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 비극 악용하는 정부의 '학생인권조례' 공격
학부모‧학생‧교사 서로 불신‧대립하는 교육 현장
'죽어가는 아이들'에서 이젠 '죽어가는 교사들'로
승자독식, 각자도생 사회 그대로 반영하는 교육
윤석열 정부는 이간질과 마녀사냥 기회로 이용
'학생인권조례'와 '진보교육감'에게 책임 떠넘겨
"난 정말 아이들을 사랑해서 우리나라를 사랑해서 교사가 됐어. 애들은 다 너무 예뻐. 근데 이제는 교육을 할 수가 없어. 기사를 보고 눈물이 멈추지가 않아. 교사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정말 죽고 싶어."
서초구 초등학교 교사의 비극적 선택이 있은 후에 어떤 현직 교사가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린 글이다. 지금 수많은 교사가 느낄 슬픔과 절망을 보여 주는 이 글을 보면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가 예쁜 아이들을 만나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우리 사회와 교육의 모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요즘은 고통에 시달리던 교사들의 절규와 비극적 소식이 많이 들려오지만, 한 세대 전에는 학생들의 비명과 비극적 선택이 더 많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한 학생들도 비슷한 모순을 지적하고 절망을 토로했다.
"난 꿈이 따로 있는데, 난 친구가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은 우리 엄마가 싫어하는 것이지. 나에게 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고 하는 분, 친구와 사귀지 말라고 슬픈 말만 하시는 분, 그분이 날 15년 동안 키워준 사랑스런 엄마. 너무나 모순이다. 모순. 세상은 경쟁! 공부! 아니 대학!"
이것은 1986년에 스스로 세상을 등진 한 여자 중학생이 친구에게 남긴 편지 형식의 유서에 담긴 내용이었다. 여기에서는 또 학교에서 꿈을 키우고 친구를 사귀고 싶었던 학생을 가로막은 것이 그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였다는 모순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교육과 학교는 서로를 사랑하는 학부모와 학생과 교사가 서로 불신하고 대립하게 만들면서, 아이들의 꿈을 짓밟고 죽음으로 몰아가던 곳에서 이제 교사들의 희망까지 빼앗고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곳으로 변화하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학교가 질서와 복종을 요구하는 군대와 비슷했다. 교장과 교사와 학생의 위계는 분명했고, 엄격한 규율과 체벌이 존재했다. 두발 검사와 복장 검열 속에 학생들의 자유와 인권은 거의 보장되지 않았고 입시경쟁은 치열했다.
반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학교는 마트나 편의점과 비슷하다. 교육은 시장이고 상품이다. 공급자가 있고 소비자가 있고 서비스에 대한 끝없는 평가가 있고 만원과 불만이 접수된다. 입시경쟁은 더욱 시장화되면서 더 극심해졌다.
문제는 학교에서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돌보고 성장시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소중한 일이다. 따라서 교육은 지식의 전수이고 훈육이면서, 돌봄이고 인간적 상호작용이다. 사회와 국가는 그것이 가능하도록 충분한 지원을 하고 조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어떤가? 아이들은 경쟁과 입시에 내몰려 있고, 학부모들은 각자도생 사회의 압력에 직면해 있고, 교사들은 교육에 집중할 수 없는 조건인데, 사회와 국가는 그것을 방치해 왔다. 입시는 사교육 시장으로 넘어갔듯이, 학교폭력과 학내 갈등도 법기술자들이 좌우하는 법시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시장 경쟁에서 재벌과 대기업들의 승자독식이 일어나듯이, 학교와 입시 경쟁에서도 더 많은 돈과 권력을 가진 학부모와 자녀들이 더 유리한 위치에 서고 있다. 사회에 만연한 능력에 따른 줄 세우기와 강약약강의 갑질은 학교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들은 공교육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지난 봄 설문조사에서 현직 교사의 87%가 이직이나 사직을 고민하고 있다는 응답이 나왔고, 이제 교사가 학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터져 나왔다. 서글픈 것은 이 비극에 대한 반응 속에서도 한국 사회 교육의 위기와 모순이 얼마나 심각하게 곪아 있는지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비극에 직접적으로 작용한 갑질과 악성 민원이 있었다면 당연히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특정 집단 전체를 피해자나 가해자로 일반화하면서 서로 상처를 주도록 유도하고 있다. '버릇없는 금쪽이들에게 체벌을 허용하라'는 목소리와 가부장 사회에서 양육을 전가 받은 여성들을 '맘충'이라고 낙인찍고 혐오하는 일이 다시 나타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학생인권조례'와 '진보교육감'과 '전교조'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윤석열 정부의 반응이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학생의 인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우선시되면서 교사들의 교권은 땅에 떨어지고 교실 현장은 붕괴되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최근 발생한 초등교사의 극단적 선택은 '학생인권조례'가 빚은 '교육 파탄'의 단적인 예"라며 이것이 "종북주사파가 추진했던 대한민국 붕괴 시나리오의 일환"이라고 했다. 수해 피해도 '4대강 사업을 막은 좌파정권이 만든 치수 파탄의 결과'이듯이 이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과거 보수우파 정부를 계승하고 있고, 보수우파 정부들은 교사들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노동3권과 정치적 참정권조차 가로막으며 전교조 마녀사냥에만 매달려 왔다. 자사고와 특목고를 만들고 교육을 서열화하면서 무한경쟁의 각자도생 속으로 학생, 학부모, 교사들을 몰아넣어 왔다. 그러면서 공교육에 대한 예산과 투자는 오히려 삭감해 왔다.
따라서 지금의 비극에 대한 책임을 돌아보며 잘못된 방향을 수정하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교사의 기본권조차 짓밟던 이들이 갑자기 '교권'의 수호자로 변신해서 그것을 '학생인권'과 대립시키며, 책임을 전가하고 새로운 희생양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이것은 지금과 같은 비극을 낳은 교육의 위기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권을 위해서 학생인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의 목소리를 듣고 권리를 보장하면서 입시 경쟁과 서열화, 승자독식과 각자도생 사회의 압력에서 학생과 학교와 교육을 지켜내는 길을 머리를 맞대고 함께 찾아가는 것이다. 지금 커지고 있는 교사와 교사단체들의 목소리와 행동, 연대의 움직임들은 이를 위한 큰 힘이 될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장난기와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눈을 떠올려 보자. 학교에 들어가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시험지와 성적표가 쌓이는 만큼 그 눈은 흐려지고 어두워진다. 왜냐하면 학교는 단지 국어, 영어, 수학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법, 친구를 누르고 올라가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낙오한 아이는 모멸감과 자기 비하를 배운다.
그러나 학교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경쟁에서 떨어져도 그 상처를 이겨내고 자존심과 희망을 지킬 수 있는 법을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런 교육은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사랑하고, 학부모와 교사가 서로를 신뢰할 때 가능하다. 그러면 서로를 사랑하던 이들이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교육 현장의 위기와 모순은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