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 '평화', 두 개의 세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지배수단 세련될수록 가혹해지는 폭력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느닷없이 ‘두 개의 세상은 어떻게 탄생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지루한 장마 끝자락에 미처 찬란한 해가 뜨기 전에 약간 골치 아픈 질문이 치솟은 건 어인 일?
서울 서이초 신입(2년차) 선생님이 1학년 담임을 맡았다가 마음고생만 잔뜩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일 자체만 해도 버거운 일인데, ‘학생인권과 교권’을 대립시키며 민주당 전 정권 탓만 해대는 국힘당 현 정권을 보자니 참 갑갑하다. 그 직전엔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객관적으로 보건대 2022년 3월(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 노선 변경이 이뤄진 게 분명한데, 국힘당과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건희 고속도로’(김건희와 그 모친 땅 인근으로의 노선 변경을 비꼼)라 비판하는 민주당더러 ‘괴담 수준 의혹제기’라면서 먼저 사과하라고 맞선다.
‘김건희 고속도로’, 핵오염수 대응하는 ‘근거없는’ 자신감
더욱 기가 막힌 일은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붕괴 및 폭발 이후 방사능 폐수 문제가 일본은 물론 한국에게 엄청난 도전을 던지는데 정권이 야당들이나 환경단체들과 힘을 합쳐 막을 생각은 않고 “방사능 처리수는 안전하니 얼마든 마실 수 있다”며 엉뚱한 헛소리만 지껄이는 상황이다. 돈과 자리에 중독되면 ‘제 정신 아닌’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작년 10월의 이태원 참사로 159명 젊은 목숨이 하늘로 갔건만, 제대로 책임지는 권력자 하나 없고, 어떻게 하면 이 순간만 모면하나, 하는 생각으로 요리 빼고 저리 뺀다. 고시공부 해서 높은 자리 차지한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주무르니 자식 잃은 부모들 마음을 손톱만큼도 모른다. 대화나 토론? 갈수록 수준은 낮아지고 저질 코미디만 연출된다.
이런 일들이 지루하게 반복되니 아마도 지루한 장마와 겹쳐 과연 ‘두 개의 세상은 어떻게 탄생 하는가?’란 화두가 치솟은 게 분명하다. 얼핏 보면 민주당의 세상과 국힘당의 세상이 그 두 세상이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사태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
먼저, 일본 후쿠시마 사태에 대한 일본과 한국 정부의 ‘반’민주적 태도, 나아가 저 오만하기 그지없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나는 그 단초를 판카지 미슈라의 <제국의 폐허에서>에서 본다. 그것은 1905년 러일전쟁(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했던 사실! 생각해 보라. 약 120년 전 당시 상황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유럽 열강들이 앞 다투어 아시아를 점령하던 시기다. 따지고 보면 유럽 강국들은 15세기부터 수백 년에 걸쳐 아시아의 인도를 찾아 나섰고 ‘실수로’ 아메리카 및 아프리카 대륙에 도착한 뒤 그곳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식민주의 내지 제국주의 시대! 이 시기는 대체로 유럽 열강의 세계 정복 시리즈였다.
‘정복하라’ ‘지배하라’는 세계관이 지배하는 한 세상
그런데 이게 웬일? 1905년 러일전쟁에서는 그 낙후됐던 아시아의 일본이 (1868년 명치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결과) 유럽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를 이기고 말았다. (그 이후 조선, 중국 침략 등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제국주의 비전을 구현하려 했고, 그 여세를 몰아 1941년 미국 진주만 공격이라는 자신감으로 증폭됐다.) 그런 맥락이니 모두가 놀랄 수밖에! 예컨대, 인도 출신의 모한다스 간디(당시 남아프리카 변호사)조차 “일본의 승리가 사방 곳곳에 뿌리를 내려 이제 그 열매를 그릴 수 있게 됐다”고 흥분했고, 영국 유학 중이던 네루 역시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 역시 일본의 쓰시마 해전 승리 소식에 학생들을 데리고 벵골 지역의 작은 학교 주위를 빙빙 돌면서 승전 행진을 벌일 정도였다. (이 모두는, 한편에선 민족자결주의에 준 영감을, 다른 편에선 마치 조선과 남한의 친일파들을 상기시킨다. - ‘강자동일시’)
그리고 1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미국-일본-한국은 ‘한미일 군사동맹’을 꾀하며 새로운 강자 클럽을 형성하려 한다. 과거 유럽 열강의 세상에 대비되는 미국 동맹의 세상을 열고자 하는 것! 바로 여기에 두 세상이 존재한다. 정복자의 세상과 피정복자의 세상! 곰곰 생각해 보면 이 두 세상이 선망하는 것은 ‘정복자’ 지위다. 마치 15세기 이래 유럽 나라들이 온 세상을 정복하고자 무기와 종교, 상품을 앞세워 앞 다투어 지구를 탐험했던 것처럼, 미국은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정복자 행세를 해왔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이 새로운 열강으로 부상하자 이제 미국은 일본과 한국을 하나로 묶어 대중국 견제 세력으로 삼고자 한다.
후쿠시마 핵폐수 방류 계획에 대한 일본과 한국 정부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바로 이 맥락의 연장선이다. 한마디로, 정복자의 세계관! 솔직히 말하면 한국은 정복자도 되지 못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그늘 아래로 들어감으로써 정복자 행세를 하려 할 뿐! 정복자의 세계관에서 세상은 정복자의 세상과 비정복자의 세상으로 양분된다. 정복하라, 그러지 않으면 정복당할 것이다!
