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은 미국에겐 ‘신의 한수’ ?

[창간기획:신냉전,판을 바꾸자] ④-1 샌프란시스코 1.0체제

일본 보수우익에겐 ‘천우신조’

분단됐기에 분열했나, 분열 때문에 분단됐나

한반도 분단 덕에 미국은 한국·일본을 다 얻었다

한일관계는 미국이 깔아 놓은 기울어진 운동장

에즈라 보걸, 웬디 셔먼 등 지식인들의 일본편향 “한국은 없었다”

2022-11-23     한승동 에디터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8일(현지시간) 오후 일본 총리관저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검찰 길들이기라는 비판을 샀던 검찰청법 개정을 이번 정기국회 회기 중에는 보류하기로 이날 결정했다. 2020.5.19. 도쿄 교도연합뉴스

 

한반도는 분단됐기 때문에 분열된 것인가, 분열됐기 때문에 분단된 것인가. 달리 말하면,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반도를 북위 38도선 횡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갈라 놓았기 때문에 결국 남북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고 전쟁까지 치른 뒤 분단이 고착된 것인가. 아니면 한민족 내부의 좌우 분열, 남북 분열이 미국의 38도선 획정을 계기로 분단으로 귀착되게 된 것인가.

분명한 것은, 한민족 내부가 먼저 좌우 이념으로 사실상 분열돼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38도선 획정은 한반도 분단의 1차 원인이 아니라 2차 원인일 뿐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즉 분열돼 있었기 때문에 분단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한민족 사회의 내부 분열 때문에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이라면, 지구상의 2백여개 나라들은 지금 거의 예외없이 분단국가가 돼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이념이나 이해관계로 대립하거나 분열돼 있지 않은 경우는 없으니까. 그것은 결국 미 점령군이 한반도를 38도선으로 갈라 놓지 않았다면, 한반도가 설사 격심한 내부 분열을 겪었을지라도 남북으로 분단되진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은 통일이 됐지만 독일이나 베트남이 분단국가가 된 것도 어떤 이유에서든 프랑스 미국 등 외부세력이 개입해 그들 나라를 갈라 놓았기 때문이다. 특정 사회가 아무리 이념이나 이해관계로 심각한 내부분열을 겪더라도 스스로 갈라져 분단국가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시적으로 분단되더라도 머지 않아 재통합(통일)된다. 1천년 이상 민족적·영토적 통일을 유지해 온 나라가 외세의 개입으로 절반으로 분단된 채 반세기가 지나고 70년이 넘도록 재통합되지 못한 경우는 한반도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미국은 38도선 획정으로 한반도의 절반을 당시 같은 연합국이던 소련에게 넘겨 줌으로써 같은 패전국이었음에도 복수의 전승국(연합국)들이 분할 지배한 독일과 달리 일본을 미국 단독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그렇다면 일본을 단독으로 지배하기 위해 한반도를 분단시켰다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을까.

역사학자 개번 매코맥 호주 국립대 교수는 이런 일본을 ‘종속국가’라고 했지만 1990년대 초 미야자와 기이치 정권 때 부총리를 지낸 자민당 중진 고토다 마사하루는 미국의 ‘속국’ 곧 식민지라고 했다. 미국은 그 속국의 경제권에 한국을 편입시켜 종속시키는 전략을 구사했고, 미중 패권경쟁이 본격화하면서 이제 한일의 군사적 통합까지 종용하고 있다.

그 38선 획정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쟁이 일어나 분단된 남북이 동서냉전과 열전의 최전선이 됨으로써 미국은 동아시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장기 주둔할 명분을 얻었고, 미국 냉전전략의 동아시아 교두보 일본을 지키는 고도로 무장되고 요새화된 전방기지 한국을 반영구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됐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는 곧 미군 주둔의 역사다. 미국이 애초에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에게 38도선 획정과 분할은 분단된 한국과 일본을 확실하게 동시에 지배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신의 한 수’였고, 패전국 일본에겐 그들의 정치 지도자들이 얘기했듯이 그들을 기사회생시킨 ‘천우신조’였다.

