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곯지 말고 싸우지 말자, 그것이 곧 이상사회
[김태형 칼럼] 기본소득이 이상사회를 여는 열쇠
똑같은 이상사회 꿈을 꾼 기독교, 마르크스, 동양의 대동사회
오늘날의 한국인들을 짓누르고 있는 고립적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을 해결하는 과제는 이상사회의 건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이상사회란 사람들이 위의 두 가지 불안에서 해방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이상사회를 꿈꿔왔다. 인류는 어떤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했을까?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서구인들이 꿈꿨던 이상사회의 모습은 천국에 대한 묘사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성경은 천국을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으로 묘사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을 천국으로 본 것이다. 생산력과 과학기술 수준이 낮기 때문에 생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과거의 인류에게 이상사회는 무엇보다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였다. 성경은 또한 천국을 ‘사자와 어린 양이 사이좋게 뛰노는 세상’으로 묘사한다. 화목한 세상을 천국으로 본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불평등한 계급 사회가 등장한 이래 사람들은 모두가 화목하게 살아가는 평등한 세상을 꿈꿨고 그런 세상을 이상사회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와는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마르크스가 꿈꾼 이상사회 역시 풍요-화목 사회였다. 그는 공산주의 사회를 이상사회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공산주의 사회는 고도로 생산력이 발전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다. 즉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생산력이 발전한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공산주의 사회는 또한 모든 계급이 폐지된 무계급 사회다. 그가 무계급 사회를 지향한 것은 사회 불화의 기본 원인을 계급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독교적 관점이든 계급해방적 관점이든 간에 서구인들이 공통적으로 꿈꾼 이상사회는 풍요롭고 화목한 사회다.
한국인을 포함하는 동양인들이 꿈꾸는 이상사회는 대동세상이다. 대동(大同)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대동세상이란 모두가 같아져서 하나가 되는 세상이다. 모두가 하나가 되고, 모두가 우리가 되어 살아가려면 사람들 간의 관계가 평등하고 화목해야 한다. 옛 문헌들은 대동세상을 권력을 독점하는 자가 없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 재화는 공유되고 모두의 생활이 보장되는 세상, 모두가 충분히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상, 범죄가 없는 세상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빈곤한 세상을 이상사회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대동세상은 풍요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꿈꿨던 이상사회 역시 풍요롭고 화목한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노무현의 꿈-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으로부터의 해방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꿈꿔온 이상사회의 모습은 동일하다. 즉 인류는 풍요롭고 화목한 사회를 이상사회라고 믿어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회에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락서니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특유의 통속적인 어법으로 이상사회를 모두가 먹는 걱정, 입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고 말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생존 불안에서 해방된 사회가 이상사회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또한 이상사회를 더럽고 아니꼬운 모습이 사라진 사회라고 말했다.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어 존중 불안이 사라지고 갈등과 다툼이 없는 화목한 사회가 이상사회라고 말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꿈은 곧 오늘날 한국인들의 꿈이자 인류의 이상사회에 대한 꿈이다. 이상사회는 모두가 고립적 생존 불안에서 해방된 풍요로운 사회이고 모두가 온갖 지배와 착취, 개인 간 존중 불안에서 해방되어 서로를 사랑하면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사회이다. 나는 <풍요중독사회>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통해 한국인이 심각한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최우선 과제는 사람들을 이 두 가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이 두 가지 과제의 해결은 단순히 한국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상사회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풍요-화목 사회가 이상사회이기 때문이다.
이상사회가 현실적 목표가 될 수 있을까?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면 모두의 생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생산력,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하고 모두가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전한 사회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인류는 이 두 가지 과제 중에서 첫 번째 과제는 이미 달성했다. 인류는 20세기 이후 눈부신 지식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모두가 의식주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경제학자 스티글리츠는 미국이 건국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전체 노동력 중에서 약 70%가 투입되어야만 미국인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지만, 200여 년이 지난 현재에는 전체 노동력 중에서 단지 3%만 투입되어도 미국인이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경제학자 이정전은 생산된 물건이 잘 팔리기만 한다면 전체 노동자 중에서 70%가 일을 하지 않고 놀더라도 국민경제 전체의 생산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인류는 이미 생존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을 정도의 높은 생산력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생산력 수준이 낮았던 과거에는 전체 파이의 크기가 너무 작아 이상사회 건설은 먼 미래의 과제로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평등한 분배 이전에 일단은 파이의 크기부터 키워야 한다는 자본가나 지배자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가 만들어내는 파이의 크기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크다. 문제는 그 큰 파이를 극소수가 독점하는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개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국제구호기구인 옥스팜의 2017년 보고서에 의하면 8명의 슈퍼 리치(Super Rich)가 전 세계 하위 36억 명의 재산을 합한 것보다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상위 1% 부자의 재산이 나머지 99% 인류의 재산을 다 합한 것보다 2배 이상 많다.
이러한 극단적인 양극화는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더욱 심해졌다. 미국과 같은 식량 과잉생산국들이 남아도는 식량을 기아에 시달리는 국가들에 나눠준다면 인류는 굶주림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게 하는 대신 곡물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남는 식량을 바다에 버리거나 연료로 소비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생산력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것, 즉 사회제도의 개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인류는 무엇보다 파이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없었다. 반면에 파이가 충분히 커진 오늘날에는 불합리한 사회제도로 인해 이상사회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인류는 앞으로 더 많은 풍요, 더 많은 돈이 아니라 ‘화목’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즉 대동세상의 두 가지 내용 중에서 풍요는 이미 달성했으므로 평등한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화목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이상사회를 여는 결정적 열쇠
모두를 고립적 생존 불안에서 해방하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도는 기본소득이다. 개인의 생존을 개인이 책임져야만 하는 시대착오적인 사회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들은 생존 불안에서 해방될 수 없다. 설사 운이 좋아서 개인의 생존을 개인이 책임지는 것이 모두에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생존 문제를 승자독식의 개인 간 경쟁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면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 즉 인간관계의 파탄과 정신건강 악화 등의 불행을 피할 수 없다. 개인의 생존을 개인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는 제도 중의 하나인 기본소득의 중요한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인들은 한반도에 정착한 이래 수천 년 동안 생존 문제를 집단이나 공동체가 함께 책임지고 해결하려는 공동체적 문화, ‘우리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농촌의 마을 공동체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비록 지주에게 가혹하게 수탈 당할지라도 공동체 성원들이 함께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공정하게 분배하면서 화목하게 살아보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집단적 생존 불안을 공동체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낙천적으로 살아온 한국인들은 오히려 현대의 비약적인 경제발전 국면을 못견뎌하고 있다. 개인의 생존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낯설고 비정한 세상, 그것이 초래하는 고립적 생존 불안을 견뎌내지 못해 정신적으로 파산하거나 자살을 하고 있다. 한국의 자살률이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90년대에 세계 1위 수준으로 치솟아 지금까지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국가, 공동체가 개인의 생존을 책임지는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정신이 건강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한국인의 마음 속엔 우리가 있다』 김태형, 2023 참고) 기본소득은 현 시점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