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선글라스 참배와 붕장어
여러분, 어떻게 보셨나요?
전문가 "규정은 없지만 의전상 부적절"
여전히 세심한 배려 없는 대통령 의전
희생자 추모 날 붕장어 들고 함박웃음
온라인에선 '애국 장어 열사' 비아냥도
6·25 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이었던 지난 27일,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을 찾았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유엔군 위령탑을 참배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실도 '현직 대통령 최초'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습니다.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의 서면 브리핑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부인 김건희 씨와 함께 유엔군 위령탑에 헌화하고 묵념하며, 세계평화와 대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희생을 기렸다고 합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산화한 4만여 명의 전사자들 넋을 기리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참배 사진 중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새까만 선글라스였습니다.
2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윤 대통령이 낀 선글라스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5월 방한했을 때 선물한 것이라고 합니다. 윤 대통령은 헌화를 하고 묵념할 때도 모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실 관계자에게 여러 차례 문의해도 답변이 없어서 선글라스를 낀 의미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눈 보호를 위하거나 멋내기용일 수도 있고, 정전 70주년을 맞아 한미동맹을 강조한다는 상투적인 의미에서 착용한 일종의 '소품'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이 선글라스를 끼고 헌화·묵념을 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행안부 국민의례 규정에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방법을 "바른 자세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고만 규정하고 있고, 선글라스 착용에 대해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행안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행안부는 국민의례 관련해서 규정하고 있지만 참배 관련 규정은 없다"면서 "국민의례에도 선글라스 규정이 없기 때문에 참배할 때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고 규정상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국가보훈부 관계자 역시 "통상 묵념을 할 때 제복을 입지 않으면 모자를 벗어주라고 요청하지만, 쓰는 사람도 있다"며 "마찬가지로 선글라스도 의료 목적으로 쓰시는 분이 있기 때문에 벗지 않아도 문제를 삼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규정에 없어도 묵념할 때 으레 모자를 벗듯이 선글라스도 벗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남지만, 속시원한 설명은 없었습니다.
주변 기자들도 이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습니다. "어떻게 참배하는 데 쓸 수 있느냐" "장례식에서 선글라스를 끼면 예의가 아닌데, 참배하는 자리에서 맞지 않다"는 격앙된 반응도 있었지만,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의견도 적지 않았습니다.
어느 쪽이든 대통령이 선글라스를 끼는 자체가 TPO(Time·Place·Occasion, 시간과 장소, 상황에 따라 의복을 착용하는 것)에 맞지 않는다 쪽에는 동의하는 분위기였지만, '선글라스를 끼는 자체가 문제가 될까?'라는 질문에서 명확한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쯤되니 구한말 조선의 외교 고문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도 고종을 알현할 때 안경을 벗고 어전에 나섰지만 이제는 안경을 쓰는 게 예의를 어기는 게 아니듯, 규정에도 없는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게 무슨 문제인가도 싶어집니다.
프로야구도 경기 시작 전 국민의례를 할 때 야구 선수들이 선글라스처럼 생긴 고글을 낀 채 애국가를 부르고, 햇볕이 뜨거운 5월에 열리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제에도 수많은 이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참배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요즘은 건강 차원에서 선글라스를 끼는 사람들도 늘어서 '필수 아이템'처럼 자리잡은 부분도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과거엔 군인들이 선글라스를 끼는 데 제약이 많았지만, 요즘은 장병 건강권을 고려해 경계근무를 할 때도 착용이 허락됩니다.
그럼에도 어떤 정치인의 말대로 영부인의 명품 쇼핑도 '외교'라면, 한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선글라스 착용 역시 일반인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에게도 물어봤습니다.
보훈과 의전 문제를 오랫동안 다뤄온 전문가들의 의견은 정부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대통령의 선글라스 착용은 일반인과 구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특히 유엔군 위령탑 참배에 있어서 선글라스는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보훈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특수지상작전연구회(LANDSOC-K) 문형철 연구원(육군 예비역 소령)은 "선글라스에 관대한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통령이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선글라스를 끼거나 우산을 받쳐 쓰고 참배를 한 적이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그런 사례는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문 연구원은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역시 승전 기념행사나 조문에 참석했을 때 쓰던 우산을 접고 맨몸으로 간 것은 '존중의 의식'이 배어 있기 때문"이라며, 윤 대통령의 선글라스 착용 사례에 대해 "국가 수장이고 호국 보훈을 강조한 분이 선글라스를 잠시나마 벗는 게 힘들었을까"라고 말했습니다.
