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주니 게을러져서 일을 안 한다고? 천만에요"

영국 기본소득 주창자 가이 스탠딩 교수 인터뷰

“세계 각국에서 실험해보니 되레 고용 늘어"

'노동소득 < 자본소득' 현상타개는 기본소득 지급"

“재원은 탄소, 바다, 토지 등 공유물 부담금으로"

2023-08-24     박승철 기자
가이 스탠딩 영국 SOAS 교수가 23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8.24.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제공

가이 스탠딩 영국 런던 아시아·아프리카 대학(SOAS) 연구교수가 “세계 각국에서 기본소득 실험을 해보니 고용이 오히려 늘었다”면서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사람들이 게을러져서 일을 안 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23일 서울 이화여대 ECC관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 참석한 스탠딩 교수는 시민언론 민들레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기본소득의 효용성과 의의에 대해 강조했다.

스탠딩 교수는 기본소득의 가장 중요한 의의에 대해 ‘불평등 완화’를 꼽았다. 스탠딩 교수는 “한국을 포함한 대다수 나라에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면서 “근본 원인은 과거처럼 새로 창출된 소득이 노동과 자본에 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소득이 자본에 귀속되고 노동에는 더 적게 귀속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소득은 노동자의 노동에서 발생하기 보다는 갈수록 이자, 배당, 지대, 자본 차익 등 자본 소득에서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탠딩 교수는 “이러한 경향성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기본소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코로나 팬데믹 등 불확실성 확대…인간의 기본적 안전망 보장해야"

기본소득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경제적 불확실성’의 확대다. 코로나19 위기 등 경제적 불확실성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스탠딩 교수는 “팬데믹, 자연재해, 경제 위기 등으로 촉발되는 경제적 불확실성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면서 “정치적 양극화도 앞으로 더 심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는 기본적인 안전망이 필요하며 기본소득이 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본소득의 재원에 대해 스탠딩 교수는 공유물 자본 펀드(Commons Capital Fund)를 제안했다. 전 인류가 공유하는 공유물로부터 이익을 얻거나 공유물을 훼손하는 경우 이에 비례하는 부담금을 걷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부담금(levy)과 세금(tax)을 명확히 구분했다. 스탠딩 교수는 “세금은 걷어서 정부에 귀속되는 것이며 부담금은 공유물 자본 펀드에 귀속되는 것”이라면서 “부담금은 원래 우리가 갖고 있는 공유물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위해 부과해야 하는 것으로 공유물 자본 펀드를 통해 기본소득으로 분배되는 곳에만 쓰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공유물로부터 나오는 이익이 소수에게 귀속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를 일정하게 환수해 균등하게 나누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탠딩 교수의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인류의 공유물로부터 발생한 이익 또는 보상금을 환수해 전 인류가 기본소득으로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본소득의 아이디어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정신과 일치한다”면서 “인류 공유물에 대한 개인의 기본적 권리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이 스탠딩 영국 SOAS 교수가 23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8.24.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제공

그렇다면 스탠딩 교수가 말하는 공유물이란 무엇일까? 스탠딩 교수는 “인류가 선조로 물려받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자산”이라면서 “지구는 원래 인류 공동의 것인 만큼 공동 자산을 통해 누구나 평등하게 이익이 배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탄소, 바다, 토지, 지적재산권, 자연 자원 등 공유물 부담금의 대상이 되는 20가지를 제시했다. 스탠딩 교수는 “토지를 제외하면 내가 제시한 공유물 20가지는 대부분 기존 국가의 과세 대상이 아니다”라면서 “이들 공유물을 이용해 이익을 얻거나 훼손하면 부담금을 내야하고 이것이 기본소득으로 분배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기본소득은 세대간 평등 보장을 위한 수단"

그는 세대 간 평등의 관점에서 자연 자원에 대한 부담금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스탠딩 교수는 “만약 고갈되고 있는 인류의 공유 자원을 이용해 누군가가 이익을 얻는다면 이익 중 일부를 부담금으로 환수해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활용해야 한다”면서 “석유, 가스 등은 원래 인류 공유물인데 누군가 채취해서 이익을 얻고 있다면 이는 미래세대의 이익을 취하는 의미도 있어 세대 간 평등의 관점에서도 부담금 환수는 정당하다”고 말했다.