미국과 일본에겐 이렇듯 한반도 분단체제를 고착하고 유지하려는 충분한 내적 동기가 작동했고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냉전시대에 적대적인 두 진영의 최전선이 돼 전쟁까지 치른 뒤 사활을 건 체제경쟁에 사로잡힌 남북한은 각기 그런 내적 동기를 지닌 외부세력에 체제 및 경제 안보를 의존함으로써 각기 그들 외부세력의 이익에 동조, 부합하는 세력이 주류를 형성했다. 그리하여 남북 동족간 대결의 원심력과 한미·한일 이민족간 유착의 구심력이 중력처럼 작용해, 한반도 영구분단으로 가는 구조가 정착됐다. 그 구조를 만든 것이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9월에 체결되고 다음해 4월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체제 1.0)이다.

2014년 초에 하버드대 교수 출신으로 <재팬 애즈 넘버원>이란 책으로 유명해진 에즈라 보걸이 한국에 왔다. 그해 1월, 그가 쓴 <덩샤오핑 평전>의 한글판 출간에 맞춰 온 그와의 기자 간담회가 조선호텔에서 열렸는데 책 담당 기자로 그 자리에 갔다. 얘기 도중에 그가 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일본과 한국·중국이 다투고 있는 일과 관련해 일본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에, 당신은 그게 아베 신조 정권 때문이 아니라 한국·중국 탓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보걸은 망설임없이, “그렇다”면서 당시 아베 정권 이후 극심해진 일본의 극우적 행태는 일본 내부문제보다는 그런 일본에 과잉반응하는 중국과 한국 탓이 더 크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빌 클린턴 정권 때 국가정보회의 동아시아담당 분석관도 지낸 미국 내의 이른바 ‘지일파’ 지식인 보걸과 같은 유형의, 식민주의자적 사고와 시각을 지닌 인물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미국과 일본 조야, 그리고 한국에서 ‘동아시아 전문가’를 자처하며 대세를 이룬 것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이었다.

“한국과 중국인들이 2차 대전 이후 도쿄(일본)와 이른바 ‘위안부’ 문제로 다퉈 왔다. 역사교과서 내용이나 여러 바다(해역) 이름을 놓고 싸우고 있다. 모두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좌절감도 안겨 준다. (중략) 물론 민족주의 감정은 여전히 이용될 수 있으며, 어느 나라든 정치 리더가 예전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싸구려’ 박수갈채를 받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도발은 진보가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이것은 2015년 2월 27일 당시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던 웬디 셔먼이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에서 한중일 3국간의 과거사 갈등을 두고 한, 잘 알려진 발언이다. 그때도 한일간 과거사를 왜곡한 일본의 역사교과서와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분쟁으로 한중일 3국 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 셔먼의 눈에는 일본의 극우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겨 8년 넘게 ‘싸구려 박수갈채’를 받으며 장기집권한 아베 신조가 오히려 한국·중국 민족주의 감정의 피해자로 비쳤음이 분명하다.

셔먼의 그 발언이 한국인들의 반발을 사 파문이 일자 미국 정부가 진화에 나섰고 셔먼은 “협력적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던 것“이었다고 둘러댔지만, 그의 진심의 일단을 그의 말을 전한 다음과 같은 보도에서 엿볼 수 있다. “(웬디 셔먼은) 일본을 오랫동안 국제법의 주도적 후원자이자 국외 개발의 관대한 기여자였다고 치켜세웠다. 또 이슬람국가(IS)에 의해 살해된 일본인 인질을 언급하면서 일본이 자위대의 적절한 역할에 관해 논의를 하고 있다고 소개한 뒤, 일본은 현대적 요구와 과거에서 어렵게 배운 교훈을 조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셔먼이 일본이 주도적으로 후원했다며 치켜세운 ‘국제법’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다. 그리고 ‘자유무역’을 강조한 오사카 G20 정상회담 직후인 2019년 7월 1일 아베 신조 정권이 돌연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를 발표한 뒤 구실로 삼은 강제동원 피해자(징용공) 배상문제와 관련해 한국정부를 압박할 때마다 입에 올린 “국제법을 지켜라”의 그 국제법이기도 하다.

셔먼이 강조한 ‘협력관계의 중요성’은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로 결실을 맺었다. 12·28합의 때 그는 이미 국무부 차관 자리에서 물러난 뒤였지만, 위안부 합의를 통해 한일간 갈등을 봉합하도록 종용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을 독려했던 미국정부의 일선 책임자가 그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의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자 셔먼은 국무부 부장관으로 6년만에 외교 일선에 복귀했다. 오바마 정권과 박근혜 정권 때의 미 국무부 정무차관 셔먼, 그리고 바이든 정권과 윤석열 정권 때의 국무부 부장관 셔먼이라는, 미국 민주당 정권과 한국 보수정권 조합의 닮은 꼴에서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미국정부의 ‘한일유착’ 요구와 한국정부의 수용이다.