의전 분야 전문가인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선글라스 규정은 없지만, 규정이 없는 이유는 굳이 규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상식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라며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게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참배할 때 대통령이 선글라스를 낄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규정 자체가 없다는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나 정치인과 같은 권력자들의 선글라스 착용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대해 왔을까요. 과거 독재 정권 시절, 선글라스는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최근에 들어와서는 오히려 잘못된 착용이 무례함의 징표로 비쳐졌습니다.
최근 '수해 골프'로 당원권이 10개월 정지된 홍준표 대구시장은 골프광(?)답게 2015년 경남도지사 시절에도 '제1회 경남도지사배 공무원 골프대회'를 열고, 개막식에서 선글라스를 쓴 채 국민 의례를 해서 논란이 됐었습니다.
당시 급식지원 중단 등으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홍 시장의 골프대회 개최와 선글라스 국민의례에 대해 도의원이 비판을 하는가 하면, 방송에서는 '박정희 코스프레'라는 비아냥도 나왔습니다.
권력자의 선글라스 착용 문제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2021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을 만나면서 선글라스를 벗지 않아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찰스 왕세자의 전 집사인 그랜트 해럴드는 바이든 대통령의 선글라스 착용에 대해 "눈을 맞추는 것은 소개를 하는 자리에서 매우 중요하다"면서 "실제로 여왕을 만났을 때는 선글라스를 벗었어야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랜트는 "선글라스 착용은 예의 범절을 어긴 것"이라며 "햇빛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이 눈이 부셨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여왕은 선글라스를 착용하지 않았고, 영부인인 질 바이든 여사도 선글라스를 착용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몇몇 사례만 엿봐도 동서를 막론하고 권력자, 특히 대통령의 선글라스 착용은 의전에 있어서 여러가지를 고려해야 할 신중한 소품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선글라스가 군대 행사에서 강인함을 보여주는 상징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 착용하면 무례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엔군 위령탑을 참배했던 윤 대통령의 선글라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김건희 씨나 다른 참석자들도 대부분 선글라스를 안 썼고, 그 작은 소품 하나로 한미 동맹이 강화되는 것도 아닐진데, 굳이 건강 문제가 없다면,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갈라지는 참배 장소의 선글라스 착용은 배제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한편으론 윤 대통령이 타국 국기에 대해 여러 차례 경례를 해 물의를 빚었던 것처럼, 대통령실 내에 여전히 세심한 의전 프로토콜을 전담할 인력이 없는 것으로 보여 우려도 됩니다. 오죽하면 정치권에서 '대통령실이 탁현민 의전 비서관을 데려오고 싶어한다'는 풍문이 돌았을까 싶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할까요. 세심하지 않은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모습은 비단 선글라스에서만이 아닙니다.
300만 명의 희생자, 4만 여명의 유엔군 전사자를 기리는 정전협정 70주년의 핵심은 전쟁과 죽음에 대한 기억, 그리고 애도일 것입니다. 아무리 기념식 장소가 부산이라지만, 1454자(공백 제외)밖에 되지 않은 짧은 대통령 기념사에서 굳이 부산 엑스포 유치를 광고하는 게 적절했는지 의문이 남습니다.
아울러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참전용사들의 넋을 추모하며, 깊은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던 대통령은 기념식 직후, 그의 부인과 함께 부산 자갈치 시장을 방문해 붕장어를 들어올리면서 "이게 미끌거리네! 아이고, 이게 막 붙네"라며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어보였습니다.
후쿠시마 핵 폐수 해양 투기를 용인해 비판을 받는 대통령이 수산물 소비 촉진을 명분으로 부산 지역 민심을 모두 잡기 위해 이러한 일정을 끼워넣은 것으로 해석되지만, 희생자를 추모하는 날에 활짝 웃는 사진을 국민들에게 공개했어야 하나 싶어집니다.
미국에서 정전 기념일은 공휴일은 아니지만 이날 하루 백악관을 비롯한 모든 연방정부 건물에 조기(弔旗)를 거는 추념일이자, 잊힌 전쟁과 그보다 더 잊힌 참전군인들의 희생을 기리는 날이라고 합니다(7월 27일자 기사 참고). 당사자인 우리는 더더욱 웃음을 감추는 미덕이 필요한 날 아닐까 싶습니다.
자갈치 시장 일정 뒤, 온라인에는 윤 대통령 손을 물어뜯은 붕장어에게 '애국 장어 열사'라는 별칭을 붙이는 우스개까지 나돌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핵폐수 해양투기, 민생경제 위기, 김건희 씨 일가 고속도로 특혜 의혹, 오송 지하차도 참사 등으로 민심은 점점 흉흉해지는데 웃고 다니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싸늘한 시선이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낱 붕장어에 왜 그런 거창한 별명이 붙었는지 윤 대통령 스스로가 한 번이라도 곱씹어 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