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동결자금, 주인 찾았지만 10억 달러 줄어든 까닭

한국, 60억 달러만 송금…4년 3개월 원화 가치 하락

윤 정부, 적대 의식 없애야 이란과 관계 정상화 가능

한국, 이란과 1962년 수교…제재 가담 후 관계 악화

미 공화당 강경파 "동결자금 해제는 몸값 지불 불과"

2023-08-13     이유 에디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뉴멕시코주 벨렌 소재 아르코사 풍력 타워를 방문해 경제 관련 연설을 하고 있다. 이날 연설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아르코사 풍력 타워를 사례로 들며 자신의 행정부 입법 성과를 강조했다. 2023.08.10 연합뉴스

한국에 동결됐던 이란 자금이 비로소 제 주인을 찾게 됐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대이란 제재 복원의 하나로 이란중앙은행을 제재 명단에 올린 탓에 한국의 은행들에 설치한 원화 계좌들이 2019년 5월 동결되고 4년 3개월 만이다.

미국과 이란은 10일 이란에 수감된 미국인들을 석방하는 대신에, 한국과 이라크에 동결된 100억 달러(약 13조3000억 원) 상당의 이란 자금 해제와 미국에 수감된 일부 이란인 석방 등에 전격 합의했다.

이란 "동결자금, 원화 가치 하락에 10억 달러 줄어"

합의에 따라 한국의 우리은행과 IBK기업은행 등에 동결된 60억 달러(약 8조 원) 규모의 이란 원화 자금은 3국인 스위스에서 유로화로 환전된 뒤 카타르 소재 이란 은행들의 계좌에 예치 절차를 밟고 있다. 이란은 미국 금융기관을 거치는 달러화 송금은 꺼렸다는 후문이다. 송금이 완료되기까진 적어도 5~6주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

 

12일 이란 테헤란에서 한국 내 동결 자금 해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는 모하마드레자 파르진 이란중앙은행 총재는 2023 08. 12 [IRNA 통신 홈페이지] 시민언론 민들레

모하마드레자 파르진 이란중앙은행 총재는 12일(현지 시간) "한국에 동결된 이란 자금 전액이 해제됐으며, 제3국이 이 자금을 받아 원화에서 유로화로 환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이란 관영 IRNA 통신이 전했다. 이어 "유로화로 환전된 자금 전액이 곧 카타르 소재 이란 은행 6곳의 계좌에 예치된다. 제재 대상이 아닌 물품 구매에 쓰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파르진 총재는 "한국의 은행들에 지난 몇 년간 이란 자금 약 70억 달러가 이자도 없는 상태로 묶여 있었다"며 "심지어 달러 대비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이란 자금의 가치가 10억 달러 가까이 줄어들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동안 동결자금 문제는 한·이란 관계 악화의 주범이었다. 이란으로선 원유를 판매하고 마땅히 받아야 할 막대한 대금을 미국의 제재를 구실로 한국이 갚지 않는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는 데 불만이 적지 않았다. 조속한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한국을 압박했음은 물론이다.

서방의 경제제재와 코로나19 팬데믹이 겹치면서 극심한 경제난을 겪은 이란은 한국 등 외국에 동결된 자금을 회수하려고 동분서주했으며, 한국을 상대로도 '핵 합의' 복원 협상과는 별개로 동결된 원유 판매 대금을 돌려줄 것을 계속해서 요구해왔다.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설치된 태권도 품새를 본 뜬 조형물. 2023 08. 11 [강남구 제공] 연합뉴스

한국, 이란과 1962년 수교…제재 가담 후 관계 악화

2020년 6월에는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직접 한국에 동결자금 해제를 요구했다. 그는 "한국이 이란을 상대로 기초 생필품, 의약품, 인도주의 물품을 사기 위한 중앙은행의 자원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란은 행동으로 옮기기도 했다. 2021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가 호르무즈 해협의 오만 인근 해역에서 한국 국적 선박을 억류했다가 약 석 달 만에 풀어줬다. 당시 원유 판매 대금을 한국이 동결한 채 갚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 주된 까닭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란은 1962년 중동에서 최초로 우리나라와 수교한 이후 60여 년간 교역 및 우호 협력 관계를 이어온 나라였으나, 미국이 핵 개발 추진 등을 문제 삼아 이란을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하고 가혹하게 제재하는 과정에 한국도 개입하면서 한·이란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최대 걸림돌이 제거되면서 한·이란 관계도 점차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11일 미국과 이란이 한국 내 이란 동결자금 해제에 합의한 것에 대해 "한국 정부와 사전에 폭넓게 공조했다"고 말했다.