한일관계 ‘정상화’, 한일관계 ‘회복’, ‘개선’, ‘협력 강화’ 등으로 수식되는 한일유착은 일본과 한반도 절반을 점령한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종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 이후 한결같이 견지해온 철칙과 같은 것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자 마자 한일관계 회복을 서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한일유착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항상 일본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운 일그러진 유착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당시 일본총리 요시다 시게루(아소 다로 자민당 부총재, 전 재무대신의 외조부)는 미 국무부 고문이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담당 특사였던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국과 평화조약’이라는 비망록을 건냈다.

“한국은 (…) 일본과 전쟁상태나 교전상태에 있지 않았기에 연합국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한국이 평화조약의 서명국이 된다면, 일본 내 한국 국민은 재산, 보상 등에서 연합국 국민으로서의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하고 주장할 것이다. 오늘날에조차 거의 100만에 달하는 한국인 거주자 숫자(일본 패전 무렵에는 거의 150만)로 인해 일본은 모든 방식의 증명할 수 없고, 또 엄청난 요구에 압도될 것이다. 재일 한국인 거주자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일본정부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청구권을 포기하고(미국 초안 제3장 영토 3조), 일본이 한국의 완전 독립을 승인하는 것으로 평화조약을 제한하며, 양국 간의 정상관계 수립은 현재 한국 사태가 해결되고 반도에 평화와 안정이 회복될 훗날에 체결될 조약으로 남겨 두는 것이 최상이라고 확신한다.”(<독도 1947> 정병준, 돌베개. 2010)

결국 그들의 뜻대로 됐다. 전쟁의 최대 피해국의 하나였던 한국은 그 전쟁을 청산하는 강화조약에서 완전히 없는 나라로 간주 됐다. 중국과 함께 그 회의 참가를 거부당했다.

조약 체결일이 얼마 남지 않은 1951년 8월 22일 덜레스 특사는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와 면담했다. 양유찬 대사는 미국이 한국을 대일 평화조약에 서명국으로 초청하는 건지, 아니면 옵서버로 초청하는지의 여부를 문의했다. “덜레스는 서명국이나 옵서버 자격이 모두 아니라고 답했다. 회담에 옵서버 지위를 두지 않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단지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에 비공식 자격(an informal capacity)으로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양유찬 대사는 회의진행과 관련해 한국에 어떠한 공식적 자격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덜레스는 없다고 대답했다.”(같은 책)

미국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 무초는 “한국은 (중일전쟁에서) 교전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한국정부의 위상을 제고하고 미국과 유엔의 이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도 한국은 ‘일본조약’에 서명국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을 국무부에 올렸다.(이태진 ‘’한국참가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영국의 의견 차이‘, <샌프란시스코체제를 넘어서> 수록) 덜레스조차 한국이 중국과 만주 등에서 일본군과 싸운 교전국이며, 한국을 조약 서명국(연합국)에 넣는 것이 한국전쟁을 수행하는데도 유리할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처음에는 조약 초안에 한국을 서명국(전승국) 명단에 올렸다. 냉전이 격화하면서 전쟁범죄 면죄부를 받고 전후에 다시 부활한 일본 보수세력과 홍콩·중국에 대한 이권, 한국이 서명할 경우 북한문제가 불거지면서 소련과의 알력이 커질 것으로 계산하고 한국의 조약 참여에 반대한 영국의 철저한 제국주의적 계산을 따라 미국은 궤도를 수정했다.

그리하여 한국은 사실상 없는 나라였고, 독립국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은 요시다 시게루가 얘기한 대로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서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일본의 침략과 전쟁, 식민지배 책임을 묻지 않은 미국은 한일협정에서도 기본조약 제2조에 일본 패전 이전까지 맺은 온갖 불평등조약이 모두 국제법적으로 합법이었다는 일본쪽 해석을 받아들였다.

한국전쟁 전에 사실상 한반도를 떠나 한국을 버렸던 미국은, 전쟁 발발 뒤 소련이 홋카이도 쪽으로 들어아 일본을 점령하는 것을 가장 겁냈다. 한국이 미국에게 중요한 나라가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일본을 지키려면 한국을 확보하고 무장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을 위하여.

日자위대 호위함, 미국 함정 보호활동 2017.5.1. 도쿄 교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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