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적 기후정책 vs 아래로부터의 기후연대

2022-11-30     박태주 칼럼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윤석열정부의 기후정책은 한 마디로 친기업적이며 민간 주도를 강조한다. 탄소배출 감축은 가능한 한 늦추고 원전 확대에 올인하면서 재생에너지 부문은 민간에게 맡기겠다는 투다. 지금의 온실가스 감축계획으로 탄소중립이 실현될지도 의문이지만 그마저 달성될 거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씨앗을 늦게 뿌려 배추농사를 망쳐버린 우리집 텃밭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기후위기 대응을 늦추다간 국민의 삶의 질을, 경제를 거덜내지는 않을까.

유통기한이 끝난 자유시장교리를 앞세우면서 국가는 거대한 사회전환의 운전자이자 사회보호의 담당자라는 역할도 팽개치고 있다. 기후전환의 선도 부문인 에너지 전환만 하더라도 민영화의 논리가 전면에 나선다. 발전공기업이 주도하는 석탄화력발전소가 단계적으로 폐쇄되고 LNG 발전소가 뒤를 잇는다. 재정건전화라는 명목으로 발전공기업의 재생에너지 투자는 축소되고 재생에너지 의무공급비율(RPS)도 축소·폐지된다. 재생에너지 부문의 확대는 민간주도로 넘어가고 특히 해상풍력은 다국적 기업의 놀이터로 바뀐다. 나아가 윤석열 정부는 한전의 독점 판매구조를 점진적으로 해소해 전력 판매시장도 개방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경쟁과 시장원칙에 기반을 둔 전력시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향후의 전력사업을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정부의 탄소중립 시나리오에 따르더라도 2050년 재생에너지의 비율은 70%를 넘는다. 화석연료 발전소를 폐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공공이 주도하는 재생에너지 사업은 놓칠 수 없는 과제다. 에너지 전환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처하고 외자에 노출된 에너지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국가의 기후정책, 에너지 전환정책을 공공주도로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국가의 기후정책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래로부터 기후연대를 조직하고 투쟁해야

정부가 기후·에너지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징의 하나는 노동을 비롯한 사회적 취약계층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해당사자 사이의 집단적인 숙의도 민주적인 토론도 자취를 감추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김문수의 출현으로 기능을 마감한 데 이어 탄소중립위원회조차 핵발전촉진위원회로 정체성을 갈음하고 있다. 권위주의가 기후정책을 지배하면서 사회적·시민적 대화는 멈춰버렸다. 노동조합조차 참여의 통로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에너지 전환은 단체교섭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공통적인 노동조건을 교섭할 수 있는 초기업별 교섭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최근까지 10기의 석탄화력발전소가 폐쇄됐지만 노조는 고용문제에서조차 배제당했다. 노동조합이 자체의 힘만으로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을 위한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기후단체로서도 정부의 정책에 대응하기에 힘이 부치기는 마찬가지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지만 비판을 넘어 참여하고 개선하는 역할은 넘사벽이 되고 있다. 기후단체의 활동이 기후활동가를 중심으로 제한된 영역에 머물러 있다면 우선되는 과제는 아래로부터의 폭넓은 연대를 형성하여 시민적 저항을 동원하는 일이다. 특히 소비자이자 시민인 동시에 생산의 담당자인 노동자와 그들을 조직하고 있는 노동조합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기후정책을 바꾸는 일도 필패를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동과 기후의 만남, 즉 기후연대(climate solidarity)가 의미를 갖는다. 연대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을 합치는 것이다. 다른 조직으로부터 자원과 영향력을 빌려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연대를 통해 노동조합은 자신의 의제를 사회화하고 기후환경단체는 조직의 물적 토대를 확보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연대란 조직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은 필요하지만 차이 없음이 연대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연대의 영역은 넓다. 가령 앞서 말한 재생에너지 영역을 접점으로 삼아 노동조합과 기후단체, 그리고 지역단체가 만날 수 있다. 재생에너지의 확대는 지역재생을 꿈꾸는 지역단체는 물론 탈탄소사회를 지향하는 기후환경단체로서도 우회할 수 없는 과제다. 노동조합으로서도 일자리의 확보라는 점에서 공공이 주도하는 재생에너지의 확대는 구명조끼에 해당된다. 노동자의 이해와 에너지 전환이라는 공적 요구가 일치되면서 기후연대가 형성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논쟁해야

물론 노동조합과 기후단체의 만남이 당위만으로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신구 사회운동 사이에는 오래된 앙금 이외에도 지향하는 가치가 다르고 조직의 대상과 구조가 다르다. 서로 다른 정체성은 걸핏하면 이해관계의 충돌을 낳기도 한다.

지난 11월 18일, 산업노동학회는 정기 학술토론회의 일환으로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라운드테이블을 열었다. 노동과 환경, 지역, 청년단체가 참가했다. 기후단체는 정의로운 전환을 내세우면서도 일자리에만 매달리는 노동운동을 불편해 했다: ”정의로운 전환에 ‘정의’는 있지만 ‘전환’은 없는 것이 아닌가“. ”그 정의조차 기후정의에서 말하는 정의와 어긋난다면 그것은 언어의 오염이 아닌가“. 노동조합으로서도 기후환경운동에 대한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노동자를 정말 기후위기의 공범자로 보는가”, “탄소중립이라는 대의가 중요하다고 해서 노동자의 일자리를 희생하라는 것은 전체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향후의 지향과 관련해서도 자본주의 체제의 혁파인가, 생태사회의 구축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체제의 수정인가를 두고도 날 선 공방이 오갔다. 하지만 정부의 기후정책에는 기후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점에서는, 정도의 차이일 뿐 이견은 없었다. 노동, 지역, 기후환경, 청년이 기후정치의 실현을 위해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시로 제기되었다.

자본주의는 노동에 대한 착취와 자연에 대한 수탈을 기반으로 삼는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은 동등한 파트너로서 기존의 자본주의에 대항할 공통의 연대기반을 갖는다. 노동운동을 기후위기 대응의 주체(climate actors)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기후운동으로서는 숨겨진 신의 한 수를 꺼내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18일, 산업노동학회에서 열린 라운드테이블은 기후연대를 공론화한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토론이 끝난 후 참석자들은 기후연대를 위해 보다 체계적이고 연속적인 토론프로그램을 갖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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