 

15일 UAE 파병 아크부대 장병 격려하는 윤석열 대통령. 2023. 01. 15. 연합뉴스

윤 정부, 적대 의식 없애야 이란과 관계 정상화 가능

그러나 갈 길은 멀다. 지난 1월 15일 아랍에미리트(UAE)에 파병된 아크부대에서 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UAE의 적은 이란" 발언에서 보듯이 이란에 대한 적대적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한쪽이 다른 쪽에 적대감을 지닌 상태에서 진정한 관계 정상화는 불가능하다.

당시 윤 대통령은 우리의 아크부대 장병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UAE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고 우리의 적은 북한이다"라고 '폭탄 발언'을 했다. 나아가 "여기가 바로 여러분들의 조국"이라며 "우리 형제 국가인 UAE의 안보는 바로 우리의 안보"라고까지 했다. 이란에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아크부대의 적은 이란'이라는 취지로 비칠 우려가 적지 않았다.

즉각 이란은 나세르 칸아니 이란 외무부 대변인 성명(1월 16일)을 통해 윤 대통령을 "그 한국 당국자(the South Korean official)"라고 비칭까지 동원하며 거세게 반발했다. 그는 "외교적으로 부적절한 한국 대통령의 발언" "한국 대통령의 참견" 등의 표현을 쓰기도 했으며, UAE-이란 간 역사와 관계 발전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윤 대통령의 '무지'를 꼬집기도 했다.

이틀 후인 18일에는 레자 나자피 법무·국제 담당 차관이 윤강현 주이란 대사를 불러 "한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이란의 강력한 항의"를 전달했으며, 한국 내에 동결된 이란 자금과 관련해 칸아니 대변인은 "서울 당국이 분쟁 해결을 위한 효과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란은 양국 관계를 재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11일 이란 테헤란 타즈리시 바자르(전통시장)에 인파가 북적이고 있다. 2023.8.13. 연합뉴스

미 공화당 강경파 "자금 동결 해제는 몸값 지불에 불과"

이번 이란 자금의 동결 해제는 미국과 이란의 '스몰딜'의 결과이며, 이란과 P5+1(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독일) 간의 JCPOA 복원과 제재 해제라는 '빅딜'은 미지수다.

2021년 1월 출범한 조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가 파기한 JCPOA의 복원을 공언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올해 미국이 이란과 물밑에서 핵협상을 진행하면서 변화가 감지됐다.

지난 6월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뉴욕에서 수감자 석방과 핵 협상 재개를 위한 미·이란 고위급 협의가 시작됐으며, 이런 움직임과 맞물려 미국은 6월 이라크 정부가 이란에서 수입한 전기·가스에 대한 대금 25억 유로(약 3조5000억 원)의 지급을 승인했다.

한편, 수감자 맞교환과 동결자금 해제를 골자로 한 이번 합의에 대해 공화당 등 미국의 대이란 강경파들은 이번 동결자금 해제 합의가 "몸값 지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스라엘 총리실도 12일 성명을 통해  "핵 기반 시설 해체가 빠진 합의로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멈출 수 없으며, 이란의 후원을 받는 테러 그룹에 갈 돈만 지원하는 셈"이라고 미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연합뉴스에 "지불해야 할 대금을 지불하지 않은 상황이 한-이란 관계에 있어 굉장히 우리를 불리하게 만들어 왔다"고 말했다. 동결자금 해제에 대해 그는 "당분간 예전처럼 (관계가) 급물살을 타기는 어렵지만 이란이 가진 잠재력은 엄청나다"며 "(이란)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소프트파워 증진 전략을 먼저 구상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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