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대선 결선투표, 러시아가 웃게 될까
과반획득 후보 없어 28일 결선투표
서방, 에르도안 낙선 내심 학수고대
애국·민족주의 바람, 에르도안에 유리
서방 울고 러시아 웃게 될 공산 커
에르도안이 이번 선거에서 지면 서방은 안도할 것이고, 모스크바는 몹시 불안해질 것이다. 유럽 지도자들은 “더 편한 터키”의 등장을 기뻐할 것이고, 러시아는 중요한 경제적, 외교적 파트너를 잃게 될 것이다.
튀르키예 대통령선거(+ 의회 총선)를 하루 앞 둔 13일 <뉴욕타임스>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그러나 서방쪽 바람을 담은 듯 보이는 이 기사의 이런 표현과는 거꾸로 이번 튀르키예의 선거는 에르도안이 이겨 서방이 울고 러시아가 기뻐하는 쪽으로 귀결될 공산이 커졌다. 14일 개표 결과는 어느 후보도 당선에 필요한 투표자 과반(50% 이상)득표에 미달해 당선자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오는 28일 1, 2위 득표자들이 결선투표를 치러야 한다.
에르도안에 유리한 28일의 결선투표
14일 투표에서는 집권당인 정의개발당 당수요 현직 대통령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9)이 득표율에서 6개 야당 통합후보인 케말 클르츠다로을루(74) 공화인민당 당수보다 약 5%포인트 앞섰다. 그런데 같은 날 치러진 의회선거에서도 집권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것으로 보건대, 에르도안이 결선투표에서 이길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에르도안의 튀르키예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면서도 친서방 일변도에서 벗어나 러시아와의 관계도 강화하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도 동참하지 않을 정도로 중립적인 자주 외교노선을 추구해 왔다. 이에 대해 ‘반에르도안’ 기치를 내걸고 대적한 클르츠다로을루의 야당쪽은 집권할 경우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공약하는 등 더 친서방적인 자세를 취했다.
선거 결과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에르도안은 득표율이 49.51%, 클르츠다로을루는 44.88%(<가디언> 5월 15일)이었다.(<아나톨리아 통신>에 따르면, 개표율 99.87% 상황에서 에르도안 득표율은 49.50%, 클르츠다로을루는 44.89%였다. 투표율은 87%) 동시에 치러진 의회(일원제, 정원 600명) 선거에서 집권당이 과반인 32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따라서 대통령이 클르츠다로을루로 바뀌는 정권교체가 일어날 경우 의회 다수당인 야당과 대립하게 되는 상황을 유권자들이 바라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결선투표에서 에르도안 쪽으로 더 많은 표가 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문제는 득표율 5.17%로 3위를 한 극우파 후보 시난 오안 지지표들이 어디로 갈 것이냐인데, 지금 분위기라면 이 또한 에르도안에게 유리할 것으로 보인다. 1차 투표의 1, 2위 지지자들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에르도안은 오안 지지표 가운데 일부만 더 가져가도 클르츠다로을루가 얻은 표보다 많아 이길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에르도안 승리가 확정적이라고 볼 순 없지만, 에르도안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이번 튀르키예 대선은 올해 세계에서 치러지는 선거들 중에 가장 중요하고도 관심이 많이 쏠리는 선거로 지목돼 왔다. 에르도안이 선거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지위를 크게 흔들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배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과 중·러 중심의 신냉전적 대항진영 간의 힘의 균형까지 흔들어 놓을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의 남방 출구인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 등 전략적 요충지들을 차지하고 있는 터키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유라시아의 세력균형이 요동칠 수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대리전을 치르면서 신냉전적 진영대결 구도를 강화해 가고 있는 서방과 러시아에게 이번 튀르키예 대선 결과는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서방, 에르도안 낙선을 학수고대
이번 선거 직전까지의 여론조사에서는 6개 야당 통합후보 클르츠다로을루가 앞서갔고 지지율 50%를 넘은 적도 있다. 그래서 정권교체 가능성이 점쳐졌고. 서방 쪽은 노골적으로 어느 한쪽 편을 들진 않았으나 에르도안이 지기를 내심 학수고대했다. 서방쪽에 훨씬 더 편한 클로츠다로을루가 집권할 경우 러시아의 고립은 한층 더 강화되고 서방의 결속은 더욱 단단해질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지난 3월 오랜 세월 중립을 유지했던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했지만 스웨덴은 튀르키예 정부의 승인 거부로 나토 가입이 보류됐는데, 지금의 야당이 집권하면 이 문제도 나토의 바람대로 쉽게 풀릴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은 스웨덴이 쿠르드 분리독립주의세력 중 비합법 무장 테러조직인 ’쿠르디스탄 노동자당‘(PKK)에 피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며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아직도 손을 들어 주지 않고 있다. 에르도안이 낙선하면 이 문제도 승인 쪽으로 쉽게 풀릴 가능성이 높다.
