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죽이기와 애도의 불가능성

'친민주당' 매체라는 악의적 프레임

희생양이 된 용산소방서장과 민들레

망자에 대한 호명이 애도 행위의 시작

2022-11-19     남궁협 칼럼
남궁협/언론학자

사회 전체가 패닉에 빠졌을 때는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말 한마디가 마녀사냥 하듯 사태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이번 10.29 참사 때도 그랬다. 참사 소식을 듣고 모두 황망해하고 있을 때, 몇몇 극우 인사들과 유튜버들이 ‘핼러윈’을 즐기는 개념 없는 젊은이들이 사고를 불러일으켰다는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이러한 비난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희생자들은 ‘부끄러운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윽고 정부는 희생자의 위패와 영정사진이 없는 분향소를 일방적으로 설치하여 애도 없는 조문을 강요하였다. 정부는 뒤늦게 유가족의 인권을 들먹이지만 희생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교묘히 활용했을 거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악의적 프레임

이번에는 최근 창간한 <시민언론 민들레>가 희생자의 명단을 공개하자 곧바로 “‘친야 매체’가 정치적 목적으로 ‘유가족의 동의도 받지 않고’ 보도하는 ‘패륜 행위’를 저질렀다”는 요지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민들레>를 친민주당 매체라는 굴레를 씌워 진영으로 가둬 놓으면 싸움은 한층 쉬워진다. 여기에 유가족의 동의 없이 아픔에 2차 가해를 하는 패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식으로 대중의 감정선을 자극하게 되면 참사의 원인도 책임도 뒷전으로 밀려나고 진흙탕 감정싸움만 남는다. 이렇게 되면 합리적인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지금까지 언론이 희생자들의 신원을 공개하는 게 보도 관행이었다는 주장도,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려는 목적이 진정한 애도를 하기 위함이라는 호소도,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위패와 영정 없는 분향소가 우리의 장례문화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모두 간단히 무시된다. 참사의 책임이 있는 쪽에서 보면 그야말로 환호작약하며 ‘게임 끝’을 선언할 일이다. 그래서일까. 신속하게 <민들레>를 향해 수사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희생양이 된 용산소방서장과 <민들레>

더 얄미운 건 기성 언론이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말처럼, 기성 언론들은 과거 자신들의 보도 행태를 잊은 듯 시치미를 떼고 한목소리로 <민들레>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그동안 유가족의 슬픔에 동참한다는 미명 하에 ‘신중한 보도’를 내세워 침묵의 카르텔을 이어가던 기성 언론에게 <민들레>의 명단 공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보수언론은 그렇다 치고 진보매체와 단체라고 하는 곳마저 <민들레>의 명단 공개를 짐짓 타이르고 나무라는 모습은 몹시 위선적으로 보인다. 누군가 악의적인 프레임을 걸어 진흙탕 싸움을 걸어오면 으레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재빨리 구경꾼 모드로 돌아서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어느 진보매체 언론인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희생자의 신원을 공개했던 언론의 보도 관행을 회상하며 이제는 유가족의 인권 존중 의식이 높아져서 신중해야 한다고 훈수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게 유족에 대한 2차 가해 위험보다 더 큰 공적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라며 은연중 신생매체의 경박함을 나무랐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발표한 성명서를 보면 기성 언론이 얼마나 동업자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는지 알 수 있다. 재난보도준칙 어디에도 희생자의 이름을 공개하지 말도록 하는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친절하게(?) 확대해석하여 <민들레>의 성급함을 나무라고 있다.

그토록 사려 깊게 진실을 추구하는 자신들은 유족들을 위해 과연 어떤 노력을 했다는 건지 되묻고 싶다. <민들레>를 나무라기 앞서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 희생자의 명단을 공개하는 일차적 책임이 있는 정부에게 먼저 따져봤는지, 그러면 자신들은 유가족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분향소 설치에 대해서 정부에게 납득할 만한 해명을 요구했는지 등.

이미 우리는 세월호 때 언론의 민낯을 봤었기 때문에 기성 언론의 행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에서 얻은 교훈이라면 희생자와 그 가족들을 배려한다는 명분으로 내세운 ‘신중한 보도’가 공교롭게도 정부의 사건 축소 의도와 맥을 같이 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번 10.29 참사에 대한 언론 보도의 흐름도 세월호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중 모드’를 앞세워 정부의 발표만 받아쓰면 책임질 일도, 논란의 위험을 뒤집어쓸 일도 없을 테니까.

