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해하는 미국…저사양 AI 칩까지 대중 수출통제

미국 반도체 지수 하루 만에 100조 증발

대표 기업 엔비디아는 장중 7.8% 급락

“국가 안보 개선? 산업 생태계만 파괴”

중국 “시장경제 공정 경쟁 원칙 위반”

한국 기업들도 중장기적으로는 부담

2023-10-18     장박원 에디터

미국 정부가 17일(현지시간) 발표한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는 세계 반도체 산업 생태계에 큰 혼란을 야기할 뿐 아니라 자국 기업에 엄청난 피해를 주는 자해 행위나 다름없다. 더 나아가 세계 교역을 위축시켜 한국을 포함해 수출 비중이 높은 국가의  경제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봐야 할 사안이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이 9월 19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하원 과학우주기술위원회의 반도체법 1년 평가 청문회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2023.09.20. UPI 연합뉴스

대중국 추가 수출 통제 조치가 발표된 직후 미국 증시에서 반도체 업종 시가총액은 하루 만에 100조 원 가까이 증발했다. 반도체 종목 30개로 구성된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PHLX)가 17일 약 730억 달러 급락했다. 저사양 인공지능(AI) 칩이 통제 대상에 포함되면서 미국 대표 기업이자 AI 반도체 강자인 엔비디아 주가가 된서리를 맞았다. 이날 뉴욕증시에서 엔비디아는 장중에 7.8%까지 떨어졌다. 인텔 등 다른 반도체 업체 주가도 일제히 하락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가 이날 발표한 조치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AI 칩의 통제 기준을 낮은 사양의 제품까지 기준을 높였고 수출 허가 대상을 40여 개 국가로 확대했다. 저사양 반도체 칩 수출을 금지하기 위해 단위 크기당 성능을 나타내는 ‘성능 밀도’를 새로운 기준으로 추가했다. 이에 따라 엔비디아가 사양을 낮춰 중국용으로 만든 AI 칩도 수출이 힘들게 됐다. 엔비디아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번 조치는 중국이 반도체 기술 개발에 활용할 소지가 있는 제품에 대해선 최고급 칩이 아니라도 통제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의도가 반영됐다. 이는 중국의 대표적인 정보통신기술 기업인 화웨이가 최근 출시한 스마트폰에 자체 기술로 만든 고성능 칩을 탑재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우회 수출 방지를 위한 적용 대상과 지역을 대폭 확대한 것도 이번에 추가된 내용이다. 중국에 있는 기업에서 중국 본사의 해외 사업체나 미국이 자국 무기 판매를 금지한 국가로 수출 허가 대상을 늘린 것이다. 미국의 우방국에 있는 중국 회사의 사업체가 반도체를 수입해 중국에 몰래 반입하는 ‘구멍’을 비롯해 대중국 제재의 우회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곳을 모두 막으려는 취지로 볼 수 있다.

둘째 식각·노광·증착·세정 등 12개 카테고리의 반도체 장비를 통제 대상에 추가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인 ASML의 심자외선(DUV) 노광장비와 관련 부품의 중국 수출을 차단하기 위한 '깨알 규제'로 분석된다. 반도체 장비에 대해서도 미국이 자국 무기 판매를 금지한 21개국으로 허가제를 확대했다.

셋째 엔비디아의 전직 직원이 창업한 스타트업기업 ‘상하이 비렌 인텔리전트 테크놀로지’와 ‘무어 쓰레드 인텔리전트 테크놀로지’ 등 13개 중국기업을 제재 대상에 새로 넣었다. 이로써 지난해 10월 발표했던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 방침의 구체적인 규정이 확정됐다. 미국 정부는 기술 수준 변화에 맞춰 해마다 최소 1회 규정을 새롭게 정비할 계획이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 주요 내용. 연합뉴스

미국은 첨단기술이 중국의 군사력 증대 등에 사용되는 막기 위해 반도체 수출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노트북과 스마트폰, 게임 콘솔 등 소비재에 사용되는 반도체 칩은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도 사전 브리핑에서 “지난해 10월 발표했던 규제의 구멍을 막아 중국의 군사적 발전을 막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은 무기한 제재 유예 조치를 받았기 때문에 당장 큰 피해는 없다. 이들 기업은 최근 미국 정부로부터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방식으로 미국 반도체 장비의 중국 공장 반입에 대해 무기한 제재 유예 조치를 받았다. 산업통상자원부도 18일 보도 참고 자료에서 “첨단 AI 칩의 경우 국내 생산이 미미하고 소비자용 칩은 통제에서 면제될 수 있어 한국 기업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 수출 통제가 반도체 기술 발전을 저해하고 산업 생태계를 파괴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 기업도 중장기적으로는 부담이 커질 게 뻔하다. 엔비디아는 17일 정부에 제출한 자료에서 “적시에 제품 개발을 완료하고 기존 고객을 지원하거나 일부 지역에 제품을 공급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미국 정부도 인정하고 있다. 러몬도 장관은 “군사 기술과 상업 기술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도 비판에 가세했다. "광범위하고 일방적인 규제는 해외 고객이 다른 곳을 찾도록 유도해 미국 안보는 개선하지 못한 채 반도체 생태계에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출 통제를 받는 당사국인 중국 정부도 즉각 항의했다. 주미 중국대사관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정치적 목적을 위한 자의적 통제나 (중국과의) 강제적 탈동조화 모색은 시장경제 원칙과 공정 경쟁 원칙 위반한 것으로 단호히 반대한다”고 했다.

 

반도체 회로기판의 '메이드 인 차이나'와 오성홍기가 선명하다. 2023.02.17. 로이터 연합뉴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는 미국 정부의 목표가 달성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미국의 중국 배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시장조사업체 IDC의 최근 조사를 인용해 글로벌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시장에서 중국의 점유율이 2027년에 29%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올해보다 2%포인트 증가한 수준이다. IDC는 “중국 내 반도체 수요 증가와 반도체 산업을 전폭 지원하는 국가정책에 힘입어 성숙 공정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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