건을 풀어 나간다. 중반부는 선생 호리의 시각으로, 나머지는 미나토와 요리 두 아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들 모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의 전체 요지는 모든 각도의 이야기를 다 들어 봐야 알게 된다. 물론 하나하나의 이야기만 들었을 때도 그것 자체만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는 답이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꼭 전체를 들어봐야 한다. 이 쪽 저 쪽, 우리 쪽과 상대 쪽, 모두의 애기가 경청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잘 알지도 못 하면서 과잉된 판단과 주장을 하는 어른들
그러나 세상은 결코 그런 식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영화 ‘괴물’은 결국 이 모든 것이 아이들 세계에 대해 부모와 선생, 학교와 사회라는 기성의 체제 속 어른들이 지나치게 자기들만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고, 그래서 사실은 다 알지 못하면서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며, 또 더욱 그래서 결국 잘못 알고 있는 것인데도 그럼에도 자꾸 그렇지 않다고 강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건 비단 아이들의 세계에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라 작금의 모든 사안에 대해서도 똑같다는 것을 얘기하려 한다. 현대인들은 영화 속 엄마, 선생들처럼 과잉의 이기, 과잉의 판단, 과잉의 주장을 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여기에는 조절과 중재의 기능이 상실돼 있다. 정치에만 진영이 생긴 게 아니라 이미 사람들의 일상에도 진영이 구분돼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그건 몹시도 씁쓸하고 참담한 얘기이다.
영화 ‘괴물’은 일본의 한 소도시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가지만 일본사회를 넘어 한국사회까지, 더 나아가 세상 전체에 대해서 애기하려 한다. 그렇게 작은 강에서 시작해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주제의식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늘 작은 우주로 큰 우주를 설명한다. 무릇 소설이든 대본이든 시나리오든 이야기를 다중 시점으로 풀어 나가는 것은 매우 고난이도의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괴물’의 그 예술적 성취는 남다르다. 지난 5월의 칸영화제가 이 작품에 각본상을 수여한 이유이다.
영화 ‘괴물’에서 특이하면서도 어쩌면 그래서 더욱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대목은 교장(다나카 유코)의 태도이다. 그녀는 엄마 사오리의 항의에 대해 오로지 교칙의 매뉴얼에 따라 행동한다. 그녀의 (로봇 같은) 기계적인 답변은 사오리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다. 현대인들은 철저하게 매뉴얼에 따라 행동하라고 교육받는다. 이는 현대사회가 철저하게 정성(定性)적 평가보다 정량(定量)적 평가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교장이나 다른 교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위원회의 평가이다. 그들은 학교를 살리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교장은 교사 호리에게 말한다. “사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현대사회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진실은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린 사람들에게는 사치스러운 일일 뿐이다. 집단을 위해 개인의 진심이 호도되거나 왜곡되는 사회는, 늘상 그렇지만 국가주의로 변질되기 십상이다. 교장은 아이 미나토를 음악실에 데려가 트럼본 부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영화 전편에 시종일관 깔리는 이상한 불협화음은 바로 이때 미나토가 부는 트럼본 소리이다) 말한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 그 말이 잘못 악용되면 전체주의로 가는 법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 대목이다. 일본사회가 또 다시 역행하고 있고, 어쩌면 이미 역행한 지 오래라는 것인데 기묘하게도 이 얘기는 우리에게까지 보편적 울림을 준다. 일본이든 우리든 영화 속의 한 작은 마을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합리적 판단 부재가 빚은 충돌의 희생자는 우리의 미래
이 영화가 만들어 내는 미스터리의 모든 키워드는 오프닝 장면에서 나온다. 영화는 반복되는 사이렌 소리와 대형건물의 화재로부터 시작된다. 사오리와 미나토가 사는 소규모 아파트 저 건너편이다. 화재가 난 건물 3층에는 걸스바가 있는데 호리 선생은 여자 친구와 그 근처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불구경 나온 학교 아이들에게 걸스바를 드나드는 것으로 오해를 산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다른 선생과 부모들에게도 퍼진다. 사오리의 귀에도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정자와 중재자의 설득, 합리적인 판단이 부재해진 상황 속에서 자기만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극단적인 충돌이 빚어진다. 그 결과의 참극을 겪게 되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아이들이며 우리의 미래세계이다. 영화 ‘괴물’은 괴수 얘기가 아니지만 실제 괴물처럼 공포스럽게 변질된 현대사회에 대한 우울한 분석 보고서이다. 카이부츠 다레다. 괴물은 누구인가. 영화 속 아이 둘이 인디언 포커 게임을 하면서 묻고 있는 질문이다. 너인가 나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