인류 공동의 공유물은 한 국가의 국경으로 한계 지을 수 없는 지구적 공유물이다. 그가 공유물로서 최근 가장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분야인 바다도 그렇다. 스탠딩 교수는 “1982년에 채택된 해양법에 관한 UN 컨벤션은 이미 각국의 경제수역을 넘어서는 공유해역에 대한 이용 이익의 국가별 분배를 규정하고 있다”며 “바다가 정치경제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데 놀랄 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바다에 있는 물고기도 원래 인류 공유 자산인데 누군가 획득한다면 부담금을 내야 한다”며 “중국 어선이 한국 바다에서 물고기를 획득한다면 마찬가지로 부담금을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만약 공유물로부터 사적 이익을 얻는 집단이 글로벌 대기업이라면 부담금을 지우는 데 대한 정치적 반대를 극복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이들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이 많지 않다 하더라고 이들 기업들은 언론, 정치권 등의 네트워크와 후원 등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스탠딩 교수는 “공유물을 통해 각 개인이 배당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 개개인이 안다면 이러한 정치적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기본소득은 20세기의 정치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스탠딩 교수는 “기본소득은 사회민주당, 기독교민주당, 신자유주의 등 20세기 사조와는 전혀 다른 21세기의 정치”라면서 “일부 우파에서 기본소득을 공산주의라고 비판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공산주의는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분배하는 시스템”이라면서 “기본소득은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권을 주는 시스템으로 공산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민주당의 정책도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스탠딩 교수는 “소득세 등 세제를 통해 분배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회민주당의 접근은 ‘조세 회피처(Tax Haven)’ 등을 포함한 여러 방식을 통해 무력화된다”면서 “사회민주당적 접근도 20세기 방식”이라고 말했다.

 

가이 스탠딩 영국 SOAS 교수가 23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8.23.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제공

"밀턴 프리드먼의 안전망 강조…기본소득 근거로서 중요"

기본소득은 전통적인 개념의 좌파, 우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 스탠딩 교수의 주장이다. 또한 근대적 복지 국가와도 그 맥을 달리한다. 그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유명한 비버리지 시스템이나 비스마르크식 복지 등 과거 시스템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면서 “기존 복지는 선별적으로 지급된다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선별 작업에 행정비용이 들고 불평등이 생긴다”면서 “물론 실업, 장애 등 추가적 필요가 있는 계층에게 복지 급여가 지출되어야 하지만 기본소득은 공유물에 대한 개인의 기본적 권리 차원에서 지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수주의 경제학자이자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지적 영향력을 끼친 밀턴 프리드먼이 기본소득에 관해 주장한 것에 주목했다. 밀턴 프리드먼은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부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와 ‘보장된 소득(Guaranteed income)’을 언급했다. 일을 하지 않아도 무상으로 일정 금액이 지급된다는 점에 있어 기본소득의 아이디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스탠딩 교수는 “밀턴 프리드먼이 ‘사람들은 안전망이 보장되지 않으면 합리적일 수 없다’고 말한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간의 합리성은 경제학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가정인데 기본적인 생존 자체가 불안한 인간이 합리적일 수 없다는 의미다. 돌려서 말하면 인간의 기본적 안전망이 갖춰진 상태에서만 경제가 합리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의 아이디어가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데도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스탠딩 교수의 기본소득 주장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보편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데 있다. 그는 “나는 보편 기본소득(UBI)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기본소득(Basic Income)이라는 용어만 사용한다”고 말했다.

그가 보편 기본소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이민자와 이주민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탠딩 교수는 “만약 한 국가에서 기본소득을 지급한다고 하면 다른 나라에서 이주민이 몰려들 것”이라면서 “기본소득은 이주 후 일정 기간이 지난 후와 같은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킨 다음에 지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보편기본소득이라고 하면 국적과 관계없이 누구나 지급한다는 의미로서 이민자에게도 즉각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기본소득이라는 말을 쓴다”면서 “이주민에 대한 지원은 기본소득과는 별개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기본소득 실험에서 공통적으로 후생 향상 관측"

스탠딩 교수는 영국에 살고 있다. 기본소득당이 없는 영국에서도 기본소득 정책을 지지하는 정당이 있을까? 스탠딩 교수는 “영국 녹색당이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스코틀랜드 민족당, 스코틀랜드 노동당, 웨일스 노동당도 기본소득을 지지한다”면서 “노동당의 여러 단위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지만, 아직 노동당 중앙에서 지지하지 않으며 보수당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기본소득이 노동당과 보수당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전선에 있는 주제는 아니다”라면서도 “잉글랜드의 34개 지역에서 기본소득 파일럿(실험) 프로그램을 요청하는 등 대중의 관심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스탠딩 교수는 지금까지 여러 지방정부와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해 왔다. 그는 “웨일스의 고아 등을 보살피는 ‘캐어 홈(Care Home)’에서 수백 명을 대상으로 실험했다”면서 “실험 이후 여론조사에서 매우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어 “인도 마디아 프레디시주에서 6000명을 대상으로 실험했고, 나미비아, 핀란드, 캐나다 등지에서도 실험이 진행됐다”면서 “많은 실험 결과 영양 상태와 건강이 개선되고 의료 서비스 접근권이 향상됐으며 여성의 지위도 상승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불평등이 감소했으며 특히 고용이 증가했다는 점은 기본소득을 주면 사람이 게을러진다는 주장과는 정반대 결과”라면서 “기본소득이 사람들에게 자신감과 에너지를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가이 스탠딩 영국 SOAS대 연구교수는 세계 기본소득 운동의 창시자로 불리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의 공동 설립자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노동경제학 박사인 그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사회경제 안전망 담당 이사로 오랫동안 재직했다. 저임금과 불안정 노동으로 고통받는 새로운 사회 계급인 ‘프리카리아트(Precariat)’라는 용어를 창시해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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