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의 회계 공시 수용이 '노동 개혁'이라는 억지
정부·보수언론 “개혁 뚝심있게 추진한 성과”
양대 노총 “조합원 불이익 막으려는 고육책”
시행령 꼼수 개정으로 노조 회계 공시 강요
"노동 개혁이 아닌 노조 활동 옥죄려는 것"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정부와 보수언론이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회계 공시 참여 결정을 자기 입맛에 따라 견강부회로 해석하고 있다. 양대 노총은 조합원들이 부당하게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울며 겨자 먹기로 회계 공시를 수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부와 보수언론은 "노동 개혁을 뚝심 있게 추진한 성과"라며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는 조합원들이 회계 내용을 볼 수 있는 규정이 있다. 이를 근거로 양대 노총은 처음부터 회계 공시를 반대했다. 그러나 정부는 ‘노조 회계 투명성 강화’를 명분으로 공시를 강요했다. 양대 노총이 모두 이를 거부하자 노조법과 소득세법 시행령을 개정하는 꼼수를 동원해 노조 회계 공시를 밀어붙였다.
윤석열 정부는 노동자의 근로 환경 개선과 일자리 창출 등 노동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계와 머리를 맞대기는커녕 처음부터 반노동 정책으로 일관했다. 회계 공시제도 역시 노조 활동을 옥죄려는 방안으로 추진됐다.
노조법에 따라 노조는 이미 회계 결산 결과를 조합원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노조 재정을 관리, 감독할 규정이 필요하다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말 “노조 부패 방지와 투명성 강화가 우리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노동자 복리 증진에 필수적”이라며 노조 회계 공시시스템 구축을 지시했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지난 2월 조합원 1000명 이상 노조와 연합단체에 회계장부 점검 결과를 보고하도록 했다. 양대 노총은 정부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판단해 자료 제출과 현장 조사를 거부했다.
조합원뿐 아니라 정부가 볼 수 있도록 노조 회계를 공시하게 하려면 노조법 등 관련 법을 개정하는 게 원칙이다. 정부는 거대 야당이 국회 의석을 장악한 상황에서 법 개정이 어렵게 되자 시행령을 바꾸는 수법을 썼다.
개정된 시행령에 따르면 조합원 1000명 이상 노조 또는 산하 조직은 회계연도마다 결산 결과를 공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시행령은 처음 예고했던 것보다 3개월 앞당긴 이달 초부터 시행됐다. 이에 따라 다음 달 30일까지 2022년도 결산 결과를 시스템에 공시해야 조합원이 내년 1월 연말정산 때 15%의 조합비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상급 단체가 공시하지 않으면 회계를 공시한 산하 노조의 조합원도 세액공제를 받을 수 없다. 양대 노총이 회계 공시를 수용하지 않으면 다수의 조합원이 경제적 불이익을 받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고용부에 따르면 회계 공시 대상인 노조 상급 단체와 산하 조직은 670여 곳에 달한다.
한국노총에 이어 민주노총이 회계 공시에 동참하겠다고 발표하자 정부는 노사법치가 실현됐다며 적반하장식 해석을 내놨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노사법치를 기반으로 노사 관계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 개혁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노조 민주성과 자주성이 한층 더 높아지고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투명성이 제고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당과 보수언론도 맞장구를 쳤다. 국민의힘은 25일 “정부의 단호하고 원칙 있는 대응으로 노동 개혁이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으며 양대 노총은 노동계의 낡은 관행에서 탈피할 계기를 맞았다”는 논평을 냈다. 조선일보는 25일자 사설에서 “노조 회계 공시는 노동 개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며 “정부가 원칙을 지키며 흔들림 없이 잘못된 관행에 제동을 걸고 불법행위에 대해선 신속하고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제도 이날 사설에서 “노조 회계 공시제도 수용은 막 오른 긴 노동 개혁의 출발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나 노동계에서는 노조 회계 공시를 법률로 강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미 있는 노조법에도 회계 투명성을 규제하는 조항이 있을 뿐 아니라 노조의 회계 운영을 모든 국민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지나친 측면이 있다.
노조 회계 공시는 노동 개혁이라고 볼 수 없다. 윤석열 정부의 반노동 정책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도 희망 사항일 뿐이다. 양대 노총은 조합원이 부당하게 불이익을 받는 사태를 막기 위한 고육책으로 회계 공시를 수용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민주노총은 노조 활동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배제하는 내용으로 노조법과 소득세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한국노총도 상급 단체가 회계를 공시하지 않으면 산하 조직까지 세액공제 혜택에서 제외되는 ‘연좌제’ 규정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기로 했다. 양대 노총은 다음 달 11일 노조 회계 공시를 비롯한 정부의 반노동 정책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도 개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