기성 언론은 참사 초기부터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자격지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뒤늦게나마 희생자들의 이름을 거명하여 애도의 시간을 갖고자 했던 <민들레>에 뭇매를 가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사고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와 가장 늦게까지 외롭게 현장을 지휘하던 용산소방서장을 입건 수사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자신들의 무책임이 들킬까 봐 성실히 임무를 수행한 사람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희생시키는 것과 흡사하다.

망자의 호명이 애도의 시작

악의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태의 맥락을 차분히 되짚어보는 일이다. 왜 정부는 지금껏 희생자 명단을 움켜쥐고 공개하지 않았을까? 왜 정부는 위패와 영정도 없는 분향소를 서둘러 설치했을까? 수십만 명의 공무원을 거느리는 행안부 장관은 국회에서 “150명이 넘는 희생자의 유가족에게 일일이 동의를 구하는 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어서”라고 답변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우리 언론은 참 너그럽기도 했다. 애도를 불가능하게 해서 참사의 책임을 묻는 화살이 자신들을 향하지 않도록 하려는 정부의 의도와 (이를 알면서도) 정부의 발표만 기다리며 침묵한 언론이 논란을 일으킨 주범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들이 한목소리로 ‘명단 공개’가 패륜인 것처럼 떠들고 있다.

이번엔 좀 더 근원적인 맥락을 살펴보자. 죽은 이의 이름을 공개하는 게 그토록 중요한가? 왜 다들 망자의 이름에 목을 매는 걸까? 죽은 자에 대한 애도 행위는 인간만이 가지는 문화적 관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산 자가 상실의 아픔을 달래고 일상으로 회복하는 심리적 치료행위이기도 하다. 그런데 참다운 애도가 가능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첫째, 죽음의 원인이 명백하게 밝혀져서 그 죽음의 책임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이 공유되어야 한다. 그래야 유족들을 비롯해 망자와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 내면 깊숙이 박혀 있던 일말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망자와 자신을 심리적으로 분리하게 된다. 지금껏 세월호 유가족과 침몰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던 많은 사람들이 희생자들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사고원인과 책임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사회적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둘째, 애도는 상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애도를 하려면 산 자와 망자 간에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망자를 상징하는 매개체를 통해 감정이입이 가능해져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언어를 비롯하여 온갖 직간접적 상징을 통해서만 소통이 가능하다. 상징에는 공통의 정서와 문화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서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망자를 상징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름과 사진은 망자의 흔적이 담긴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이러한 상징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감정이입이 가능해져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 10.29 참사 희생자 분향소에는 구체적인 이름과 영정사진이 배제된 채 망자와는 아무런 사연이 없는 하얀 국화꽃만 획일적으로 배열되었을 뿐이다. 마치 ‘158명’이라는 익명의 숫자만 평면적으로 나열하였듯이. 그 결과, 사람들은 오직 의무감에 이끌려 ‘애도 없는 추모’ 이벤트에 참석하고 만 셈이 되었다.

이렇듯 10.29 참사의 원인도 규명되지 않았고, 더구나 희생자들의 이름과 사진조차 내걸지 않은 채 정부가 임의로 정한 추모 이벤트는 사실상 ‘애도의 불가능성’을 말해준다. 사회적 참사의 경우 희생자에 대한 애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면 그것은 사회적 트라우마로 전화하고 만다. 한 개인에게 심리적 트라우마가 제대로 해소되지 않으면 언젠가 정신적 왜곡으로 나타나듯이 사회적 트라우마의 경우도 언젠가 대중적 격분으로 분출된다. 지난번 세월호의 아픔이 촛불로 승화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세월호 참사와 이번 10.29 참사와 같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회적 안전시스템의 결함에 따른 인재 때문에 발생한 대형 참사의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그 원인과 책임을 권력층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사회적 참사가 발생할 때면 국가기관은 서둘러 참사의 원인과 규모를 왜곡하고 축소하려 하게 마련이다. 세월호 참사 때 사고의 원인을 선박회사의 부실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책임소재를 축소하려고 하였던 것이나, 이번 10.29 참사 때는 ‘참사’라는 용어 대신에 ‘사고’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참사의 원인을 희생자들의 불운 탓으로 돌리려고 했던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렇듯 권력이 사태를 호도하려고 할 때 언론은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규정하는 언어를 제시하는 데서부터 재난보도를 시작해야 한다. 동시에 언론은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사회적 애도로 승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의 구체적인 보도행위가 희생자의 이름과 사연을 기록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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