‘민중의 삶이 간섭받지 않는 평화’로운 다른 한 세상
다음으로,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또는 이태원 참사와 연관된 두 세상은 무엇인가? 이 논란들과 관련한 두 세상은 요컨대, 지도자(엘리트)의 세상과 피치자(보통사람들)의 세상이다. 지도자(엘리트)는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사법고시, 행정고시 등 ‘변별력’이 높은 고등고시(박사 포함)를 통과한 이들, 또는 최소한 일반 공무원 시험을 높은 경쟁률 속에 통과한 이들이다. 이들은 지도자 내지 통치자, 관리자 내지 통제자로 행세한다. 이들이 보는 세상은 통제 대상일 뿐, 피치자(보통사람들)의 세상과는 전혀 딴판이다. 이반 일리치 선생이 말한 바, 통치자들이 말하는 평화는 ‘아무런 반란이나 소요가 없는 안정 상태’라면, 민중이 원하는 평화는 ‘민중 스스로 살아가게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상태’다. 지도자나 통치자들은 민중을 통제함으로써 자기들의 지위나 기득권을 유지, 확장하려 하지만, 피치자인 시민들은 그저 지도자들이 정직하고 겸손한 자세로 나라 살림을 꾸려가면서 민초의 삶을 배려하기 바란다. 이 두 세상은 너무 다르다. 물론, 상당수 시민들은 (마치 한국이 일본이나 미국에 빌붙어 ‘강자동일시’ 하듯) 지도자나 통치자들에 빌붙어 작은 떡고물이라도 얻기를 바란다. 그래서 세상은 두 갈래보다 훨씬 복잡하다. 지도하라, 그러지 않으면 지도당할 것이니!
마지막으로, 서이초등학교 선생님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을 보노라면, 나는 소비자의 세상이 나머지 세상을 압도함을 느낀다. “부모는 멀리 보라 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고 합니다. 부모는 함께 가라 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고 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 하고 학부모는 꿈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라는 공익광고가 있다. 학부모라는 존재는 자녀의 성적이 마치 부모의 인생 성적표인 것처럼 그렇게 아이를 닦달한다. 자녀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부모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데 그 과정에서 학교를 상대로 학부모는 ‘소비자’ 정체성을 연마한다.
소비자 정체성의 핵심은 등가교환 법칙이다.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아이를 너희 학교에 억지로 맡겼으니, 너희들은 내 아이를 최고의 서비스로 모셔야 한다는 마인드! 소비자 정체성으로서의 등가교환 법칙은 마치 상품과 화폐를 동일 가치로 교환하듯, 세상의 모든 관계를 돈의 가치로 환원해서 생각한다. 이제 소비자의 세상은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듯하다. 여기엔 삶에 대한 책임감 같은 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돈이면 다 된다. 책임 역시 돈으로 해결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 소비자를 응대하는 사람의 세상은? 한마디로, 지옥이다. 영화 <다음 소희> 또는 <카트> 등에 나오는 진상 고객(소비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욕설, 모욕, 비난, 비열함, 모독, 수치심…, 이런 것들이 소비자를 응대하는 자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그 마지막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소비하라, 그러지 않으면 소비당할 것이다!
종교, 학벌, 돈… 지배수단이 세련될수록 가혹해지는 폭력
이제 정리가 필요하다. 정복자의 세상과 피정복자의 세상, 지도자의 세상과 피지도자의 세상, 소비자의 세상과 응대자의 세상, 이 두 개의 세상들은 과연 왜 생겨났을까? 그것은 제이슨 힉켈의 <적을수록 풍요롭다>에서 잘 묘사되듯, 인간과 지구, 주체와 객체, 우리와 그들, 이런 식으로 세상을 이분법(흑백논리)으로 보는 데서 시작됐다. 특히 자본주의 과학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이분법을 더 극단으로 치닫게 했고, 정복자와 피정복자, 지도자와 피지도자, 소비자와 비소비자의 세상을 확실히 차별화했다. 이들 세상을 이분법으로 가르는 공통분모는 결국 자본의 돈벌이(가치 증식) 시스템이다. 자본이 온 세상을 무대로 정복 전쟁을 벌일 때 정복자들의 세상이 열렸고, 각 사회 내부에는 자본의 가치 증식을 돕기 위한 지도자들의 세상이 필요했다. 나아가 각 사회마다 자본의 등가교환 원리를 내면화한 소비자들의 세상이 열릴수록 자본의 가치 증식이 쉬워졌다. 흔히 우리가 잘 아는 두 세상, 즉 자본의 세상과 노동의 세상 역시 바로 이런 측면들과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
여기서 곰곰 생각해 보면, 정복자의 세상은 무기와 종교를 등에 업고 전개됐고, 지도자의 세상은 학벌과 시험을 무기로 전개됐으며, 소비자의 세상은 화폐와 신용을 무기로 전개됐다. 갈수록 세련된 수단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장치로 개발되었지만, 그 폭력성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 수단이 세련돼 갈수록 사람의 영혼에 대한 폭력은 더 가혹해지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 지점에 서이초 교사의 죽음이 위치한다. 고인의 명복을 제대로 빌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이 두 쪼가리로 나뉘게 되었는지 성찰하고 공부하고 토론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을 둘로 쪼개는 수단들을 철저히 찾아내 제거하고 다시금 세상을 하나로 만들 방법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 너와 나, 우리와 그들, 사람과 지구가 진정 ‘평화롭게’ 하나 되는 세상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