선거 전 에르도안 지지율 급락
서방이 이런 기대를 했을 만큼 선거 직전까지 에르도안은 거의 20년이 돼가는 집권 기간에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선거 전까지 에르도안 정부가 취해 온 일관된 저금리 정책으로 튀르키예 통화 리라가 약세화하면서 인플레율이 지난해 85%까지 올라가는 물가급등으로 서민들 살림살이가 팍팍해졌고, 사망자가 5만 명을 넘긴 2월의 대지진 피해까지 겹쳐 에르도안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이 거셌다. 대지진 때 구조대가 늦게 현장에 도착하는 등 늑장대응에다, 피해를 엄청나게 키운 건물 붕괴의 원인이 된 내진건설 기준 무시 등 정부 관리감독 부실과 부패를 의심하게 만든 상황이 에르도안 비판과 지지율 급락으로 이어졌다.
여론조사와 달랐던 1차 투표 결과
그럼에도 막상 투표함 뚜껑을 열자 에르도안 지지율이 더 높은 것으로 나왔다. 왜 그런 것인가. 전문가들은 행정권을 장악한 이른바 집권당 프리미엄에다 주요 미디어들의 집권당 편향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다. 전문가들이 주목한 점은, 이번 선거에서 애국주의, 민족주의 바람이 불었다는 점이다. 야당은 에르도안의 권위주의적 강압정치를 비판하면서 대통령 권한을 강화한 ‘실권형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되돌리고,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허용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상대적으로 친서방적이며 소수민족 쿠르드 민족의 권리도 보장하겠다는 쪽이다. 우선 애국주의, 민족주의 바람이 거세지면 쿠르드족 입장을 고려하는 야당쪽이 불리해진다. 이는 결선투표에서도 쿠르드족 표와 우경화한 유권자들 표 모두를 얻어야 하는 야당후보에게 딜레마를 안겨 줄 것이다. 자칫 어느 한쪽으로 쏠렸다가는 오히려 양쪽 표를 다 잃을 수 있다.
게다가 6개 야당연합은 그 내부에 세속주의, 민족주의, 이슬람주의 등이 잡다하게 포진해 있는데 후보자 선정과정에서 서로 이해관계가 부딪쳐 클르츠다로을루로 단일화를 했음에도 일부 정당 지지자들이 그에게 표를 찍지 않았다.
애국주의 먹힌 권위주의 고도성장 개발독재
“예전엔 터키가 다른 나라 지도자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세계가 터키에 귀를 기울인다. 러시아와 우크라 중재도 다른 어떤 나라보다 잘 하지 않을까.” 자긍심 넘치는 에르도안 지지자들의 이런 얘기처럼, 집권 이후 친서방 일변도에서 벗어나 중립적인 자주노선을 강화하면서 중국 러시아와도 가까워져 실리를 챙기고 튀르키예의 외교적 지위도 높인 에르도안에 대한 지지는 최근의 여론 악화에도 불구하고 굳건했다. 20년에 가까운 그의 집권 기간에 달성한 높은 경제성장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에드로안은 2002년 총선에서 그가 이끈 정의개발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다음해인 2003년에 총리가 됐다. 2014년에 직선 대통령제로 개헌해 그 첫 대통령에 당선됐다. 2016년 7월에 쿠데타 미수사건이 일어나자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2년간이나 그것을 연장하면서 시민활동과 미디어 단속을 강화했다. 2017년 말까지 약 16만 명을 단속, 체포했으며, 군인과 경찰, 교사 등 공무원 15만 2천여 명을 면직시켰다. 1인지배하의 전형적인 권위주의 개발독재체제 강화다. 그해 4월에는 의원내각제를 없애고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실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한 뒤 2018년 6월에 역시 그 첫 당선자가 됐다.
“세계는 5개국보다 크다”며 5개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유엔 안보리 개혁을 주장하고 더 다극적인 국제질서 재편을 추구해 왔다. 시리아 내전에도 개입해 쿠르드족 무장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시리아 국경을 넘어들어가 군사작전을 펼쳤다. 국제사회가 거기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자 “다른 나라의 허가를 받을 일이 아니다”는 강성 발언으로 “체증 내려가는 시원한 얘기”라는 애국주의자들의 찬사와 함께 국내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아사히신문> 5월 14일) 나토 가맹국이면서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뒤 에르도안은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양 진영 사이에서 중재자, 중개자 역을 자임하면서 러시아 자원을 대량으로 들여오는 수입국이자 러시아의 자원 수출입 방패막이와 창구 역할도 해 왔다.
푸틴과는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난해 3월에는 터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외무장관회의와 정전협의를 중재했다. 7월에는 유엔과 전쟁으로 해로가 막힌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에 유엔과 협의해서 길을 틔워주기도 했다. 터키의 첫 원전 건설을 러시아가 맡고 있다. 러시아와 튀르키예의 이런 관계는 이념적 동맹이나 연대가 아니라 철저히 실리추구의 이해타산에 토대를 둔 공생관계다. 그것은 튀르키예가 우크라이나에 수출한 드론들이 러시아군 공격에 대거 활용되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시리아내전 개입 때는 정부군을 지원한 러시아와는 달리 반군을 지원했다.
미국과는 러시아제 지대공 미사일 S400을 도입해 발사하면서 심한 불화를 겪었고, 제재를 받기도 했다. 서방으로서는 에르도안이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나토 동맹국의 수장이자 눈엣가시같은 '배신자'이자 고분고분하지 않은 독불장군이지만 끌어안고 갈 수밖에 없는, 실로 다루기 어려운 상대다.
그래서 내심 그의 낙선을 바라마지 않았겠지만 그 바람대로 될 가능성은, 물론 결선투표까지 두고봐야겠지만, 매우 낮아 보인다.